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춤추는 목욕탕
김지현 지음 / 민음사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그랬었나?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플라스틱 물고기>>를 들춰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냥 조심조심 책장을 넘기는 것이라면 몰라도 ‘그랬었나?’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왜? 아프니까. 그래서 그냥 잊은 채 시작하기로 한다(잊는다는 것은 늘 위안을 준다고 생각하면서).
김지현의 첫 장편 <<춤추는 목욕탕>>을 읽었다. (그랬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전작 <<플라스틱 물고기>>가 ‘관계 속의 나’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면, 이번 장편은 ‘관계 속의 우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라! 얼마나 따뜻한 말인가? 그래서였나? 아픈 전작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김지현의 소설을 다시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이번 작품이 반가웠던 것이?
우리는 홀로 아파한다. 그럼에도 대개는 결국 견디고, 잊고, 넘어서고, 산다. 우리에겐 ‘나’만이 아닌 저마다의 ‘우리’가 있으니까. 하다못해 “남들도 사는데, 나라고…….”라고 말할 수 있는 내 것이 아니면서 동시에 내 것인 ‘우리’가 있으니까. 왜냐하면 그 ‘우리’에겐 ‘고통관리법(양윤의의 해설 중)’이 있고, 그 고통관리법의 처방을 ‘나’에게 내려주기 위해 우리는, 고맙게도 존재해주는 것이니까. 작품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작가의 말을 대뜸 들이미는 것이 촌스러운 일인 줄 알지만, 그래서 쪽팔리지만, 그래도.
슬프게 우는 ‘나’와 조롱하는 ‘너’, 하지만 하나의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을 수밖에 없는 ‘우리.’ 모양과 울음의 ‘차이’, 그리고 우스꽝스럽고도 남루한 ‘화해.’ 그래서 저들 사이에 웃음이, 농담이 가능한 거라고. 그래서 깨어 있는 매 순간 사랑과 소통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럴까? 그런 것 같다. 아니, 그럴 터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들은 ‘하나의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들이니. 그렇기에 사랑이나 소통 ‘따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니. 그런데 ‘따위’라고? 그렇다. 따위. ‘웃음’과 ‘농담’을 통해 비로소 얻어지는 사랑과 소통을 ‘고귀한 무엇’이라고 해버리면, 정말 그래버리면 웃음도 농담도 다 날아가 버릴 테니. 그러면 정말 웃음 ‘따위’, 농담 ‘따위’만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남겨질 테니. 고통관리 능력을 상실한. 그렇다. 사랑과 소통은 “우스꽝스럽고 남루한 화해”일 뿐이다. 고귀한 것은, 그럼에도 그것을 통해 진행되는 삶, 그것밖에 없다.
한 남자가 불현듯(?) 죽는다. 하긴 불현듯 오지 않고, 형광등을 켰을 때의 깜박임처럼 급하지만 여유 있게, “준비해. 나 지금 너에게로 가고 있어.”라고 말하며 찾아오는, “뭐? 아직 아니라고? 조금만 더……?”라고 물으며 다가오는 죽음도 있을까? 없다. 모든 죽음은 ‘느닷없이 앞을 막아(p.8)’서며, ‘왜 가로로 멈춰 서 있었는지(p.9)’ 묻게 하지만, 결국 확인할 새도 없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별안간 벌떡(p.13)’ 닥쳐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내 삶의 사건이되, 나는 ‘경험’할 수 없는, 나를 제외한 우리들만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기에. 나에게는 불현듯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는 나의 죽음이 모든 우리들에게는 불현듯 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모든 죽음이 살아남은 자들에겐 슬픈 것, 아픈 것, 참을 수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이 때문.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참을 수 없는 면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죽음이다.”라고. 그렇다. 다른 사람인 한 남자의 불현듯 한 죽음은 참을 수 없는 아픔을 남은 우리에게 던져주는 사건이다. 하물며 그 죽은 남자가 남편이고, 아들이고, 사위라면 이 참을 수 없는 아픔은 커질 수밖에 없다(커진 참을 수 없는 아픔이라, 그것은 어떤 아픔일까?).
이 커진 참을 수 없는 아픔을, 그러면 어떻게 살아남은 자들인 나와 너, 곧 우리들은 견딜 수 있을까? 넘어설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 중 하나가 <<춤추는 목욕탕>>이고 <<춤추는 목욕탕>>의 고통관리법이다. 이 고통관리법의 주체는 나가 아닌 ‘우리’이며, 그렇기에 나는 너와 갈등할 수밖에 없다. 왜? 나는 너가 아니고, 너는 나가 아님에도 ‘우리’로 묶여 서로의 고통을 관리해주어야 하니까. 그리하여 사랑과 소통을 얻어내야 하니까. 그러려니 어긋나고, 미끄러지고, 깨질 수밖에. 그런데, 바로 이 지점, 즉 그 갈등을 벗어나 사랑과 소통을 얻는 과정이 김지현의 첫 장편 <<춤추는 목욕탕>>에선 그녀의 전작 <<플라스틱 물고기>>와는 다르게 웃음과 농담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목욕탕은 벗은 살끼리 없는 거리를 두고 그 긴장 속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의 공간, 농담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단연 돋보이는 웃음과 농담의 주연은 미령의 마른 몸이 아니라, 상처받은 맘의 드러남이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살아가야만 하는 삶의 여지로서의 호순과 복남의 풍만한 몸, 그 중에서도 호순의 엉덩이다. 그렇다. 엉덩이다. 복남의 풍만한 몸, 그 중에서도 가슴이 수유(授乳)와 관계된 기관이기에 탄생과 혈연 가족을 어쩔 수 없이 품고 있는 메타포라면 엉덩이는, 더구나 풍만하고 단단한 호순의 엉덩이는 메타포가 제거된 육체, 날몸으로서의 육체이다. 그렇다. 엉덩이는 그런 규정된 관계의 무게를 벗어던진 웃음이며, 벗은 몸으로써 우리를 만나게 하는 목욕탕의 농담의 최고 주연이다. 왜냐하면 이 웃음과 농담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순의 말이다.
“봐라! 내 엉덩이, 거짓말처럼 크잖아. 내가 이 커다란 땅덩어리 같은 걸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살려 낸 줄 아니?”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키는’ ‘뻥을 치는 일(p.15)’을 업으로(?) 삼고 있는 호순의 엉덩이는 거짓말처럼 크다. 거짓말처럼 크기에 많은 것들을 살려낸다(비록 냉장고는 사망에 이르게 했지만). 삶은 날것이다. 눈은 앎과 인식의 메타포이자 날것으로서의 삶을 앎과 인식으로 포장하는 우리 존재의 표상이다. 그런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키는 거짓말은 우리를 날것으로서의 삶으로 복귀시키는, 억지로 저장되는 냉장고의 삶이 아닌 시간이 지나면 상하고 썩는 날것으로서의 삶으로 이끄는 ‘고통관리’ 기제다. 이 거짓말이 호순의 엉덩이와 만나는 것은 엉덩이가 곧 거짓말이며, 이 엉덩이와 거짓말이 우리를 살게 하는 웃음과 농담이기 때문이다. 미령에게, 복남에게, 호순에게 현욱의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경험이다. 미령이 환상을 만나는 것도, 복남이 미령을 거부하는 것도 모두 그 견딜 수 없는 경험을 삶 속에서 견디기 위한 행위이다. 그러나 미령이 “슬퍼한다는 건 그리워한다는 거니까. 그립다는 건 상대를 더 이상 만질 수 없어 몸이 차가워지는 일”을 견디기엔, 복남이 “삶이라는 게 금지어 아래서 고작 똥이나 싸다 죽어가는 일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p.35)”을 견디기엔 그 환상과 거부는 너무도 힘이 없다. 환상은 실제의 삶도, 더구나 날것의 삶도 아니며, 거부는 고통관리 주체로서의 우리를 거부하는 것이기에. 호순의 엉덩이가, 그녀의 거짓말이, 그녀의 웃음과 농담이 안타까움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기에는 날것으로서의 삶과 감싸 안음, 품음, 곧 우리(의 가능성)가 있기 때문이다.
나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한 믿음의 징표로 보여 줄 수 있는 게 고작 엉덩이뿐이라는 쓸쓸함과 미안함. 하지만 그 믿음이 엉덩이 같다는 생각.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키는 거짓말인 호순의 엉덩이는 믿음, 곧 사랑과 소통을 담고 있는 웃음과 농담인 것이며, 나의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우리(의 가능성)인 것이다. 나는 동어반복인 이 문장으로밖엔 호순의 엉덩이를, 이 소설 <<춤추는 목욕탕>>을 표현할 수 없다.
“땅에 붙어사는 몸뚱이는 어딜 가나 일상의 패턴을 실천하느라 피곤하고, 지루(p.172)”한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 삶을 춤추게 할 수 있다면? <<춤추는 목욕탕>>은 “끄고 싶어도 끄지 못하는 알람시계를 끌어안고 한 움큼의 토사물을 쏟아 내면서도, 부드러운 두부 따위에 위로를 구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p.243)”를 삶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고통관리 매뉴얼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게다가 한 죽음의 경험을 통해 ‘커진 참을 수 없는 아픔’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 홀로 견뎌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함께 해야만 견디고 넘어설 수 있는 일이라는 것. 그렇기에 비록 나는 너가 아니지만, “모양과 울음의 ‘차이’”를 지닌 다른 존재지만, 웃음과 농담 속에서 ‘우리’가 될 수 있기에, 비록 그것이 “우스꽝스럽고도 남루한 ‘화해’”일지라도 사랑하고 소통할 수 있기에 나는, 너는 ‘우리’를 받아들이곤 하는 것이라는 것.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ꡔ춤추는 목욕탕ꡕ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김지현이 우리에게 새롭게 펼쳐보이는 세계이기도 하다. 모쪼록 이 세계가 더욱 풍만하고, 더욱 단단해지길 바란다. 호순의 엉덩이처럼. 춤추는, 춤추게 하는 그녀의 엉덩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