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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류의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살인과 고문, 폭력 등의 폭파적인 이야기는 자극적인 소재로 흥미를 끌 수 있겠지만, 깊이를 더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보라 작가의 신작 소설이라고 해서 기대는 했으나 매력적인 소재였던 건 아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고통을 없애버릴 수 있는 신약의 개발과 함께 고통이 사라진 세상에서 오히려 고통을 숭배하며 고통을 쫓으려는 교단의 탄생. 고통을 없애려는 제약 회사와 고통을 숭배하는 교단 사이의 관계성, 그에 얽힌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
이 소설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진통제, 간혹 등장하는 SF적 요소 등으로 지금 보다 좀 더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의 삶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지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제약 회사는 고통을 없애는 약을 만들기 위해 그들의 자식을 고통 속에 밀어 넣는다. 어릴 때부터 고통 속에서 길러진 아이들, 결국 고통을 버티다 못해 스스로 죽기를 원하는 아이들이 있다. 교단에 스스로 들어간 어머니와 그의 아이들도 결국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살 길을 찾은 것이었다. 어찌 됐건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건 그 아이들이다.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아이들. 그들은 부모에 의해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 놓여져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들은 각자 '고통'을 겪지만 고통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결국은 각자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동안 고통은 타인이 주입한 가치관, 신념, 생각, 감정 등이었다면 이들은 서로를 만나고 세상을 넓혀가며 스스로의 고통을 스스로 정의하게 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이 소설이 성장소설로 읽혔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고통 받던 아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자 한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던 자들, 스스로 고통을 원했던 시절도 지나 무엇이 고통이고 왜 고통이 필요한지 스스로 깨쳐가게 된다. 그들의 시작은 디스토피아였고, 희망이라고는 조금의 불빛 만큼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처참하게 찢겨지고 부서진 그들의 삶에도 희망의 빛이 생긴다. 나는 이 이야기를 통해 희망의 빛을 보았다.
SF적인 요소, 자극적인 소재, 잔인한 장면들, 폭력적인 사건들은 그저 벌어지는 일이다. 그 안에는 여전히 현실적이고 불안하고 어리고 여린 나와 비슷한 이들이 살아간다. 지금 여기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고통에 대해 생각한다. 고통이란 몸이 있는 존재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존재의 의의와 통하는 연결고리를 가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고통을 느낀다. 그게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고통은 개인의 것이고, 공감은 가능하지만 완전한 공유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고통은 나만이 아는 것이고 그에 대한 자세 또한 나만이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고통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은, 삶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을 떠올렸다. 앞으로도 그들의 삶에는 무한한 고통이 가득할 것이지만, 그들은 끝끝내 살아낼 것이다. 가득한 고통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의 빛을 보며 죽음이 아닌 삶으로 향해갈 것이다. 나는 그들의 삶을 응원하고 싶어졌다.
망가졌더라도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사실, 망가진 채 살아가도 괜찮다는 승인을, 같은 경험을 가진 다른 존재를 통해 재확인하고자 하는 생의 가장 깊은 추동(推動)이었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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