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빠르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의미있게 읽히는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일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리고 나를 이 책으로 이끌었던 문장이 있다.

실패의 글쓰기는 예정돼 있다.

타인은 영원히 타인으로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뭔가를 쓴다.

실패를 감당하겠다는 태도,

거기에 자기 삶의 모든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일은

문학에서 종종 목격된다.


김연수 작가가 <로기완을 만났다>에 쓴 추천사에는 문학이 가지는 의의가 담겨있다.

우리는 왜 실용적이지 않은 소설을 읽는 것인가, 돈도 안 되는 문학 따위 왜 사라지지 않는가,

종이책은 사양 산업 이라는데 어째서 계속 쓰는 사람들이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글이다.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실패한다.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러한 실패에 계속 해서 손을 뻗고,

실패를 반복하며 실패의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왜?

<로기완을 만났다>는 "왜?" 라는 질문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책이다.


방송작가인 '나'는 우연히 보게 된 이니셜L의 인터뷰 속 한 문장에 이끌려 그의 행적을 좇아 벨기에로 떠난다. 왜 L에게 끌리는지, 어째서 벨기에까지 갔는지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L 에서 로, 로에서 로기완이 되는 한 사람의 생을 관통해보려 노력한다.

보통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이야기는 뻔해지기 쉽다.

그러나 <로기완을 만났다>는 다르다.

'나'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 공감했기에, 나의 마음 깊은 곳으로 타인의 고통을 끌고 들어오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벨기에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본 적도 없는 사람의 한 생애를 따라가며 절절하게 아파하고 괴로움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로기완을 만났다>의 연대는 어떠한 방식인가?

어떠한 층위로 구분할 수 있다면, 1차적으로 '나와의 연대' 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로기완의 일기를 바탕으로 로기완의 행적을 좇는다.

북한에서의 삶, 도망친 연길에서의 삶, 어머니의 죽음, 이후의 벨기에에서의 시간.

가늠할 수 있는 건 일기의 문장들이지만, 그가 묵었던 숙소, 걸었던 거리, 방문한 장소들을 전부 따라가며 그의 아픔을 받아들여 본다.

"그의 아픔을 공감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를 붙이기 보다 그저 그렇게 한다. 그게 내가 공감하고 연대하는 방식이다. 그는 로를 좇으며 점점 자신과 대화를 시작한다.


나는 왜 윤주에게서 도망쳤는가,

재이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왜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는가.


본 적도 없는 탈북인의 삶을 헤치면서 스스로의 고통과 마음을 헤아리고, 결국 스스로와 연대를 해나가게 된다.


2차적 연대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연대다.

벨기에에서 로기완이 난민 지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박'

그는 의사였고, 또한 아픔을 가진 인물이다. 사실상 아픔을 가지지 않은 인간이란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박과 나는 '로기완'을 매개로 만난 사이지만, 각자 지닌 아픔 탓에 서로를 조금 더 할퀴게 된다.

그러고는 서서히 서로가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연대의 문을 연다.


한국에는 나의 곁에 재이와 윤주가 있다.

나와 재이는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나는 어떠한 마음 속 이유로 재이를 밀어낸다.

그럼에도 재이는 나를 비난하거나 혹은 저버리지 않는다. 아마 재이의 공감은 그러한 방식일 것이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아프게 살아온 윤주는 나를 가장 아프게 만든 인물이다.

그럴 의도가 없음에도 고통을 안기는 존재.

나의 죄책감과 괴로움, 비굴함과 치졸함, 벨기에로 떠난 이유도 실은 모두 윤주로부터 시작됐다.

결코 손을 잡지 못할 것 같은 인물들이 서로를 향해 조금씩 손을 내밀 때, 우리 마음에는 '희망' 이라는 단어가 생기는 게 아닐까.

그러한 장면을 종이 너머로 읽고 있는 나에게도.


마지막 연대는 로기완과의 연대.

로기완이 그저 한 명의 탈북인이 아니라, 나와는 완전히 다른 하나의 타인이라고 볼 때

내가 로기완을 만나러 가는 여정은 내가 나 아닌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실패의 여정이라 볼 수 있다.

로기완은 우리가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을 견뎌왔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세계에서,

어머니의 시신이라도 팔아 도망쳐야 하는 세계에서,

맞아도 울지 않고 견뎌야 하는 세계에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껴져도 살아야 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 없겠지만, 그려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려내야만 한다.

지금 어딘가에도 수 없이 많은 로기완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을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공감하며 연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기에 이것은 반드시 예정된 실패다.

나도 로기완을 만나러 갔지만,

그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실패에 몸을 던지는 이유는 뭘까?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나 혼자만 잘 사는 것,

어떤 인생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

나와 다른 타인은 배척하는 것,


이러한 이기심은 결국 나를 잘 살게 만들까?

가만 생각해보면 아니라는 답이 나올 것이다.

세상은 절대 혼자 살아갈 수 없고, 혼자 살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실패를 반복해도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은 아닐까.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나 아닌 다른 이를 향한 공감과 이해의 노력이 곧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로기완은 조용히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끝끝내 살아냈다.

그게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었고,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사랑이었고,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었고, 자신과 같으면서도 다른 타인을 향한 사랑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유일한 방법이 결국 내가 굳건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면,

죽을만큼 괴로워도 끝끝내 살아가는 것이라면, 죽겠다는 마음으로 살아 내보는 것도 연대의 방식이 될 것이다.


출,퇴근 길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었다.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읽기 적합한 책은 아니었다.

매 문장이 나를 때리고, 울컥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책을 덮을 때,

내 마음속에는 작은 씨앗이 심겨진 것 같다.

물과 비료를 제 때 주지 못해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모양을 가진 무엇으로 자랄 것이다. 그게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이 되는 상상을 하며 살며시 미소를 띄워보는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