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인생 질문 - 예수를 만나야만 알 수 있는 진리!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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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불신앙, 죄악, 예수님의 구원, 승천, 성령의 오심까지 기독교의 주요한 부분들을 성경말씀과 함께 여러 인용문과 예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나는 각 장마다 다가왔던 부분들을 인용하고, 관련된 경험이 있었거나, 묵상되어지는 부분들을 다루어보려고 한다.

part 1 예수와의 조우, 인생의 답을 얻다

1. 회의론자 : 나다나엘 "기독교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

1장에서는 나다나엘이 나오는 본문을 통하여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해 회의감'을 가진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다나엘을 알아보셨을때 주님을 다시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이야기하며,

우리도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으로 비하하며 '어떻게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야기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그렇게 기독교에 회의를 가질 때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가치들 또한 반문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이 책을 통틀어 개개인을 세세하게 알고 계시며, 맞는 방법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을 다시 본다.

당시 예루살렘 출신은 모두 다 갈릴리 출신을 우습게 보았다. 이런 태도는 인류의 본성이다. 어떤 동네는 늘 다른 동네를 ‘후진 동네’라고 멸시한다.

그러면 멸시당한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도 멸시할 다른 대상을 물색한다. 이러한 일들은 끝없이 반복된다. 심지어 나다나엘은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 갈릴리 출신이었다. 그런 그도 나사렛 같은 곳은 함부로 여겨도 된다고 여겼다. 나사렛은 갈릴리 중에서도 더 낙후된 시골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31-32

= 인류의 본성.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던 그 때부터 사람에게 있는 악한 마음-죄성-을 지금도 마주할 때가 많다.

책임을 지지 않고 상대방에게 떠넘기려 하는 것. 같이 짐을 지지 않으려하는 것이 내가 사람들에게서 자주 발견하는 죄성이다.

본문에서는 멸시할 대상을 찾는 것, 더 못한 상대를 찾는 것. 찾아 비난하고 멸시하는 것을 인류의 본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 같은 지역에서 모이게 되는 초, 중, 고등학교와는 달리 전국에서 입학하게 되는 대학교를 진학했을 때 친구들끼리 지역감정이 일어났었다.

일부 장난처럼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본인의 지역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며, ‘너희는 재밌는 것, 특산품, 유명한 장소 뭐가 있냐’고 묻고는 했다.

그 때는 철없이 한 이야기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죄성이었구나하고 지금 본문을 보니 다시 생각되어진다.

하나님 앞에 모두가 동등한 죄인이며, 내세울 것이라고는 하나님이 주신 건강, 하나님이 주신 물질인데 그것을 비교하며 살아가는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를 나사렛 출신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당신이나 당신의 지인이 기독교에 대해 ‘나사렛’과 같이 본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첫째, 멸시는 언제나 해롭다. 모든 창의성과 문제 해결을 완전히 말살하며, 관계의 깨어지고 어그러짐을 준다.

구체적인 예로, 만약 우리가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열쇠가 ‘있을 만한’곳부터 살피게 된다.

그래도 없으면 열쇠가 ‘있을 리 없는’곳을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잃어버린 열쇠는 후자에 있기 마련이다.

요컨대 특정한 개념이나 사람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보다 좋은 관계에 더 해로운 일이 없다.

또 다른 문제는 보다 더 본질적이다. 당신은 기독교를 멸시함으로써 자신의 많은 핵심 가치관의 살아 있는 원뿌리를 잘라낸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33

= 기독교를 여러 가지 이유로 비난하며, 경계하는 자들이 범하는 오류.

사람들은 본인의 살아온 세상, 연륜에 대한 결정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다른 생각들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나에게도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 나도 오류가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오류가 없다는 고집을.. 그만부리세요. 특별히 어른들.

완강한 고집을 가진 어른이 되지 않도록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아래 깨어지며, 혼나는 사람이 되도록.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하나님이 두드리고 구부려 쓰시기에 합당한 도구가 되도록 유연해져야겠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늘 사람을 택하여 쓰실 때 동기간 중 어린 쪽을 택하셨다.

가인 대신 아벨을, 이스마엘 대신 이삭을, 에서 대신 야곱을, 열한 명의 형들을 대신해 요셉을 택하셨다.

매번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예상하고 상을 베푸는 대상인 장자를 택하지 않으셨다.

비유적으로 본다면 그분은 예루살렘 출신이 아닌 늘 나사렛 출신을 택하신 것이다! p.35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통해 일하실 때마다 자녀를 낳지 못하는 사람을 택하시고, 그들의 태를 여신다.

세상이 보기에 축복받고 사랑받는 여자보다 멸시받는 여자를 택하신 것이다. p.36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 그리스도의 피, 몸의 부활 등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혼잣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 있어 그런 부분- 부담스러운 초자연적인 부분-은 곁가지가 아니라 중심이다. p.36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나 사상 체계와 구별되는 차이점의 정수는 바로 복음이다.

다른 모든 종교는 신을 발견하고 자아를 발전시키고 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중략)

그러나 기독교는 이와는 정반대로 말한다. 기독교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셨다고 말한다.

또 타종교와 철학은 중요한 의문들의 답을 찾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이 그 모든 것의 답이라고 말한다. p.37

모든 사람, 특히 정말 중요한 부분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다시 말해, 특별한 힘의 도움으로 다음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의 결함이 피상적이지 않고, 마음이 깊이 병들어 있으며, 자기 힘으로는 그 무엇도, 특별히 자기 자신조차도 고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구주가 필요함을, 즉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볼 줄 아는 이들의 것이다. p.38

팀켈러의 인생질문 p.35,36,38

= 하나님이 필요함을 아는 자들은 세상에서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연약함을 가진 사람일 수 밖에 없다.

돈이 없거나, 집이 없거나, 건강을 잃었거나, 가족을 잃은 자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와 교회가 이들을 어떻게 도와줘야 하나.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기독교, 교회는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잘 흔들려 쓰러지는 자들이 의지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심신미약자들이 모인 곳...찌질이들이 모인 곳..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셨고, 병든자의 하나님이셨고, 멸시 받고, 소외된 자들의 하나님이셨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 가운데 놓여있는 자들은 영적인 갈급함이라고 생각하지 못할지라도 무엇엔가 갈급함, 절박함, 급급함을 느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람들에게 너희가 부요한 줄 알지만, 너넨 영적으로 가난하다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들은 물질이 많아 갈급함이 없을 것 같지만 그들도 헛헛함을 느낀다.

영적으로 갈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요한 자들은 영적인 갈급함을 부로 채우려는 노력을 하지만 가려질리 만무하다.

모든 갈급함은 영적인 갈급함의 해결을 통해 해결된다. 가난한 자나 부요한 자나 하나님이 다 필요하다.

나다나엘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면은 ‘교만’과 ‘멸시’의 문제다. 그러나 그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영적 욕구가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던 그가 불과 몇 분 만에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다.

예수께서 그분의 정체에 대해 믿을 만한 증거를 조금 내보이시자 나다나엘은 즉각 충성의 대상을 바꾼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39

= 겉은 교만과 멸시로 코팅되어있지만 속에는 영적인 것에 대한 갈급함과 욕망을 가진 나다나엘처럼.

내가 만나는 영혼들, 어린 영혼이든. 어른이든.

겉으로는 강한, 혹은 약한 모습으로 코팅되어 있지만. 그 속엔 모두 하나님을 바라며, 진리와 복음을 갈망하는 모습을 본다.

청소년 아이들을 만나며 강한 모습으로 코팅되어 있는 모습을 자주 본다.

아무도 날 건드릴 수 없다는냥

욕과 거친 말, 거친 행동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속은 그렇지 않은 게 보이는 데, 어이 없고 왜저러나 싶은데 짠하기도 하다.

또, 교회에 종종 찾아오는 노숙인들은 약한 모습으로 코팅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

사람이기를 내려놓고 낮아져있어

원하는 것을 구하는 모습을 본다.

두 모습 다 복음을 전하기에 너무 좋은 타이밍인데

이제 사역 1년차는 어림도 없다. 깨갱..

성령님이 알려주셔서 때를 찾고, 때에 맞는, 사람에 맞는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민감함 가지기를 기도한다.

현 시대의 학생들은 각기 다른 굵직한 인생 문제들로 씨름한다. 그중 다수는 일류 학교와 유명 서적에서 얻은 답에 만족하지 못하여 나다나엘처럼 예수를 조용히 탐색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없는 한 오든은 내 감정이나 내 생각이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보다 정당하다고 말할 권리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가치는 가공의 산물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그게 가공의 산물이 아니라고 –인종 학살이 정말 절대 악이라고 – 확신했기에 그는 하나님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깨달았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41,43

그분은 우리를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시면서도 온유하게 대하신다.

나다나엘은 나의 모습을 아시면서도 좋게 봐주시는 예수님께 마음을 열었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45

2.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기득층과 소외층이 있는 현 세상, 뭐가 잘못된 거 아닌가“

2장에서는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갈급한 마음을 아시고,

사마리아 여인이 빈 마음을 채우려했던 남편을 이야기하시며 속에서 영생하여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주신다고 이야기하신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우리의 마음을 채우려하는 것을 직면하여 다루시며, 주님 앞으로 나아오게 하신다.

바탕에 나는 죄인이 아니라는 의미가 깔려 있다면 아예 대화 상대조차 될 수 없다.

이는 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죄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면 훨씬 근본적이고 광범위하다. 그 단어를 기독교인은 결코 무기로 쓸 수 없다.

그렇게 사용하는 본인에게도 부메랑처럼 돌아오기 때문이다. 성경대로면 아무도 죄인이라는 판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게 바로 이 두 이야기의 요지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53

완전히 소외된 외부인인 사마리아 여인은 대낮에 혼자 물을 뜨기 위해 우물가로 나왔다. 예수님이 말을 거셨다는 것은 모든 장벽을 일부러 뛰어넘은 것이었다.

예수님은 마음을 열고 그녀를 따듯이 대하면서도 잘못을 지적하신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56

= 진리에 관련한 문제에서는 돌같이 굽힘이 없으시고 사랑의 위로의 문제에서는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제목? 이름?을 지어보라는 대학교 조별 과제에서 우리 조는 예수님을 '미꾸라지' 같다고 표현했었다.

그 때는 획기적인 표현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예수님을 다 닮지 못하는 표현이다.

좋은 표현을 생각해도 나오지 않는다.

앞서 나다나엘의 본문에서도 보았듯이

예수님은 나다나엘, 사마리아 여인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

다 알고 계심에도 잘 봐주시기도 하고,

직면하게 하시기도 하신다. -예수님 아닌 다른 것들(남편)로 채우려했던 연약함

따듯하게 대하면서도 잘못을 이야기하시는 모습,

강직하게 다가가시면서도 눈물을 흘려야 할 때는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까.

현명하시면서도,

'그게 일부러 그래야 되.'라고 주문해서 나온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마음이니.

진짜 진리를 닮은 분이 아니라 참 진리 자체이신 분이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고민하며

내 본성에서 나오는 행동과 말을 짓누르고

예수님을 닮아야겠다는 크고 강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생수는 영생을 가리킨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 곧 생수가 필요한 목마름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다.

현재 우리는 어디서나 쉽게 음료수를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진짜 갈증에 대해 잘 모른다.

무엇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는가? 무엇으로 삶의 만족을 얻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 당신은 거의 외부 조건을 생각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 연애, 직업, 정치, 대의명분에 희망을 둔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떤 외부 조건도 내면의 깊은 갈증을 채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생수의 의미를 좀더 생각해보자면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얼굴에 끼얹을 물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줄 물일 것이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56,57

= 목마름이 있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감사이다.

목마름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알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문이 말하듯이 음료수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라 그런가보다.

달기도 하고, 입에 맛있는, 목을 축일 수 있는, 시원하고 톡 쏘는 음료수가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

그런데, 음료수는 갈증을 잠시 해소해주지만 영원한 갈망은 해소할 수 없다.

입이 단 음료수는 우리를 더 갈급하도록, 물을 찾도록 만들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수가 음료수에 비해 많은 매력이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생수는 갈증을 해소해주며, 비유를 들어 말하신 것은 영생. 영원한 생명이다.

찾아 헤매 잠시잠깐 목축이고 더 목말라지는 음료수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영생수를 주시겠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밥을 주식으로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아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밥상에서 오히려 매력있는 것은 특별한 간식이나 반찬일 수 있다.

그러나 흰 쌀밥을 질림없이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아무 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수가 매력없어보이며, 음료수에 비해 맛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밥을 계속 먹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생수를 필요로한다.

더욱이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라는 생수를. 우리도 얻어야 하며 전해야한다.

먼저 우리는 대부분 영혼의 갈증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내면의 공허와 불안을 각각 ‘의욕’과 ‘희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갈증이 실제로 얼마나 깊은지를 모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만족이 없는 이유를

그저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평생 자신의 깊은 영적 갈증을 인정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그 분 이외의 모든 것이 실망을 안겨 준다고 단언하신다. 예수님 외의 모든 것이 당신을 노예로 삼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 손에 없다면 내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이 사라질까 봐 극도로 두려워하고 누구에게 방해받으면 쉽게 분노한다.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면 결코 자신을 용서 할 수 없다. 하지만 막상 성취해도 그것은 당신이 기대하던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갈증을 망각하는 이유는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꿈이 이루어지면 예수님을 그냥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이 우물가의 여인에게는 그런 환상이 없었다.

그래서 여인은 즉시 예수님께 ”그 생수가 무엇이니이까. 내게 주시겠나이까“라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라며 말머리를 돌리신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58,59,61

= 우리에게 있는 갈망은 근본적인, 영적인 것들이 공급되지 않아서 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본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만족이 없는 이유가 아직 목표를 이루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맞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것이든 성취한다하더라도 깊은 만족과 깊은 평안과 깊은 사랑은 없다.

얼마나 괴로운 삶인가. 노력하는데 어딘가 허전한 삶.

예수님 없는 삶은

끝없는 공허와 혼돈과 불안과 흑암 속에

'아직 꿈을 이루지 못했을 뿐이야'하는 희망과 의욕으로 바꾸어 그들만의 물레방아를 돌리는 삶이다.

쳇바퀴 도는 삶이다. 불쌍하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제까지 자신의 삶의 공허를 다른 것으로 채우려하였지만

생수를 주신다고 이야기하시는 예수님께 바로 그 생수를 달라고 대답한다.

필요한 것을 바로 구한다.

갈급함을 바로 알고 돌아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부럽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다.

아직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우리 가족들과 친구들이 갈급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영생을 달라고, 평안을 달라고 구하기를 소망한다.

답은 화제가 바뀐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주는 생수의 본질을 알려면 먼저 네가 그동안 그것을 어떻게 얻으려 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너는 그것을 남자들에게서 얻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자에 대한 욕구가 너를 산 채로 삼키고 있다면 앞으로도 늘 똑같을 것이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61

= 예수님은 생수를 달라고 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이야기하신다.

화제가 바뀐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의지하고 채우려했던 것을 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돌이키라 하신다.

몰두하고 있는 것에서 돌아오라고 하신다.

내가 채워지지 않아 끝없이 갈망했고 몰두했던 중독의 실체를 직면하는 것이 어렵지만.

죄를 마주하는 것이 어렵고,

끊어지지 않는 죄의 굴레를 뿌리치고 나오는 것이 힘들지만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꼭 해야하는 작업이다.

직면은 해야하는 작업이지만 직면에는 염려가 서린다.

죄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데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다. 마치 자신의 구주와 주님인 양 하나님 자리에 서는 것이다.

당신의 착한 삶과 도덕적 공로 때문에 하나님이 복 주시고 당신의 기도대로 응답하셔야만 한다는 식의 행세가 그렇다.

종교인들은 늘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만일 자신의 선이 구원에 조금이라도 기여한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구원자가 된다. 철저히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67


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의 모든 것은 신에게서 왔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당신은 훌륭한 도덕 생활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릴 의무가 있다.

그분은 마땅히 당신 삶의 중심이 되셔야 한다.

직업이나 배우자나 돈이나 도덕성 위에 삶을 세운다면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당신에게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

그런데 그분은 왜 목마르셨을까?

천지를 지으신 성자 하나님이 영광을 버리고 피곤하고 목마를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 몫의 형벌을 당하시느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잃으셨다. 생수의 근원이신 아버지로부터 단절되셨다.

그분이 맛보신 궁극의 영원한 갈증이 고통과 죽음을 불러왔고, 탈수로 인한 최악의 사망은 그 갈증의 징후에 불과했다. 이는 신기한 역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주의 갈증을 겪으셨기 때문에 당신과 나의 영적 갈증이 채워질 수 있다. 그분이 죽으셨기에 우리는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은 그 일을 즐거이 하셨다.

p.69,71

=성육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이 느끼는 배고픔, 목마름, 갈급함, 고통을 느끼셨다.

세상에 내려오시고 한 명, 한 명의 삶 가운데까지 낮아지셔서

우리와 눈 맞춰주시며

발 맞춰주신다.

나는 그 사랑을 닮기도 어렵다.

닮지 못함에 어려운 마음이지만 신이신 분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닮아가려고 노력할 뿐.

사역을 감당할수록 낮은 자들의 마음과 함께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함께하려고 잠시잠깐 마음 같이할 때에

주님의 사랑 그 크심을 깨닫는다. 잡히지 않는 그 크기, 깊이, 넓이, 높이 가운데 잠겨버린다.

3. 슬퍼하는 자매들: 마르다와 마리아 "신이신 예수가 인간의 슬픔을 알겠는가"

3장에서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사로가 죽게 되었을 때의 장면이 나오며

예수님께서 죽음에 같이 슬퍼하시는 신이지만 인간적인 모습을 이야기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과 아픔, 고통을 가져가시며

본인이 슬퍼하시고, 아파하시고, 고통받으시고, 죽기까지 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세상의 지혜의 보고를 보충해 주는 고작 또 하나의 종교 스승으로 볼 수는 없다. 그분은 고의적인 사기꾼이었거나 제정신이 아니었거나 정말 신이거나 셋 중 하나이다. 던컨은 이를 삼자택일의 궁지, 즉 트릴레마(trilemma)라 칭했다.

이어 예수님은 모종의 철저한 반응을 요구하신다.

당신은 그분을 악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정신병자라며 피할 수도 있고, 하나님으로 경배하며 엎드릴 수도 있다.

p.84

=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획일적으로 만드지 않으시고 반응할, 대답할 여지를 주셨다.

그래서 불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자들도 많다.

추석을 보내며 예배 자체를 쉴 수는 없기에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예배는 항상 있는데, 자유롭게 하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5분의 1이 참석하였다.

마음이 씁슬했지만 하나님도 우리에게 주신 선택권을 생각하며

더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 생각 같아서는 정말 신이라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것 같은데 그분은 그러신다.

인간의 연약한 모습이 신성과 공존한다. 그분은 사랑하기에 우신다.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 즉 하나님이라고 – 주장하셨으면서도 마리아에게 감정을 표출하신 것은 신이면서 동시에 온전히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죽음의 끔찍한 위력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우리의 슬픔을 주님도 느끼신다.

진리의 사역, 눈물의 사역

그 순간 그녀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애통이었다. 인간이시기에 주님은 온전히 진실하고 정직하게 그녀의 슬픔 속에 들어가 함께 우셨다.

솔직히 누구나 때에 따라 진리의 사역과 눈물의 사역이 필요하다.

어떤 때는 당신에게 냉엄한 진리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때는 정말 그냥 함께 울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항상 상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줄 만큼 기질이나 인내심이나 통찰력을 다 갖춘 사람은 인간 중에 아무도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드러워야 할 때 강하시거나 강해야 할 때 부드러우신 적이 없다.

그분은 진리 자체이시며 인간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다.

p.84,85

= 아멘.

진리의 사역과 눈물의 사역에 공감한다. 어떤 시기에 어떤 사역을 해야할지 아직 1년차는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 먹먹해지며 들어줄 때와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진리를 제시해야하는데...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직은 성격상 말하기보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하나님은 신이기에 어떤 말을 해야할 때를 아셨다.

그래서 효과적으로 일하셨다.

하나님 말해야할 때, 들어야 할 때를 알게 해주세요.

예수님은 온유하되 약하지 않으시고, 강하되 모질지 않으시며, 겸손하되 조금도 자신감이 부족하지 않으시다. 부동의 권위를 가지셨지만 전혀 자신에게 함몰되지 않으시고, 거룩하며 초지일관하시지만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다.

p.86

그분은 ”죽음에 익숙해지라. 누구나 다 죽는 게 세상 이치는 체념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간 최대의 악몽- 생명과 사랑하는 이들과 사랑의 상실 –을 똑바로 쳐다보며 분개하신다.

악과 고난에 노하시고, 하나님이신 자신에게는 노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우선 악과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아니라 죄의 결과라는 뜻이다. 처음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상은 질병과 고난과 죽음으로 가득한 곳이 아니었다.

우리도 알고 있듯이 세상이 잘못되 이유는 다분히 인간의 심령 때문이다.

이생의 불행은 다분히 우리의 이기심, 교만, 잔인함, 분노, 압제, 전쟁, 폭력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노의 검을 들고 이 땅에 오셔서 악을 처단하셔야 한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손에 들린 것은 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의 손에는 못이 들려 있었다.

그분은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을 당하셨다.

p.88-89

=사역을 시작하지 1년되어 많은 생사고락을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애사에 함께할 일이 있었다.

교육전도사라 의무는 아니었지만 함께하기 위해 찾은 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라는 생각이 더 깊어졌었다.

하나님은 죽음 앞에 분개하신다.

악 앞에 고난 앞에 화를 내신다.

더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을 위기에 있는 자들을

빨리 건지시며,

하나님 곁에 가는 자를 평안케하심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더 천국이 있음을 굳게 다지며 살아간다.

4. 혼인잔치: 예수의 어머니 "답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진짜 답인가"

4장에서는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해도 닮지 못한다는 사실이 위로로 다가왔다.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과 같지 못해서 닮지 못해서 아프고, 낙망하는 마음들이 조금 내려놓아졌으면 좋겠다.


시편 34편에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8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이미 알지 알았던가? 물론 그렇다.

그런데 다윗은 그들에게 "맛보"라고 권한다. 아무리 옳은 명제일지라도 지적 동의를 넘어서라는 것이다.

즉, "물론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안다. 하지만 나는 너희가 그것을 맛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깊이 경험해보라는 것이다.

팀켈러의 인생질문, p.98

= 2017년 말,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이말씀에 부딪혔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워주셨지만,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당당이 이야기했다 또 3번 부인한 베드로.

그리고 다시 따듯함으로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시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에게 레마로 다가오면서.

도마처럼, 베드로처럼, 예수님과 함께하지만 예수님의 행적, 뜻을 다 알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나도 하나님을 멀리서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바다를 쳐다보기만 할 뿐, 바다에 뛰어든 느낌은 아니었다.

소금을 쳐다볼 뿐, 맛을 보지 않은 상태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말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말씀이 있는 것을 보게 되면서

나는 예수님을 그냥 아는 것이지, 많이 들어와서 아는 것이지

맛보아서, 예수님의 삶에 동참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발버둥쳐서 그 결과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러 과정을 통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반문하며 나아가야겠다.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는가?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내 경험으로 지금도 주님을 만나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씻어야 할 얼룩과 죄책과 수치가 있어 구원이 필요함을 알아야 한다. 아무 문제도 없다고 속아서는 안된다.

분명 당신은 자신에게 정말 문제가 있음을 마음 깊이 안다.

왜 늘 과도하게 열심히 사는가?

왜 매사에 당신이 옳아야만 하는가?

왜 겉모습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정화하고 입증하고 은폐하려 애를 쓰는 것이다...(중략)

모든 사람과 심지어 이미 당신 곁을 떠난 이들에게까지 입증하기 위해서다.

p.102,103

= 이유와 조건 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를 해야만 사랑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쁘게 살고, 하루를 가득가득 채우며 여유없이 혹사시키며 살아간다.

하나님은 우리가 뭘해야,

무슨 직업을 가져야,

돈이 많아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굳게 믿거니와 우리는 자신이 깨끗해져야 함을 안다. 죄의 개념을 몹시 불편해하는 이들조차도 마찬가지다.

대놓고 말하자니 거북하지만 우리 안에는 이기심과 죄가 스스로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많다.

당신 안에도 신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부인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다.

p.104


그분은 주로 좋은 모델이 되려고 오신 게 아니다.

얼마나 다행인가! 왜 다행인지 아는가?

그분이 너무 선하시기 때문이다.

그토록 완전하신 분이 모델이라면 당신은 완전히 실의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다.

정말 진지하게 그분을 삶의 모델로 삼아 그 성품과 실천에 세세히 주목한다면 누구라도 절망할 수 밖에 없다. 그분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월하시다.

당신을 그분께 비교하면 도덕적으로 훌륭해지려던 진정한 열망이 절망으로 부서질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력 구원의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 친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죽기 위해 오셨다.

p.111

= 우리 스스로를 죄에서 구할 수 없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지만 닮을 수는 없다.

그분은 신이자 인간이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우리 마음까지 아시는 세세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법 가운데 있는 우리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건져내시는 예수님을 찬양한다.

하지만 용서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직접 전등을 새로 사거나 아니면 전등 없이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둘 중 어느 쪽이든 반드시 값을 치른다. 빚은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 항상 누군가가 갚아야 한다.

p.113

5. 최초의 그리스도인: 막달라 마리아 "정말 부활이 가능한가"

바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믿음은 누구에게서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미 예수님은 이 사건과 거기에 담긴 의미를 몇 년 동안 충분히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마리아는 빈 무덤을 뻔히 눈앞에 두고도 이를 "볼"수 없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마리아와 요한과 베드로는 왜 밤낮없이 무덤 앞에 진을 치지 않았을까?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라는 예수님의 거듭된 말씀도 그렇지만, 그 숱한 반복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사흘째 날에 무덤 주위에서 간절히 기다리지 않은 일 또한 1세기의 문화와 역사를 모르면 의아해 보일 수 있다.

스승께 뜨겁게 헌신되어 있던 막달라 마리아도 빈 무덤을 보고는 부활의 가능성을 생각하지도 못한 채 급히 떠났다. 왜 그들은 기적을 고대하지 않았을까? 그분의 기적을 볼 만큼 보았으니 이번에 큰 기적을 하나 더 행하시리라고 기대할 만도 하지 않은가?

... 이 모든 요인을 종합하면 1세기의 유대인에게 왜 예수님의 부활이 상상할 수도 없는 개념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분의 잦은 예고에도 불구하고 부활은 그들에게 이게 너무 터무니 없는 일이라서 믿기는 고사하고 바랄 수 조차 없었다.

정말 살아계신 예수님을 확신하기까지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체험이 여러 번 필요했다. 우리도 그들과 같다.

p.127-129

= 성경을 보며 예수님과 함께하지만 함께하지 못하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며 답답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ㅎㅎ

이 책에서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이 때보다,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할 때보다

성령님을 보여주신 지금이 더 성령님과 긴밀하게.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분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말을 보고 은혜가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천하시며,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part 2 당신의 구주 예수를 만나라

6. 궁극의 적 : 사탄과 맞서심 "요즘 세상에 사탄의 존재는 너무 터무니 없지 않는가"

6장에서는 마태복음 3,4장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며

사탄의 존재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특별히 사탄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확언한 후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즉각 하나님에 대한 자녀됨을 잃게 하려한다. p.159

우리가 사탄과의 싸움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는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되새기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시고 사탄의 공격을 받은 분이기 때문에

영적 전투 , 전쟁가운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다.

참된 기독교는 싸움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 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어떤 '싸움'도 없다. 그들은 영적 분투, 노력, 갈등, 자기부인, 깨어 있음, 긴장 같은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p.166

=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요

세상의 주관자들과의 싸움이다.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성령의 검을 가진 영적 전쟁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항상 평안하게 살아감은 주위를 잘 둘러보지 않을 수 있는 것일 수 있다.

기도해야 할 곳, 영적 전쟁이 일어나야 할 곳이 우리 주위에 아주 많다.

우리는 기도의 손을 내리면

전쟁가운데 물러나면 죽는 것처럼.

모든 힘을 소멸하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7. 두 분의 대언자 : 성령을 보내심 "교양 있고 괜찮은 사람인 나에게 굳이 대언자가 필요한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죄를 위해 죽으실 것을 거듭 가르쳤는데도 그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예수님의 마음과 목적을 제자들이 더 몰랐다.

어딘가에 정의의 법정이 있다. 우리가 서게 될 법정은 우주적이고 또 신적인 곳이다. 우리는 다 심판대 앞에 서있다.

신의 심판이 존재한다면 이는 우리에게 나중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의 문제다. 우리는 거기에 '자존감 부족'이나 '수치심과 죄책감'같은 이름을 붙여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p.181

=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진리의 법정,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한다.

구원의 문제는 우리를 넘어섰는지는 몰라도

심판의 문제가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일 때가 너무 많다.

파트타임이라는 자체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오로지 헌신하는 느낌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었지만

아직 모든 것을 다 쏟기에는 어려운 마음 또한 있었다.

그게 참 부끄러웠고, 죄송했고, 슬펐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심판대에서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신앙과 삶을 잘 지켜나가야겠다.

그분이 아버지 앞에 나를 대변하신다는 개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보좌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분이 연상되었다. "평안하신지요, 아버지. 내 의뢰인 팀 켈러를 대변합니다. 솔직히 이번 주에는 아주 형편없군요. 그는 아버지께 한 약속을 서너 가지 어겼고, 아버지의 율법을 알고 인정하면서도 몇 가지를 위반했으며, 한 주간 죄도 많이 지었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나를 봐서라도 좀 봐 주시면 안 될까요?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내 상상 속의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러자 역시 상상 속의 아버지께서 "그래, 좋다. 너를 생각해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노라"고 대답하셨다.

변호사에게 필요한 것은 궤변이나 감정 조종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논거다. 바로 그게 예수님께 있다.

p.184

8. 순종하시는 주님 : 십자가에 죽으심 " 왜 신이 죽어야만 했는가"

예수님이 죽음 앞에서 아파하셨던 이유는 육체적 고난이나,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과 연결이 단절되는 것에서 오는 아픔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본이 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구주로 오셨다. 그분은 우리 내면을 변화시켜 느리지만 확실히 자신을 닮아가게 하신다.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갈 능력까지 주신다.

9. 아버지의 오른편 : 승천의 의미 "승천하지 말고 우리 곁에 계속 계시면 안 되었는가"

10,마리아의 용기 : 미리 만나지 못해도 순종함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따르는 대가가 필요한가"


* 마무리.

이 책을 '기독교와 예수님에 대한 질문을 가진 자들'과

'부활, 승천, 성령, 죄악, 사탄과 같은 주제들을 더 심도있게 들여다보고 싶은 자들',

'예수님의 사랑에 더 깊에 빠지고 싶은 자들'에게 추천한다.

책의 뒷 부분까지 다 읽기는 했지만 내용은 없는 것은

매 장 다른 주제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말씀들이 동일했기 때문이다.

나의 짐을 대신 지신 어린양 예수님.

한 사람을 세세하게 아시며, 그에게 맞는 방법과 대화로 다가오시는 예수님.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리고, 동행하는 성령님을 보내주신 예수님.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책이구나' 싶었지만

지금 보니 더 깊고, 진한 내용들이 책에 담겨있었다.

다시 복음, 다시 진리로 채워지는 경험을 한다.

한 글자, 한 글자 가볍지 않고 무겁게 읽혀지는 문장들이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게했고,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했다.

양자로 입양시켜주신 그 사랑이 너무너무 감사하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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