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조진국 지음 / 해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너를 처음 본 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따가운 햇살이 온 사방을 차지하고 있는 5월의 어느 날이었다.
너와 나는 마주볼 수 밖에 없도록 배치된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서로 각자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집중해야할 일은 너에게만 해당되는 말일 것 같다. 나는 딱히 가야할 곳도, 만나야할 사람도 없어서 책을 읽고 있었으니까. 한껏 게으름을 피우던 나와는 달리 넌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 공간에는 너와 나 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자리엔 편안함이 흘렀다.
그래서였을까. 너는 문득 하던 걸 멈추고, 온통 푸르고 밝은 창 바깥을 고개만 돌린 채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한참동안 응시했다. 나는 읽던 책 너머로 그 모습을 우연찮게 훔쳐보았다. 그 반짝이던 얼굴. 너의 시선을 따라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쨍한 햇살이 눈으로 달려들었다. 화들짝 다시 시선을 거둬들이는데, 그 길목에 네가 있었다. 눈부신 네가 있었다. 
그 날이었다. 잊혀지지 않는 네 얼굴을 처음 본 것은.

어, 전보다 볼이 좀 더 홀쭉해진 것 같은데? 눈은 더 초롱초롱해지고. 머리도 길었네. 음, 더 예뻐졌네. 뭐야, 진짠데. 나는 더 늙었지? 괜찮아괜찮아, 그래도 어딜가나 다 먹히는 얼굴이라고. 배틀 준비는 잘 되어 가십니까. 내가 금방 따라갈테니까 천천히 하고 있으면 안되겠니? 하하.

그 날 이후로 난 너의 주변을 맴돌았다. 
너는 누굴까, 너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할까, 너는 어떤 사람일까...
내가 처음 본 이미지대로의 너이길 바랐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했다. 이리저리 친구들의 미니홈피를 돌아다니다가 운이 좋게도 너의 미니홈피를 찾을 수 있었다.
난 마치 실수인 것처럼 흔적을 남겼다.
그렇게 가까워지게 된 너는 내가 생각했던 모습 이상으로, 예뻤다.

나 전보다 양이 좀 줄긴 한 것 같아. 그래도 그때보단 많이 먹는다? 역시 꼬박꼬박 챙겨먹는게 중요하다니까. 아직 먹을 줄 모르는게 많긴 하지만 해산물은 좋아. 히히. 좀 살이 쪄야할까? 다들 좀 찌라고 말하긴 하는데, 나는 살이 찌면 답답해. 몸도 무거운 것 같고. 그냥 운동이나 열심히 할까 해! 내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게 되는걸까? 뭐라구? 맞다고? 이런.

나는 너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다. 힘이 되는 말, 즐거운 농담을 하면 언제든 너는 방긋 예쁘게 웃어줄 것 같았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너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부산을 떨었다. 벚꽃같이 흩날리는마음의 이유는, 절반은 너의 첫 모습때문이었고, 절반은 네가 생각하는 것들 때문이었다.
너와 나는 이상하리만치 말이 잘 통했다. 그 순간에 생각하고 있는 물건, 장소, 감정, 과거의 어떤 시간, 사람, 노래, 책...그 많은 것들이 똑같았다. 
너에게서는 빛이 났다. 언제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그냥 고개를 들어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 창밖을 보아도, 날이 더워 그늘에서 땀을 식히다가도, 파란불을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무심히 서 있다가도,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지나다가도, 네가 보였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아름다운 장면은 아니었지만 느꼈다.
그 찰나에도 네가 보일 수 있구나.
모든 현상들이 너와의 인연을 향해 약속한 것처럼 몰려가고 있었다.

놀이기구 잘 타? 난 놀이기구 엄청 좋아해. 고등학교 때였나. 친구들하고 큰 맘 먹고 롯데월드를 갔거든. 새벽같이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서울에 갔어. 너무너무 재밌는거야. 그래서 거의 문닫을 때까지 놀았나 그랬어. 바이킹은 너무 좋아서 한 세 번은 탔나? 놀이기구는 탈 때 가만히 있으면 재미가 없거든. 그래서 막 소리 지르고 그랬어. 아마 그 날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쟤네들 미쳤다고 그랬을거야. 근데 놀이기구 중에도 지금까지 적응 안되는게 하나 있어. 자이로드롭이라고, 그 뚝 떨어지는 기분은 별로. 하하. 나 동물원도 좋아하는데. 그러고보면 취향이 좀 유치하다, 나.

너는 조명같은 사람이었다.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조명같은 사람.
나는 너에게 내 속에 담겨진 이야기를 하나씩하나씩 풀어 놓았다.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들어지는 사람이란 말은 사실이지만, 내 목적에 대입하면 핑계에 가까웠다. 
네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모든 명에는 암이 있는 법이니까. 남들이 모르는 그 부분을, 나는 알고 싶었다. 그래서 네가 한 번 흔적을 남기면 나는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더 많이 흔적을 남겼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무모한 용기였던 것 같다.
너와 나 사이에 많은 시간들이 지났다.
되돌아보면 낯이 뜨거워지고, 화끈화끈한 말들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너를 닮아가고 있었다. 늘 너에게서 배우기만 하던 난 네 말들을, 생각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건 나조차도 모르는 변화였다. 오랜시간에 걸쳐 서서히 끄트머리부터 물들어가고 있었던거다. 그래서 몰랐던거다. 
나는 환하게 웃을 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을 칭찬할 줄 알게 되었고, 나눌 줄 알게
되었다.

내가 삼겹살을 좋아하는 건 지글지글 소리가 빗소리를 닮아서야. 나 비 오는 날을 엄청 좋아하잖아. 비 오는 날 삼겹살은 거의 죽음이야. 근데 딱 하나 삼겹살 집이 마음에 걸리는 건 옷에 냄새가 많이 밴다는 거? 아, 먹고 나서 입안이 까끌까끌해 진다는 것도 있다. 에이, 삼겹살 별로 안좋아하나 보다 나. 어쨌든 소고긴 익혀도 익혀도 질기고, 우린 돼지나 먹자. 응? 아, 나중에 먹자고. 삼겹살엔 소주 한 잔! 넌 한 잔 마시고, 난 한 병 마실게. 그러면 쌤쌤이 되려나. 내가 쫌 불리한 것 같기도 하고?

너는 ’좋아해요’, ’보고 싶었어요’ 가 아니라 ’밥 먹어요’ 란 말로도 누군가의 마음을 잡아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너와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얼굴을 맞대는 시간을 거절할 용기가 내겐 없었다. 이어폰의 한 쪽을 내게 건네던 너의 손길을 거절할 용기가 내겐 없었다. 
곧 떠난다는 사실이 서로의 태엽을 타이트하게 조였을까. 혹은 내가 너무 편했던걸까.
함께 같은 노래를 듣는 동안 그런 생각도 들었다. 너무 좋다. 이렇게 좋아도 되는건가.
입안은 바짝 말라가는데 침 한번 꼴깍 삼킬 수가 없었다.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까봐, 그러면 이상한 분위기가 될 것 같아 끝까지 참았다. 

나는 3이란 숫자를 좋아해. 2보다는 넘치지만 1과 다른 1이 안 맞으면 2는 고독한 숫자가 되어버리잖아. 그래서 둘 사이를 중재할 또다른 1이 필요하단 말이지. 억지같아? 그럼 다른 이유도 있어. 봐봐. 3은 둘이 되면 8이 돼. 3을 뒤집어서 쓴 다음 본래 3하고 붙이면, 짠. 8이 되잖아. 3의 둘은 6이 아니라 8이야.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런 사람과 하고 싶어. 숫자 3같은 사람. 합쳐지면 8이 되는, 2만큼이나 서로에게 플러스가 되는 사랑을 하면 좋겠어.

너와 나는 참 길을 많이 걸었다. 많이 걸었다는 것은 한번에 오래도록 걸었다는 말이다. 나도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너도 걷는 것을 좋아했다. 1년 중 가장 추웠던 날도 함께 걸었고, 처음 같이 술을 마신 날도 함께 걸었다. 수업을 땡땡이치고 카페에 처음 간 날도 함께 걸었다. 너에게 처음은 나에게도 처음이었다. 
또 너와 나 사이에 시간은 흘렀다.
너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이 있다고. 조금 떨렸다. 많이 궁금했고, 그것보다 훨씬 많이 아팠다. 그래, 솔직히 이건 나 혼자 시작한 일이고, 내가 자초한 일이었어. 누구를 탓할 것도 아니야. 그래도 휘청이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너의 말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너는 말해주지 않았다. 나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즐거웠고 행복했다. 그 시간만큼은 너와 내게만 주어진 시간이었으니까.
또 너와 나 사이에 시간을 흐를 것이다.

그러겠지만.
나는 여전히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을 기다려 너를 본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을 기다리면 오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은 얼마나 행복한가. 왜 미리 알지 못했을까. 세 시간을 기다려 단 오 분을 만나더라도, 그 오 분이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시간일지라도 기다리면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정말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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