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뭉툭해진 연필을 깎는다. 사각사각하는 얇은 공기의 울림만이 퍼지는 도중, 단순한 일은 우리에게 이상한 시간을 가져다 준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과 명상의 어딘가를 배회하는 순간이, 단순함 속엔 있다.
이마에 주름을 잡아가며 연필을 깎다가 갑자기, 불현듯 이 책이 떠올랐다.

이메일을 주고 받는 시대의 IT강국에서 무슨 사서함이고, 우편물이야.
그러나 키보드와 모니터와 마우스가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종이의 냄새. 그런 냄새를 풍기는 제품이 나온다면 모르겠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이름을 지닌 부품들의 집합체는 종이의 냄새를 따라갈 수 없다. 애리와 선우의 관계처럼.

제목부터 라디오와 관련되어 있을거라는 암시를(암시라고 하기에도 뭣한) 적나라하게 풍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서함이란 단어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라디오로부터 이니까.
나는 처음부터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할 요량으로 책을 열었다.
이런 통속적이고 또 통속적인 내용을 어떻게 요리하는 지 두고 보겠다는게 나의 오만불손한 자세였다. 이 책을 읽은 것이 벌써 1년 전이니, 참 어렸다.

내 마음 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이런 소설이 다 거기서 거기지,  내가 근데 왜 이 책을 산거지가 내 안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처음의 태도에 비하면, 우습게도 나는 이 책에서 위로를 받았다.
이상한 말들이 나를 휩싸고 돌았다. 
인사동의 비오는 카페는 나를 완전히 그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우리는 살면서, 알 수 없는 어떤 순간으로부터 완전하게 이해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너무도 그 순간이 완벽하게 느껴져서 더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을 것 같다가, 현실이 지나치게 빨리 자리로 돌아와 우리를 허탈하게 만드는 순간들을, 우리는 살면서 겪는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그런 신기한 순간을 경험하게 해 주는 책이었다.
즐겁고, 유쾌하고, 발랄한 내용만이 아니어서 그럴 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상적인 남녀와 이상적인 친구들, 돌이켜보면 이상적인 가족에...
불가능해요, 라고 단점을 짚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이렇게 변명을 해주고 싶다.
이 책은 그런 매력이 있으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필연적이고, 모든 것이 우리의 통제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 이 삶은 얼마나 많은 우연들로 점철되어 있는지. 세상에는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고, 그것들은 누군가에게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구라는 한 행성에서, 수 십만의 동식물 종이 살고 있는 이 곳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고, 60억이 넘는 사람들 중에서, 수백개의 나라들 중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같은 역사의 시간대에 태어나 같은 세기를 공유하고, 같은 어떤 장소의 같은 시간에 마주친, 거기서부터 시작된 사랑이 어찌 우연이 아닐 수 있을까.
그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에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39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