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피로사회(현병철 지음)를 읽고

 

사례 1.

 2015년 현재 43세이고 현재 고등학생 딸을 둔 연변출신 연희(가명)씨는 한국에서 10년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녀는 연변에서 생활을 그리워하여 딸에게 돌아가자고 했더니 딸은 한국이 좋다고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자본과 소비중심의 한국생활에 젖어있는 딸을 위해서

그녀는 많이 벌어야 하고, 많이 벌기 위해서는 그녀의 많은 시간을 돈을 버는 데 써야 했다.

그런 생활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그녀의 몸은 파스냄새가 가시지 않았고,

 그녀의 위장과 몸뚱아리는 진통제와 제산제로 하루 하루를 지탱해가고 있다.

 

 

사례 2.

2015년 현재 56세의 경규(가명)씨는

그의 아들이 명문 사립대학을 졸업을 한후 사립의학전문대학원과정을 마치고

현재 전문의 과정을 밟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위로하고 있다.

그동안 사립대학과 사립의학전문학원에 들어간 어마어마한 비용이 현재의  삶이나 미래의 삶을 버겁게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례 1. 2를 현병철의 「피로사회」를 가지고 풀어보자.

 한국에서 고등학생 딸을 키우고 있는 연변에서 온 연희씨나,

한국에서 대학 졸업후 의학전문대학원 출신 의사자녀를 키우고 있는 경규씨 모두 현병철의 ‘자기착취’를 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

「피로사회」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더 많은 돈(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것이라는 자본주의 환상에 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 누구도 그들의 삶을 강제하지 않았다.

그녀와 그녀의 딸이, 그 남자와 그 남자의 아들이 좋은 삶을 선택하기보다는 더 많은 삶이 있는 자유로운 강제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 결과로 저자의 말처럼 ‘주인 스스로가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에 편입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데즈몬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 라는 책에서 그는 도시를 인간동물원이라 했고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도시라는 동물원‘에 갇힌 ‘털없는 원숭이’로 보았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도시로 불러들이지 않았지만

도시라는 동물원 프로그램에 따라 먹고 행동하고 동물원에 갇혀있는 동물에 준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타운 하우스나 아파트와 같은 도시형주택에 스스로 갇혀서

공장식 축산, 공장식 농사로 길러진 고기나 곡식으로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이 동물원의 사육방식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사례1, 2도 자본주의 상징인 도시라는 프래임(틀)에 갇힌 ‘털없는 원숭이’와 다름이 없다.

 

 

동물원에 갇힌 ‘털없는 원숭이’와

주인스스로가 노동하는 노예가 되어 있는 ‘피로사회’의 무젤만(편집자주 참조)형의 성과주체자들은 같은 존재로 보인다.

동물원에 갇힌 야생동물들의 정형화 행동이나,

‘피로사회’에 살고 있는 성과주체자의 우울증과 같은 신경적 폭력과 어떤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피로사회는 철학자의 관점에서는 ‘돈’이 신앙처럼 떠받들어지는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속에 스스로 갇힌 현대인을 보았고,

동물학자는 도시라는 공간과 그 프로그램속에 속박되어 있는 도시인을 보았다는 관점의 차이가 흥미롭다.

 

 

현병철은 평온이 결핍된 ‘피로사회’를 사색으로 극복하자고 했다.

위의 사례의 연희씨와 경규씨에게 떠 다니는 것,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지는 것, 긴 것, 느린 것들이야말로

사색적인 삶 앞에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게 마련인 깊은 심심함(사색)의 장점 나열이 무슨 소용이지 싶다.

그래서 이 시대의 문명(자본이라는 Frame)의 구조적인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기보다는

사색으로 이겨내자는 그의 주장은 개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듯해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그는 그의 책 말미에

“그들(현대인들)은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있는 것이다” 그런 현대인에게 사색이라니....

그러나 어쩌라. 무젤만 상태의 현대인을 구제할 초인이 나타날 때까지 사색으로 견디고 이겨보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편집자주:

무젤만-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소수의 종교를 가진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 죽은 자 같은 살아있는 자’.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자’ 즉 삶과 죽음의 경계가 지워진 자들인 수용자 모두를 대표하는 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