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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그리다
박상천 지음 / 나무발전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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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울음이다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꺼억꺼억이홀로 있어 맘껏인 엉엉이저도 모르게 한 줄 조용히 흘러 울음인지 눈물인지 분명치 않은 무음이 있다.


울음들은그렇게 있는 채우리에게 옮겨온다샤워 물줄기를 타고 오기도 하고능소화 꽃잎에 얹혀 오기도 하며찔레 가시에 묻어오기도 한다이불에휴대전화 주소록에김칫국물이 벤 도마와 그 위에 내리는 햇볕에커피 머신에이적과 김종서의 노래에맞지 않는 단추에쑥갓에양치 컵에담금술에,이 시집은 울음이다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꺼억꺼억이홀로 있어 맘껏인 엉엉이저도 모르게 한 줄 조용히 흘러 울음인지 눈물인지 분명치 않은 무음이 있다.


울음들은그렇게 있는 채우리에게 옮겨온다샤워 물줄기를 타고 오기도 하고능소화 꽃잎에 얹혀 오기도 하며찔레 가시에 묻어오기도 한다이불에휴대전화 주소록에김칫국물이 벤 도마와 그 위에 내리는 햇볕에커피 머신에이적과 김종서의 노래에맞지 않는 단추에쑥갓에양치 컵에담금술에그리고 발자국 소리에 숨어오기도 하고실려 오기도 하며터벅터벅 소리와 함께 걸어오기도 한다.

울음들은그렇게 듣노라면잃은 사람을 떠오르게 하고잃으면 안 되는 사람을 헤아리게 하며잃을 수 없는 사람을 부둥키게 한다그리고 그렇게 떠올리고헤아리고부둥키다 보면종국에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홀로 있어 맘껏인저도 모르게 한 줄 조용히 흘러 울음인지 눈물인지 분명치 않은 것이 듣는 이에게로 온다어떤 울음은 잠시어떤 울음은 좀 더 오래또 어떤 울음은 읽던 책을 덮게 할 만큼 꽤 오래.

 

다만 시인은 그렇게 울지 않는다그렇게 울지 않을 작정의 징표들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었기에시 안에 그런 울음들을 몽땅 넣었기에홀로 몰래 다른 울음을 울고 있기에시인은 그 다른 울음은 가능한 한’ 시로 들려주지 않겠다 했으나 울음이 어찌 맘대로 될까기다리다 보면정성을 다해 꺼억꺼억과 엉엉과 무음을 곁에 가까이 두고 오래 읽다 보면또 다른 울음들을 우리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우리고 싶으나 시인은 사뭇 힘겨울 그런 만남을.

 

한 번쯤 깊이 울고 싶다면울어 위로받고 싶다면꼭 읽어야 할 시집이다잃으면 안 되는 사람을잃을 수 없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라면 더욱울음은 넘칠 테지만그만큼의 위로도 쏟아질 테니이를테면 이런.

 

잘 지내,

가끔 찔레꽃, 능소화, 수국으로

당신이 보낸 소식 들으며

나로 그렇게 지내 볼게 안녕.

그래도 이 막막한 시간 속 몇 벌의 옷으로. / 몇 개의 그릇으로, / 늘 거기 있는 당신고마워 그리고 발자국 소리에 숨어오기도 하고실려 오기도 하며터벅터벅 소리와 함께 걸어오기도 한다.

울음들은그렇게 듣노라면잃은 사람을 떠오르게 하고잃으면 안 되는 사람을 헤아리게 하며잃을 수 없는 사람을 부둥키게 한다그리고 그렇게 떠올리고헤아리고부둥키다 보면종국에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홀로 있어 맘껏인저도 모르게 한 줄 조용히 흘러 울음인지 눈물인지 분명치 않은 것이 듣는 이에게로 온다어떤 울음은 잠시어떤 울음은 좀 더 오래또 어떤 울음은 읽던 책을 덮게 할 만큼 꽤 오래.

 

다만 시인은 그렇게 울지 않는다그렇게 울지 않을 작정의 징표들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었기에시 안에 그런 울음들을 몽땅 넣었기에홀로 몰래 다른 울음을 울고 있기에시인은 그 다른 울음은 가능한 한’ 시로 들려주지 않겠다 했으나 울음이 어찌 맘대로 될까기다리다 보면정성을 다해 꺼억꺼억과 엉엉과 무음을 곁에 가까이 두고 오래 읽다 보면또 다른 울음들을 우리는 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고 싶으나 시인은 사뭇 힘겨울 그런 만남을.

 

한 번쯤 깊이 울고 싶다면울어 위로받고 싶다면꼭 읽어야 할 시집이다잃으면 안 되는 사람을잃을 수 없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라면 더욱울음은 넘칠 테지만그만큼의 위로도 쏟아질 테니이를테면 이런.

 

그래도 이 막막한 시간 속 몇 벌의 옷으로. / 몇 개의 그릇으로, / 늘 거기 있는 당신고마워요.

잘 지내,
가끔 찔레꽃, 능소화, 수국으로
당신이 보낸 소식 들으며
나로 그렇게 지내 볼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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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그리다
박상천 지음 / 나무발전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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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울음이다.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꺼억꺼억이, 홀로 있어 맘껏인 엉엉이, 저도 모르게 한 줄 조용히 흘러 울음인지 눈물인지 분명치 않은 무음이 있다.


울음들은, 그렇게 있는 채, 우리에게 옮겨온다. 샤워 물줄기를 타고 오기도 하고, 능소화 꽃잎에 얹혀 오기도 하며, 찔레 가시에 묻어오기도 한다. 이불에, 휴대전화 주소록에, 김칫국물이 벤 도마와 그 위에 내리는 햇볕에, 커피 머신에, 이적과 김종서의 노래에, 맞지 않는 단추에, 쑥갓에, 양치 컵에, 담금술에, 그리고 발자국 소리에 숨어오기도 하고, 실려 오기도 하며, 터벅터벅 소리와 함께 걸어오기도 한다.

울음들은, 그렇게 듣노라면, 잃은 사람을 떠오르게 하고, 잃으면 안 되는 사람을 헤아리게 하며, 잃을 수 없는 사람을 부둥키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떠올리고, 헤아리고, 부둥키다 보면, 종국에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홀로 있어 맘껏인, 저도 모르게 한 줄 조용히 흘러 울음인지 눈물인지 분명치 않은 것이 듣는 이에게로 온다. 어떤 울음은 잠시, 어떤 울음은 좀 더 오래, 또 어떤 울음은 읽던 책을 덮게 할 만큼 꽤 오래.

 

다만 시인은 그렇게 울지 않는다. 그렇게 울지 않을 작정의 징표들을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었기에. 시 안에 그런 울음들을 몽땅 넣었기에. 홀로 몰래 다른 울음을 울고 있기에. 시인은 그 다른 울음은 가능한 한시로 들려주지 않겠다 했으나 울음이 어찌 맘대로 될까. 기다리다 보면, 정성을 다해 꺼억꺼억과 엉엉과 무음을 곁에 가까이 두고 오래 읽다 보면, 또 다른 울음들을 우리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고 싶으나 시인은 사뭇 힘겨울 그런 만남을.

 

한 번쯤 깊이 울고 싶다면, 울어 위로받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할 시집이다. 잃으면 안 되는 사람을, 잃을 수 없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라면 더욱. 울음은 넘칠 테지만, 그만큼의 위로도 쏟아질 테니. 이를테면 이런.

 

그래도 이 막막한 시간 속 / 몇 벌의 옷으로. / 몇 개의 그릇으로, / 늘 거기 있는 당신, 고마워요.

잘 지내,
가끔 찔레꽃, 능소화, 수국으로
당신이 보낸 소식 들으며
나로 그렇게 지내 볼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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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목욕탕
김지현 지음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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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랬었나?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플라스틱 물고기>>를 들춰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냥 조심조심 책장을 넘기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랬었나?’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왜? 아프니까. 그래서 그냥 잊은 채 시작하기로 한다(잊는다는 것은 늘 위안을 준다고 생각하면서).

김지현의 첫 장편 <<춤추는 목욕탕>>을 읽었다. (그랬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전작 <<플라스틱 물고기>>가 ‘관계 속의 나’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면, 이번 장편은 ‘관계 속의 우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라! 얼마나 따뜻한 말인가? 그래서였나? 아픈 전작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김지현의 소설을 다시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이번 작품이 반가웠던 것이?

우리는 홀로 아파한다. 그럼에도 대개는 결국 견디고, 잊고, 넘어서고, 산다. 우리에겐 ‘나’만이 아닌 저마다의 ‘우리’가 있으니까. 하다못해 “남들도 사는데, 나라고…….”라고 말할 수 있는 내 것이 아니면서 동시에 내 것인 ‘우리’가 있으니까. 왜냐하면 그 ‘우리’에겐 ‘고통관리법(양윤의의 해설 중)’이 있고, 그 고통관리법의 처방을 ‘나’에게 내려주기 위해 우리는, 고맙게도 존재해주는 것이니까. 작품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작가의 말을 대뜸 들이미는 것이 촌스러운 일인 줄 알지만, 그래서 쪽팔리지만, 그래도.  


슬프게 우는 ‘나’와 조롱하는 ‘너’, 하지만 하나의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양과 울음의 ‘차이’, 그리고 우스꽝스럽고도 남루한 ‘화해.’ 그래서 저들 사이에 웃음이, 농담이 가능한 거라고. 그래서 깨어 있는 매 순간 사랑과 소통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럴까? 그런 것 같다. 아니, 그럴 터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들은 ‘하나의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들이니. 그렇기에 사랑이나 소통 ‘따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니. 그런데 ‘따위’라고? 그렇다. 따위. ‘웃음’과 ‘농담’을 통해 비로소 얻어지는 사랑과 소통을 ‘고귀한 무엇’이라고 해버리면, 정말 그래버리면 웃음도 농담도 다 날아가 버릴 테니. 그러면 정말 웃음 ‘따위’, 농담 ‘따위’만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남겨질 테니. 고통관리 능력을 상실한. 그렇다. 사랑과 소통은 “우스꽝스럽고 남루한 화해”일 뿐이다. 고귀한 것은, 그럼에도 그것을 통해 진행되는 삶, 그것밖에 없다.  

 

한 남자가 불현듯(?) 죽는다. 하긴 불현듯 오지 않고, 형광등을 켰을 때의 깜박임처럼 급하지만 여유 있게, “준비해. 나 지금 너에게로 가고 있어.”라고 말하며 찾아오는, “뭐? 아직 아니라고? 조금만 더……?”라고 물으며 다가오는 죽음도 있을까? 없다. 모든 죽음은 ‘느닷없이 앞을 막아(p.8)’서며, ‘왜 가로로 멈춰 서 있었는지(p.9)’ 묻게 하지만, 결국 확인할 새도 없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별안간 벌떡(p.13)’ 닥쳐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내 삶의 사건이되, 나는 ‘경험’할 수 없는, 나를 제외한 우리들만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기에. 나에게는 불현듯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는 나의 죽음이 모든 우리들에게는 불현듯 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모든 죽음이 살아남은 자들에겐 슬픈 것, 아픈 것, 참을 수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이 때문.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참을 수 없는 면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죽음이다.”라고. 그렇다. 다른 사람인 한 남자의 불현듯 한 죽음은 참을 수 없는 아픔을 남은 우리에게 던져주는 사건이다. 하물며 그 죽은 남자가 남편이고, 아들이고, 사위라면 이 참을 수 없는 아픔은 커질 수밖에 없다(커진 참을 수 없는 아픔이라, 그것은 어떤 아픔일까?).

이 커진 참을 수 없는 아픔을,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은 자들인 나와 너, 곧 우리들은 견딜 수 있을까? 넘어설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 중 하나가 <<춤추는 목욕탕>>이고 <<춤추는 목욕탕>>의 고통관리법이다. 이 고통관리법의 주체는 나가 아닌 ‘우리’이며, 그렇기에 나는 너와 갈등할 수밖에 없다. 왜? 나는 너가 아니고, 너는 나가 아님에도 ‘우리’로 묶여 서로의 고통을 관리해주어야 하니까. 그리하여 사랑과 소통을 얻어내야 하니까. 그러려니 어긋나고, 미끄러지고, 깨질 수밖에. 그런데, 바로 이 지점, 즉 그 갈등을 벗어나 사랑과 소통을 얻는 과정이 김지현의 첫 장편 <<춤추는 목욕탕>>에선 그녀의 전작 <<플라스틱 물고기>>와는 다르게 웃음과 농담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목욕탕은 벗은 살끼리 없는 거리를 두고 그 긴장 속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의 공간, 농담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단연 돋보이는 웃음과 농담의 주연은 미령의 마른 몸이 아니라, 상처받은 맘의 드러남이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살아가야만 하는 삶의 여지로서의 호순과 복남의 풍만한 몸, 그 중에서도 호순의 엉덩이다. 그렇다. 엉덩이다. 복남의 풍만한 몸, 그 중에서도 가슴이 수유(授乳)와 관계된 기관이기에 탄생과 혈연 가족을 어쩔 수 없이 품고 있는 메타포라면 엉덩이는, 더구나 풍만하고 단단한 호순의 엉덩이는 메타포가 제거된 육체, 날몸으로서의 육체이다. 그렇다. 엉덩이는 그런 규정된 관계의 무게를 벗어던진 웃음이며, 벗은 몸으로써 우리를 만나게 하는 목욕탕의 농담의 최고 주연이다. 왜냐하면 이 웃음과 농담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순의 말이다. 

  

 

“봐라! 내 엉덩이, 거짓말처럼 크잖아. 내가 이 커다란 땅덩어리 같은 걸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살려 낸 줄 아니?”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키는’ ‘뻥을 치는 일(p.15)’을 업으로(?) 삼고 있는 호순의 엉덩이는 거짓말처럼 크다. 거짓말처럼 크기에 많은 것들을 살려낸다(비록 냉장고는 사망에 이르게 했지만). 삶은 날것이다. 눈은 앎과 인식의 메타포이자 날것으로서의 삶을 앎과 인식으로 포장하는 우리 존재의 표상이다. 그런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키는 거짓말은 우리를 날것으로서의 삶으로 복귀시키는, 억지로 저장되는 냉장고의 삶이 아닌 시간이 지나면 상하고 썩는 날것으로서의 삶으로 이끄는 ‘고통관리’ 기제다. 이 거짓말이 호순의 엉덩이와 만나는 것은 엉덩이가 곧 거짓말이며, 이 엉덩이와 거짓말이 우리를 살게 하는 웃음과 농담이기 때문이다. 미령에게, 복남에게, 호순에게 현욱의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경험이다. 미령이 환상을 만나는 것도, 복남이 미령을 거부하는 것도 모두 그 견딜 수 없는 경험을 삶 속에서 견디기 위한 행위이다. 그러나 미령이 “슬퍼한다는 건 그리워한다는 거니까. 그립다는 건 상대를 더 이상 만질 수 없어 몸이 차가워지는 일”을 견디기엔, 복남이 “삶이라는 게 금지어 아래서 고작 똥이나 싸다 죽어가는 일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p.35)”을 견디기엔 그 환상과 거부는 너무도 힘이 없다. 환상은 실제의 삶도, 더구나 날것의 삶도 아니며, 거부는 고통관리 주체로서의 우리를 거부하는 것이기에. 호순의 엉덩이가, 그녀의 거짓말이, 그녀의 웃음과 농담이 안타까움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기에는 날것으로서의 삶과 감싸 안음, 품음, 곧 우리(의 가능성)가 있기 때문이다.  

 

나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한 믿음의 징표로 보여 줄 수 있는 게 고작 엉덩이뿐이라는 쓸쓸함과 미안함. 하지만 그 믿음이 엉덩이 같다는 생각.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키는 거짓말인 호순의 엉덩이는 믿음, 곧 사랑과 소통을 담고 있는 웃음과 농담인 것이며, 나의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우리(의 가능성)인 것이다. 나는 동어반복인 이 문장으로밖엔 호순의 엉덩이를, 이 소설 <<춤추는 목욕탕>>을 표현할 수 없다.  

“땅에 붙어사는 몸뚱이는 어딜 가나 일상의 패턴을 실천하느라 피곤하고, 지루(p.172)”한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 삶을 춤추게 할 수 있다면? <<춤추는 목욕탕>>은 “끄고 싶어도 끄지 못하는 알람시계를 끌어안고 한 움큼의 토사물을 쏟아 내면서도, 부드러운 두부 따위에 위로를 구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p.243)”를 삶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고통관리 매뉴얼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게다가 한 죽음의 경험을 통해 ‘커진 참을 수 없는 아픔’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 홀로 견뎌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함께 해야만 견디고 넘어설 수 있는 일이라는 것. 그렇기에 비록 나는 너가 아니지만, “모양과 울음의 ‘차이’”를 지닌 다른 존재지만, 웃음과 농담 속에서 ‘우리’가 될 수 있기에, 비록 그것이 “우스꽝스럽고도 남루한 ‘화해’”일지라도 사랑하고 소통할 수 있기에 나는, 너는 ‘우리’를 받아들이곤 하는 것이라는 것.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ꡔ춤추는 목욕탕ꡕ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김지현이 우리에게 새롭게 펼쳐보이는 세계이기도 하다. 모쪼록 이 세계가 더욱 풍만하고, 더욱 단단해지길 바란다. 호순의 엉덩이처럼. 춤추는, 춤추게 하는 그녀의 엉덩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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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5
루이스 캐럴 원작, 마틴 가드너 주석, 존 테니엘 그림, 최인자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오래 기다렸던 책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단순한 동화가 아님에도 아이들이나 읽는 동화처럼 취급되어 제대로 된 번역이 이뤄지지 않았던, 판타지의 고전의 반열에서 급기야 동시대의 철학적 텍스트가 된 작품을 마주하는 즐거움은 그 기다림에 대한 반가움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원작의 두 배는 될 듯한, 원작만큼이나 풍부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주석까지 상세하게 덧붙여져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주석자인 마틴 가드너는 앨리스의 원작 삽화가였던 존 테니얼의 알려지지 않은 삽화까지 찾아 수록해 놓았다. '결정판'이라는 말이 전혀 무색하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간 확인할 수 없던, {앨리스}에 숨겨져 있는 수학적 상징을 비교적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왜 이 책이 디지털 시대라 불리는 이 시대에 '다시' 각광(이 책의 친절한 각주들을 보면 {앨리스}가 당대의 작가들의 작품에도 수없이 인용되고 있으며, 그들 작품의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아일랜드의 고집쟁이 제임스 조이스마저 어렵기 그지없는 책, {피네건의 경야}에 {앨리스}를 인용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책 49쪽 참조)을 받고 있는지 알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즐거운 병의 향연'이라 할만한 루이스 캐럴의 아름다운 욕망 또한.......

{앨리스}는 디지털 공간의 '혼융' 혹은 '변화'의 속성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다. 접속 코드와 같은 구멍, 무한한 변화를 '몸'으로 보여주는 주인공 앨리스, 그리고 실재와 비실재, 현실과 비현실이 혼융되어 있는 공간 혹은 공간성. 너무 간단한 언급이지만, 이러한 속성 혹은 미덕 때문에 {앨리스}는 우리 시대의 작가들에게 열렬한 조명을 받고 있다.

촬영 기법이나 내용 등 거의 모든 면에서 SF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매트릭스'를 보면 우리는 이 점, 즉 {앨리스}가 어떤 방식으로 인용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어떻게 동시대의 텍스트가 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네오는 검은 모니터(구멍)를 통해 전해온 한 문장, 곧 "흰토끼를 따라가라"는 문장을 통해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로 빠져든다. 세계의 모든 것이 실재가 아닌 허상일 뿐이라는 진리를 터득하는 계기가 된 것이 '구멍'과 '토끼'였던 것이다. 이는 앨리스가 비실재(판타지)의 경험을 통해 실재의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과 정확한 대칭을 이룬 채 일치한다.
같은 시퀀스에서 천재적인 형제 감독(래리&앤디 워쇼스키)은 {앨리스}가 지닌 이러한 현재성을 매우 적절한 비유 혹은 상징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또 다른 인용으로 나타난다. 다름 아닌 {시뮬라시옹}과의 병치. 문을 두드리는 흰토끼 일행에게 줄 CD를 네오는 현대의 고전이자 디지털적 세계에 대한, 또는 그러한 세계로의 변화에 대한 영향력 있는 저작인 시뮬라시옹(장 보드리야르)의 '구멍(책 속은 검은 사각의 구멍으로 보여진다)' 속에서 꺼낸다. 이는 {앨리스}가 단순한 캐릭터나 사건의 인용이 아닌 '매트릭스'라는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 혹은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앨리스}는 과거의 어떤 책이 아니라 현재 이곳의 책으로 문화 속에 그려지고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작가 중 한 사람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떠올려 보라. 조그마한 터널(검은 구멍)을 통해 비실재적 공간으로 들어가 '성장'을 하고 돌아오는 소녀의 이야기 말이다.
여담이지만, 이 책의 108쪽을 보면 같은 감독의 또 다른 걸작 '이웃의 토토로'의 명장면인 나무 위의 고양이버스와 너무도 유사한 삽화가 인쇄되어 있다. 하야오 역시 {앨리스}의 전체적인 세계와 함께 그 속의 디테일까지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우리의 작은 소녀 '메이'는 토끼처럼 희고 귀가 큰 작은 토토로를 따라 나무들로 이루어진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나무 '구멍' 속에서 자고 있는 커다란 토토로를 발견한다).

어쨌든, 그러니, 이 '커다란' 현재의 고전을 읽는 것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 책, {앨리스}는 한 위대한 환자의 아낌없는 사랑으로 태어난 작품이 아니던가? 그러니.......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출판된 이후, 비록 그렇게 불리고 있긴 있지만, 소녀 페티시즘은 '롤리타 콤플렉스'라기보다는 '앨리스 콤플렉스'로 불려져야 한다. 하지만 이름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페티시즘은 일종의 성적 전도 혹은 욕망의 전도다. 평범하지 않고, 일상적이지 않고, 일반적이지 않은, 그리하여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사유 속에서는 '변태'라는 이름으로 도외시되고 있는 전도. 하지만, 예술은 혹은 예술 행위는 결국 표현의 욕망과 표현된 것이 만나는 페티시즘의 장이 아니던가? 세계를 세계 자체로 표현할 수 있는 자,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보드리야르의 표현({사물의 체계})에 따르자면, 현대는 명명의 체계가 불가능할 만큼 급변하는 세계가 아니던가? 그러니 어찌 총체성, 주체의 완전한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페티시즘은 어쩌면, 가장 솔직한 욕망의 표현, 또는 표현의 욕망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캐럴은 소녀 '앨리스'에 대한 성취할 수 없는 욕망을 이 책 {앨리스}를 통해 성취(? 캐럴에겐 모르겠지만, {앨리스}는 말 그대로 성취라 할 수 있을 것이다)한다. 도무지 성취될 수 없는 그 욕망, 곧 사랑을 말이다.


어째서 그가 전도된 사랑을 하게 되었는지, 어찌하여 그러한 욕망을 갖게 되었는지 묻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 우리는 그저 그의 전도가 작품을 통해 재전도를 이뤄 예술로 승화되는 '카니발' 혹은 향연을 즐기면 그만일 뿐이다. 세계의 부조리와 그것을 통한 성숙을 어른이 아닌 친구의 마음으로 연인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기원하고 있는 한 중년 사내의 소녀에 대한 정성어린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면 그만일 뿐인 것이다. 병이라고 치부되고 있는 그 전도를 즐거운 병으로 만든 한  아름다운 환자의 향연에 행복한 마음으로 빠져들면 그 뿐인 것이다.
그러니 '롤리타 콤플렉스'건 '앨리스 콤플렉스'건 이름이 무어 중요할까.

오래 기다렸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읽었지만, 아직도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오래 오래 두고 두고 몇 번이고 읽어가며 환상과 사랑의 병에 빠져들고 싶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양소유({구운몽})가 꿈에서 깨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듯 즉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듯 우리의 현실을 더욱 치열하게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려나 이 즐거움을 이 병의 즐거움, 즐거움의 병의 향연을 함께 나누고 싶다. 아직도 예술적 환상이 우리의 삶과 사랑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책 속(pp.197-198)에서

그러므로 어서 와서 들으렴.
 가혹한 세월에 시달린 두려움의 목소리가
그대를 반갑지 않은 침상으로 부르기 전에.
 우울한 아가씨여!
우리는 단지 임종의 시간이 가까운 것을 알고 초조해하는
좀더 나이 든 어린아이들일 뿐.

집 밖에는 눈앞을 가리는 눈과 서리. 
 폭풍의 우울한 광기 -
집 안에는 벽난로 불빛의 빨간 열기와
 어린 시절 보금자리의 즐거움.
마법의 말들이 순식간에 그대를 사로잡으리.
그대는 미쳐 날뛰는 돌풍을 알아채지 못하리라.

비록 이야기 속에서
 한숨의 그림자가 가냘프게 떨릴지 모르지만.
‘행복한 여름날’은 지나갔기에,
 여름날의 영광은 사라졌기에 -
하지만 고통의 한숨도
우리 이야기의 즐거움을 시들게 하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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