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가는 기분 창비청소년문학 75
박영란 지음 / 창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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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가는 기분, 박영란, 창비

학생들에게 책을 권해 주기 위하여 억지로 성장 소설을 읽는 편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마음이 슬금슬금 풀리는 소설을 만났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소년은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사는데 사정이 있어 호적상으로 외할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외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른다. 그의 진짜 엄마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소년의 친구 수지는 삼호 연립 가장 아래층, 지하에 사는 절름발이 여학생이다. 둘은 밤 12시에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우정을 유지한다.

어느 날, 수지는 소년에게 말하지 않고 이사를 가버렸다. 소년은 수지를 찾으러 가는 방법을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대신 편의점에 오는 손님들을 주목하게 된다. 동네에 불이 나는 이유를 파헤치게 된다. 후드를 입고 같은 시간에 와서 라면을 먹는 남자 훅, 동네 고양이들에게 몰래 밥을 주는 캣맘, 이지를 상실한 엄마를 데리고 온 꼬마 수지.

소년은 편의점 주인인 외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꼬마 수지에게 몇 시간 알바를 맡기는 것으로 수지네 모녀를 돕는다. 캣맘을 도와서 고양이들에게 밥을 준다. 훅이 자신이 물건을 찾도록 힘을 써준다.

소년은 이렇게나 마음이 따스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자신의 절친 수지는 찾지 않는 것일까? 그 비밀은 책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스포일러를 너무 많이 해도 곤란하니까.

인물들은 다들 명대사를 하나씩 말한다.

“나는 말이야, 다른 방식의 표본을 하나 추가해 줄 생각이야. 그러면 세계를 설명해 주는 거대한 그래프에 변수가 한 가지 생기는 거지.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방식을 추가해 준다면 더 많은 변수들이 생기겠지. 그러면 세계를 설명하는 그래프 모양이 바뀌는 거라고.”

(훅)

나는 세상 사람들이 추천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어떤 물건을 살 때는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것을 사는 편이다. 소위 말하는 국민육아용품들. 그것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다.

대신 나는 많은 엄마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한다. 바로 퇴근하고 집으로 가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갖기. 이런 내 방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성애 부족한 사람’,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보일지도 모르지만 꼭 필요하다. 점점 나와 같은 엄마들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어떤 일에 노련해진다는 건 그 일에 책임 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 일에 생활이 달렸다는 거고, 그만큼 무게를 짊어졌다는 뜻일 거야. 그런데...”

누나가 말을 멈췄다. 누나의 옆얼굴을 보았다.

“편의점 알바 일에 노련해진다는 거, 그거 슬픈일이다.”

(편의점 알바 누나, 150쪽)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날도 오랜만에 집에 온 엄마가 밤에 소주를 마시다가 외할머니를 들볶았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때 내가 엄마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인간답게 사는 게 뭔데?”

그러자 엄마가 입을 닫고 우뚝 멈춰섰다.

“인간답게 사는 게 뭔지나 알아?”

나는 천천히 또박또박 물었다. 엄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113쪽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이다. 인간답게 사는 게 뭘까. 몸이 게으르고 생각이 둔한 나는 어떤 일을 하기 싫으면 이렇게 스스로 묻는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일에 의미가 있는가.”

오늘도 직장에서 동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동료들은 대부분 어떤 일을 처리할 때 미루지 않고 성실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행동에 버퍼링이 없다. 그에 비하면 나는 게을러서 모든 일을 끝까지 미루고 하고 싶은 일만 쏙쏙 골라 한다. 이런 나와 동료들이 같은 직업군이라서 신기하다. 그래서 나는 소위 삐딱선 타는 사람으로서 조직에 대하여 비판하는 말하기를 즐겨하나 보다.

직장에서 본질에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 행정보다는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자꾸 책을 읽나 보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책이야기가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마트를 하다가 편의점을 하게 된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탄식한다.

“그래도 마트 장사가 속 편해. 편의점 때문에 물건 못 대는 사람들 원망이 얼마나 크냐. 그 중간 상인들 다 망하게 생겼어. 에구, 이게 사람 사는 거냐. 전부 죽으라는 거지.”

마트 할 때는 들어오는 물건마다 회사나 공장이 다르고 납품업자도 달라서 외할아버지가 상대하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편의점에는 없는 온갖 자질구레하고 불량한, 하지만 누군가에겐 꼭 필요할 법한 물건을 대는 이도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그 사람들하고 거래하고 친구도 맺고 다투기도 하고 흥정하기도 했다. 그런 일을 물건 파는 일만큼 신나게 했다. 그런데 편의점은 그런 세세하고 번거로운 일들이 싹 사라진 대신 냉정하게 수탈해 가는 상전을 모신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164쪽

프랜차이즈 상점들을 이용할 때마다 느낀 나의 선득한 감정이 여기 나타나 있다. “냉정하게 수탈해 가는 상전” 이라니 절묘하다.

『편의점 가는 기분』은 전체적으로 글이 술술 읽히며 적당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어서 독자를 붙드는 책이다. 몇 가지 교훈적인 부분들은 취향에 따라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청소년들에게는 의미 있는 울림이 될 수 있겠다. 주인공이 너무 반듯하고 마음이 따뜻하고 조숙한 편이라서 삐딱하고 명랑한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덜 선호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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