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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뻥이요!
1톤 트럭이 출렁, 했다. 그리고 색색이 쏟아져 나오는 뽀얀 눈꽃송이들.
계집애들은 귀를 막고 빽빽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속에서 나는 히야, 하고 입을 벌렸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저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저 위대한 킥복싱 선수 좀 봐라. 안 일어나, 새끼야!"
[1]
보통, 내가 바라는 꿈이나 왜 지금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질문 받았을 때, 열에 여덟은
학창시절 은사님에 대한 사연을 풀어 놓으리라. 보잘것 없는 학생인 나를 발견해주시고
옆에서 용기를 복돋아 주셨던 아름다운 기억 속의 선생님. 그리고 생각보다 잠재력을
가지고 있던 나.
적당히 감동적이고, 적당히 교훈적인 이야기. 보편화 된 구조 속의 매너리즘.
나도 처음에는 그 안온함 속에 나를 묻었다. 거기서 지금의 나를 끌어내려고 애썼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 2학년 때, 고등학교 2학년 때를 떠올리면 그렇다.
난 그 때의 훌륭한 선생님들을 내 인생에 덧씌웠다.
내 전공은 국어지만, 학창시절엔 특이하게도 국어 외의 과목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였다. 국어는 무뚝뚝한 아버지 같았다. 결코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잘해도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는 일이 없었다. 나는 점점 국어에 매달렸다.
그리고 책읽기에 매달렸다.
"문 열어요!"
"못 열어, 새끼야!"
"씨발, 빨리 안 열어요!"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 어디서 선생님한테 씨발이아! 이 씨발놈아!"
누가 봐도 개판이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 수록 기도를 하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 제발 똥주를 죽여주세요.
[2]
솔직히 내가 이 길을 택한 건 덜 훌륭한 선생님의 덕택이다. 무슨 길이냐고?
그 길을 말할 것 같으면, 학생들에게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공부따위는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으며, 학생들에게 귀찮으니까 알아서 종례하고 가라고 할 수 있는데다가,
멀쩡한 학생을 기초 수급 대상자로 만들어서 그걸 뺏어 먹을 수도 있고, 그 학생에게
소주를 권하다가 제풀에 화를 내고 냅다 욕을 할 수도 있고, 그건 그 놈의 어머니를
찾아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아빠한테 물어보래서 그런 것이기도 할테지만, 한국은 벌써
다문화 사회인데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 혼자 힘으로 그들을 보살필 수도 있고, 학생들
연애사업에 슬쩍 끼어들 수도 있으며, 잘못된 연애를 하고 있는 학생에게 애정어린
욕지거리로 선도할 수도 있고, 오르지 못할 나무를 포기하는 법도 강의할 수 있는,
어쩌다가 학생에게 옆구리를 맞아 금이 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한 가정을 다시 모을
수도 있는, 선생님이란 길이다.
아우, 길다. 말은 되도록 적게, 말 보다는 행동으로.
..어렵겠지?
아무튼 나는 덜 훌륭한 선생님의 영향으로 이 길을 택했다. 그 밑에서 이건 아니다, 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고 반성했으며, 내가 꼭 이걸 해야겠다, 고 다짐했다.
당시로서는 제법 난이도 있는 생각이었다.
좀 이상한 애다.
혼자 말하고, 혼자 울다가, 혼자 코 풀고, 아 코는 원래 혼자 푸는거지, 혼자 웃는다.
"가자."
"너 참 편하다."
그거야 니가 알아서도 척척척을 했으니까 그렇지. 아무튼 똥주가 경찰서에 있을 때는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그랬다기보다 눈에 보여서 그런 말을 한거다.
"우리 이제 어디 갈래?"
어디가긴.
"나 아르바이트 가야돼. 잘 가라."
"뭐?"
"늦었어. 똥주 때문에."
"기가 막혀. 그래, 잘 가라!"
역시 이상한 애다. 같이 경찰서 가자고 했고, 그래서 같이 갔고, 볼 일은 다 끝났는데
저렇게 버럭 화를 내면서 가버린다.
[3]
좋은 사회란 사람들을 꿈과 현실의 딜레마로 내몰지 않거나, 그중 하나를 선택한 결과가
극단적이지 않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아, 이건 인용문이다. 이 말에 동감한다. 꿈 꾸는대로
현실이 되는 사회란 있을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는 그렇다치면,
꿈과 현실의 괴리가 적은 사회가 좋은 사회일 것이다. 적어도 꿈을 선택했을 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조금 부족하게 살아도 최소한 인간으로서 품위는 지킬 수
있게 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우리는 꿈을 꿨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꿈을 꿨다. 하지만 사회는 꿈 속에 위험한 시한 폭탄이
도사리고 있다고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가난과 실직과 모멸이 기다리고 있어.
그래서 우리는 점점 꿈을 잃어갔다. 꿈이 무의미한 노동이 되었다.
아버지는 춤을 사랑한다. 삼촌이야 아버지에게 배워서 아는 것이 그뿐이라지만. 근데
삼촌이 추는 춤은 제법 멋지고 신이 난다.
"나, 나, 남밍굽니다."
"난닝구요? 어우 이름이 편안하시네."
아버지는 춤이 곧 꿈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 앞에 아버지는 꿈과 무의미한 노동을
맞바꿨다. 그러나 아버지는 꿈을 잃지 않았고 결국 꿈을 이뤄 춤 교습소를 차렸다. 똥주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빌어야겠다. 아,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딴 동네로 이사가셨지.
그 자리에 춤 교습소를 차렸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정윤하, 얘는 왜 지가 매니저를 한다고 그러는거야.
하루이틀이면 그만 둘 줄 알았는데 방학 내내 출석을 찍었다. 이젠 관장님이나 세혁이,
수종이 놈이 더 반긴다. 서울댄지 인 서울댄지를 간다는 애가 이래도 되나?
"완득이, 너도 잘하면 인 서울 하겠다?"
이 눈치 백 단 똥주. 아버지한테 말하면 안되는데
[4]
사막같은 겨울이 깊어간다.
이리의 이빨 같은 잔인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아직 꿈을 껴안은 당신에겐 더욱 긴
사막이 되리라. 행운은 절대 우연으로 얻을 수 없다. 당신은 살아남아야 한다. 삶을 진정
사랑하고, 삶을 사랑할 자격이 있는 당신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모진
시간과 동정없는 세상을 기필코 증언해야 한다.
그 겨울, 정윤하가 부모님을 따돌리고 나의 대회에 오지 못한 날, 아버지가 춤 교습소
원장님으로 등록된 날, 삼촌이 잠시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날, 아들 시합에 안 보내준
다고 어머니가 식당을 그만두고 온 날, 내 인생의 첫 시합에서 TKO 패를 당한 날,
관장님은 떠났다.
하지만 사나이로서 약속한다.
TKO 패는 TKO 패로 갚겠다고.
"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야자 땡 까는 건 좋은데, 내가 복도에서 사라지면 까,
새끼야. 이번에 좋은 거 많이 나왔다. 따라와."
이건 똥주.
-체육관에 도착하면 메세지 남겨
-도착했어?
-너 어디야? 체육관 아니지?
-왜 메세지 안 남겨?
-거기 어떻게 가는 거야?
이건 매니저.
"거기 교습소엔 여자도 많니?"
"대부분 여자 같던데요."
"그래......"
요즘 화장을 하셔서 더 예뻐진 어머니.
"아, 아, 안녕하세요. 저, 저는, 나, 나, 남밍굽니다."
이건 삼촌. 삼촌 이름은 남민구다.
"우리 서로 인정하고 살자. 녀석......다리 긴 것 좀 봐. 근사하게 컸네......"
이건 아버지.
늦은 해가 뜨는 겨울 아침.
폴딱폴딱 뛰면서.
TKO 패는 TKO 패로 똑같이 갚아주는 거다.
원 투 차차차, 쓰리 투 차차차!
"완득아! 완득아, 새끼야! 지랄말고, 어제 호박죽 나왔지! 하나 던져!"
이런, 똥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