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지 못할 이야기 - 혁신계 정치인 하태환의 옥중록
하태환 지음 / 새봄출판사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우지 못(할) 이야기, 지우지 못(한) 이야기

 

 

 

 

 

 

 

 

 

2013년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올해도 갖게 된다. 작년과 똑같은 추위를 지닌 겨울이 돌아왔다. 올해 봄, 애인에게 선물 받았던 가죽장갑을 장롱 깊숙이 넣으면서 다시는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서 받은 그 장갑을 끼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손이 무척 시린 겨울이 오고야 말았다. 그래서인지 얼굴에 잔주름을 간직한 사람들은 시간에 무감각해진 모습이다. 불타버렸던 숭례문이 복구되는 것을 보니 그래도 시간은 가는 모양이다.

시간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올여름 뉴스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련의 사건들에도 크게 관심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뉴스에서는 “내란음모”라는 무시무시한 사건을 연일 보도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일들에 쉽게 흥분하거나 열을 올리지 않았다. 어쩌면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치공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우리의 식사 자리에 반찬으로 올려놓기를 꺼려하곤 했다. 경제가 좋지 않았다. 그 사건의 내용이 사실이든,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든,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 밖이었다. 자신의 정치성향이 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우리와 같은 일반 시민들에게 달라질 것이라곤 없었다.

그러는 사이, 신문 지면의 잘 보이지 않은 구석자리에는 “40여년만의 무죄”와 같은 별 의미 없는 기사들이 자리하곤 했다. 그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오랜 투쟁의 소식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일 뿐이었다. 얼마 전에는 ‘1차 인혁당 사건 48년 만에 무죄’라는 기사가 흘러나왔지만, 그 기사에 관심 갖는 사람은 아마도 없었다.

 

 

 

 

2007년

1990년대 말.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며 대통령 직속기구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해 과장,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형판결이 내려지고 18시간도 채 안되어 사형을 집행했으며, 사형선고장이 도착하기도 전에 집행이 이루어졌다는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2007년, 서울지법은 ‘인혁당 사건’에 무죄를 선고했다.

 

 

 

 

1975년

다방에서 한가롭게 차를 마시던 사람들이 ‘정부전복’을 모의했다며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극 드라마에서 곧잘 나오곤 하는 ‘인혁당 사건’의 시작이었다. 재판과정에서부터 사형이 이루어지기까지 미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결국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게 된다. 인혁당 사건의 희생자로 알려진 이수병은 사형장으로 들어서면서도 “나는 인혁당을 알지도 못한다. 가족이 보고싶다.”(「전창일씨 부인 임인영씨가 작성한 호소문」- 블로그에서 퍼옴)는 말을 했다고 한다.

 

 

 

 

1970년

사실, 이수병은 경희대 재학시절 ‘민통련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7년간 복역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5.16 쿠데타가 일어났던 직후 구속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혁신계’로 분류되던 이수병과 같은 정치범들은 교도소 내에서 함께 의지하며 7년간의 고난을 견뎌냈을 것이다. 1961년 구속되어 1968년 이수병과 함께 출소했던 하태환은 그리고 그에게 원고뭉치를 하나 건넸을 것이다. 그것은 ‘국어의 맞춤법에 능통할 정도로 다방면에서 박식하기도’(402쪽) 했던 이수병으로 하여금 책 원고의 감수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감리교신학교를 나와 교편생활을 하던, 자신보다 서너 살 연배인 하태환의 부탁을 그는 기꺼이 들어주었을 것이다. 이수병이 감수를 맡았던 하태환의 원고가 지금의 『지우지 못할 이야기』였던 것이다.

 

 

 

 

1968년

책의 머리말은 1968년 4월 19일 안양교도소 안에서 작성되었다고 한다. “민주주의가 좋다는 것은 독재가 아니기 때문에 좋고, 독재가 아니어서 좋다는 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권(人權)의 침해를 받음이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5쪽)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지우지 못할 이야기』는 686페이지의 조금은 부담될 정도의 두꺼운 분량으로 이어진다.

저자 하태환은 책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법무부 장관·국회법사 위원장에게 드리는 공개 건의문」이라는 글을 부록으로 싣는다. 다섯 가지 주제로 나누어, 교도소에서 겪었던 불편, 이를테면 ‘수감자를 때리는 행위’의 개선이나 사무에 관한 것들을 건의하거나, 심지어는 수감자가 아닌, 교도관의 복지문제까지 걱정하는 내용의 장황한 건의문이다. 교도소를 나오면서도 저자는 ‘담장 안’에 계속 남아있을 사람들을 걱정했던 것이다.

 

 

비록 마음대로 다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이 안의 생활이었지만, 우리는 여하간 이 풍부한 문화적인 시설 속에서 오랜 세월을 내 집처럼 살아왔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호텔’ 아닌 ‘호텔’, ‘대궐’ 아닌 ‘대궐’, ‘주택’ 아닌 ‘주택’과도 이 밤이 새고 내일 아침 다섯 시가 되면 안녕을 고하게 된다. 물론 영원히 다시 들어올 필요가 없으리라는 결심으로 떠나가면서. // 하지만 애오라지 무엇인가 정이 어려있는 것만 같고, 어쩐지 잊혀지지 않는 애착 같은 것에 잠기기도 하여 나의 심경은 그저 착잡하기만 하다. 지긋지긋한 수난의 울 안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떠나는 마당에 이런 엉성궂은 느낌이 감도는 것을 보니 사람이란 정녕 독하지 못한 존재임이 틀림없는가 보다.

- 365쪽

 

 

저자는 위의 구절처럼 출소를 앞두고 회한에 젖기도 한다. 그리고 그보다 앞선 페이지에는 「김대중(金大中) 의원께」라는 편지글을 싣는다. 저자를 비롯한 혁신계 정치인들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시에 같은 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김의원! 나가거덜랑 혁신계 수감자들의 석방을 위해 수고 좀 해주시오”

“그리고 이젠 보수정당 그만두고 혁신정당으로 옮기시오”

- 665쪽

 

 

‘혁신계’와는 다른 보수정치인이었던 김 전 대통령에게 ‘이젠 보수정당 그만두고 혁신정당으로 옮기시오’라는 농담조의 말은 그것을 읽고 있던 나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국회의원이었지만 훗날 대통령이 되어 우리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의 당황하는 표정이 떠올랐기도 하지만, ‘석방을 위해 수고 좀 해주시오’라는 간곡한 부탁 뒤에 나온 그 발언이 왠지 모르게 한없이 순수하게만 느껴졌던 때문이다.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동지들과 심지어는 위문공연을 왔던 가수들에게까지 감사의 인사를 전한 「인사의 말씀, 감사의 말씀」과 「모범 변론문(김봉환 변호사) 소개」,「혁신정당 문헌소개」,「5투 40년 - 나의 자서 약전」등이 574쪽에서부터 100페이지 넘게 부록으로 실렸다. 이처럼 많은 자료를 책에 수록한 것은 저자가 이 옥중수기에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1961년

저자는 쓴다. 옥중에서 겪었던 많은 일들. 「옥중생활 스케치」(371쪽)에는 문희중, 김달호, 윤길중, 송지영, 안신규, 이종신, 정순학, 강기철, 기세충, 권대복, 이삼근, 이수병, 유근일, 김을수 등 함께 생활했던 동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옥중화제와 그 주인들」(408쪽)에는 옥중에서 처음 맞았던 3.1절, 김성숙 옹의 영어공부, 옥중경력 20년의 소유자가 된 이강훈 옹의 이야기, 사면대상에서 번번이 제외되던 이동화 교수의 이야기, 7개월 만에 석방되었지만 6년간 회자되던 권오돈 교수의 이야기,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수감되었던 조중찬, 조성대 부자의 이야기, 음대를 다니던 이종률씨의 딸이 아버지를 위해 위문공연을 왔던 ‘부녀상봉’의 이야기, “목사도 사람이야”라고 말했던 이명하씨의 이야기, 이건호 교수가 던졌던 농담 이야기, TV 앞에 모여 연예인을 자신의 애인이라며 ‘극장구경’이라고 부르던 이야기, “선타도 후혁신”이라고 옥중에서 말한 한왕균씨가 출소 후 신민당에 들어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였던 이야기, ‘자유당 부정선거 관계 수형자들’에 비해 같은 정치범임에도 차별대우를 받던 이야기, 이름 때문에 사형구형을 받았던 김달수씨의 이야기, 모두가 석방을 갈망했지만 사형 당한 최백근씨를 위해 홀로 죄의식을 가지고 묵묵히 생활했던 김영옥씨의 이야기를, 저자는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꼼꼼히 쓴다.

그러나 저자는 쓰지 않는다.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담장 바깥’의 이야기를.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극도로 절제한 그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하지만 저자가 쓰려고 했던 것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문학적인 기지를 흉내낸 기교에 급급하는 따위의 방법을 지양하고, 보다 더 많은 양의 내용을 담음으로써 명실공히 「한국 혁신진영 수난 단면사」가 되게 하고자”(11쪽)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 보다는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만 자세히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침묵 상태가 이루어진 순간, 방청석에서는 아까부터 훌쩍거리던 울음 소리가 아직도 그치질 않는 것이었다. 누구인가가 울음을 말리는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나는 얼른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누구의 가족인지는 잘 모르겠고, 다만 나의 처(李淑妊)는 눈물을 흘려서 얼굴이 희뜩희뜩해진 채, 내가 앉아 있는 자리만을 두 눈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이때에 나는 아내의 모습이 어떻게 애처롭던지 참으로 창자가 끊어지기라도 하는 듯한 아픔을 느끼곤 하였다.

- 113쪽

 

 

위의 단락이 저자가 자신에 대해 쓴 거의 유일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극도로 아끼면서도 실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1961년 5월 16일 아침 8시 경부터

나는 가던 길을 되돌아 섰다. 그리고 집에까지 달려와서 고생하는 아내에게 이 중대 뉴스를 알리었다. (중략) 우리 혁신진영은 본래 합헌합법(合憲合法)적인 정치결사로서 가장 평화적이고, 또한 민주적이었음은 국내외가 다 잘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후진성을 탈피 못하고 근대적인 정치 감각이 빈곤한 우리 사회에서, “혁명”이란 이름으로 혹시나 상식 밖에의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시내에는 요소요소에 쳐진 바리케이트가 하루 종일 철거되지 않은 채 그 옆에는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지켜서고 있었다. 하루종일이라야 실은 하오 6시가 통행금지이기는 했지만. (중략) 이날 역시 밤에는 아내와 더불어 닥쳐올 미지수의 운명을 걱정하여 보기도 했다. 이렇게 걱정을 하다가도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걱정을 한다는 그 자체가 도리어 우습기만 했다. 그것은 내 자신의 정치행동이란 어느 누가 파보더라도 수정처럼 투명하기만 했었기 때문이다. (중략) “웬 손님들이 자꾸 들어와? 우리 호텔 수지 맞겠네...” 이것은 유치장 간수의 유모어 였다. 유치장은 벌써 만원이었던 것이다.

-24쪽 ~ 29쪽

 

 

 

다시 2013년

그로부터 52년이 흘렀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을 올해도 갖게 된다. 『지우지 못할 이야기』를 마지막 페이지부터 다시 역순으로 읽어가면서 나는 이 책 제목이 왜 ‘지우지 못할 이야기’가 되어야만 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숱한 세월의 역경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고 결국 ‘지우지 못한 이야기’가 되어 우리 앞에 섰다는 것에 나 홀로 경의를 표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52년 전과 똑같은 추위를 지닌 겨울이 돌아왔다. 우리는 여전히 억울한 일을 겪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할 뿐이지만, 얼굴에 잔주름을 간직한 우리는 그들이 겪었던, 그리고 겪어 왔던, 지금 겪고 있는 그 슬픔을 어루만져 주려하고 있다. 적어도 이 책 『지우지 못할 이야기』를 읽는 순간만은, 그럴 것이라고, 나는, 희망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