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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그런적이 있었다.
시간을 기록한다고 생각했던 순간.
어떤 사람의 살아온 날, 그 숫자만큼의 어떤 말을 적어내려가던 애틋한 기억이 말이다.
꽤 근사한 일이었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도 했고, 생각보다 오래 걸리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꼬박꼬박 쓰는 일이었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비가 오는 날도, 기분이 좋은 날도, 좀 삐진 날도, 화가 난 날도.
나는 항상 그것을 붙잡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쓴다(記)는 건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행여 잘못해서 글씨가 삐뚤어진다거나, 오기(誤記)를 해서 부득이하게 지워야 할 일이 생긴다거나 하면, 으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의 하루를 내가 잘못되게 만든 것은 아닐까.
내가 이때 실수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기에 그때의 너는 아픔을 겪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성의없이 휘갈겨 쓴 어떤 날은 너의 마음도 이리저리 휘갈겨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 최후에 드는 생각은,
예쁘지 못한 내 글씨로 인해 너의 시간이 더욱 아름다워지지 못한 것을 아니었을까, 였다.
우습지만 그랬다.
내가 쓰지 않은 앞으로의 시간이 더욱 빛났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었다.
그럼 그건 나로 인해, 내가 쓰지 않음으로 인해 그런거라고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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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긴 서두에 비하면, 소설은 굉장히 짧은 편이다.
작가는 그 의도를 분명하게, 혹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시간은 돈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읽을 시간이 없으니 글을 쓸 시간은 더더욱 없다. 그러므로 축약한 형태로 쓰는 것이 실용적이다.
이런 뻔뻔한 태도는 흥미롭다.
모험적이지 않은가? 대놓고 독자와 불꽃튀는 대결을 하겠다는 의도를 표출하고 있으니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다.
이야기는 복잡한 플롯 없이 술술 읽힌다. 어라? 단숨에 읽고 나니 겨우 1시간 30분이 지났을뿐이다. 쉽게 읽힌 것에 비하면 남겨진, 그리고 숨겨진 텍스트의 양은 생각보다 방대했다.
내가 쓸데없이 기나긴 서두를 쓴 것을 보면 알만하지 않은가?
사실, 책의 내용 자체는 예측이 가능한 진부한 내용이지만 부분부분 작가내면의 날카로운 담론이 담겨져 있어서 충분히 그 단점을 만회한다. 특히나 사회제도와 경제상황을 압축해 놓은, 그 방대한 분량을 압축해 놓은 장을 보고 아연해 지기도 했다. 정말 그렇구나 싶어서. 우리 사회는 밀물이 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모래성이구나, 란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경제관념, 상황, 특히나 이 소설의 중요한 맥락은 ’시간’ 보다는 ’마케팅’ 인 것 같지만, 작가의 시각에 박수를 보낸다. 어라? 그러고보니 이 작가, 전공도 경영학이다. 마케팅 관련 서적을 출간한 경험도 있다. 하하, 거저 얻어진 통찰은 아닌 모양이다.
지하철에서 읽으면 좋을 책.
왜냐하면 지하철만큼 이 사회를 거대하게 담고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다 읽고나서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자, 당신은 얼마만큼의 시간을 빚지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