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여섯 번째 대멸종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김보영 옮김, 최재천 감수 / 쌤앤파커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논픽션 수상작 답게 ‘(대)멸종‘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인류세‘ 서사의 걸작이다. 대멸종을 다룬 여러 책들보다 지질학이나 진화론을 포함하는 여러 얽힌 문제점들을 잘 아우르며 거시적인 안목을 갖도록 해주는 명쾌한 서술이고, 번역도 무난히 읽힌다. 현장을 찾고 연구자를 만나는 열정이 돋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월이니 안중근 생각을 하며 기대감에 김훈을 읽었다. 하지만 조선의 장부는 결국 카돌릭 그물에 비친 부랑자인 양 그려져 턱없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안중근에게 ‘단지동맹‘ 언급도 없이 지나가다니! 예전 일본에도 아마 그런 작품이 있었지 않았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많이 모자란 소설, 어찌 카돌릭 안중근만이 중요했을까! 1900년대의 사건과 시대 흐름에 대한 가벼운 생각이 소설 호흡을 우습게 만든다. 왜 ‘우라지‘로 갔는지, 또 단지동맹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다. 참모중장이나 의병은 그저 배경 뿐일까? 계몽이란 이름의 지식만으로는 정신사 감당이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구범진 지음 / 까치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보고 병자호란은 세부로 들어갈수록 밝혀지지 않은 내용들이 많다고 다시 느끼게 되었다.

역사가에게 사료를 정확히 읽어내는 일의 중요함도 이처럼 새롭게 다가온다. 특히 만주어까지 해독하여 청실록을 다시 읽어내고서야 전모가 들어날 정도니까 말이다.

한국사 분야이므로 기존의 한국사 연구들이 많이 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서평자(계승범, 허태구, 노영구 등)들도 사실 해석이나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평하지 어

던 다른 사료를 보태거나 이미 패한 전쟁이라는 명확한 결론에는 아무런 다른 의견들이 없어 보인다. 결국 마마(천연두)가 두려워 홍타이지가 일찍 끝낸 전쟁이라는 주장까지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학계에서 임경업은 설화로나 다루지 장군으로서의 역할엔 별로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저자도 임경업이 7천 군사를 이끌고 백마산성에 들어가 "꿈쩍도 하지 않았"(125쪽)다고 썼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임경업은 이순신 장군처럼 정조 대에 문집이 다시 평가 정리된 장군이다. <임충민공실기>에 의하면 임경업은 최초로 청군의 압록강 도강을 보고만 한 것이 아니라, 유림에게 장계를 올려 직도하는 청군의 후방인 심양을 치도록 군사를 내달라고 졸랐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데 병자년이 가기 전에 홍타이지는 후로가 걱정되어 요퇴(책 중의 '요토'는 아닌듯하나 거론이 없었음)에게 300을 주어 되돌아가도록 하였는데, 이들 군사를 압록강에서 참살하고 피로인 등을 구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임경업의 거조가 미리 직도하는 청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교란하려는 그의 술수('詭計')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정온의 <동계집>(연보)에도 나온다. 이제까지의 병자호란을 다룬 책들에서는 임경업의 이런 전술을 제대로 평가한 책이 없었던 것 같다. 요퇴가 후방을 살피지 못한 상황에서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에서 마냥 시일을 허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임경업의 백마산성 군사가 설사 전황에 직접적으로 큰 변수가 된 것은 아니었다고 하여도 청태종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한 요인은 충분히 되었을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르수 우잘라 -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2006년 다른 곳에 썼던 리뷰가 생각나서 여기에 옮긴다)

이 소설(1923년 발표)은 원래 20세기 초 극동 시베리아의 우수리강 동편, 시호테 알린 산맥의 연해지방을 탐사했던 사실을 기록한 탐사기로서 일종의 르뽀문학인 셈이다. 저자 아르세니에프는 탐사대장으로서 원주민 길안내자로 고용한 데르수 노인(당시 58세)과 지낸 반 년 간의 기록을 통해서 야생의 자연인인 데르수와 영혼을 울리는 깊은 우정을 맺게 되고 또한 그가 들려주는 자연에 대한 가르침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저자는 책 앞에 소개된 고리끼의 편지에서도 지적이 있다시피 ''풍부한 자연묘사와 특유의 표현력''을 지닌 서정성 높은 작가였기에, 이 소설이 단순한 과학적 사실기록의 탐사기를 넘어 ''위대한 영혼''의 삶을 형상화한 소설로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문명의 힘을 업고 탐사에 나선 저자와는 달리 고리드족인 데르수는 문명세계와는 무관해 보이는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가 들려주는 산천의 대지나 하늘과 온갖 동식물들에 관한 지식은 바로 그의 삶 자체가 증거해주는 지혜였던 것이며, 저자 역시 그런 시선으로 자연을 대하면서 자연의 생명감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그런 자연 속에서 싱싱한 평화를 느낀다. 그건 다름아닌 사람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참된 의미이기도 하였다. 


저자는 지리학자, 지질학자이자 인류학자로서 자연대상만이 아니라 탐사지역 곳곳에 삶의 터전을 일궈내고 살아가는 우데헤족과 러시아정교 구신도들, 그리고 중국인들이나 조선인들의 삶의 모습도 상세히 그려 보여준다. 이들은 문명세계와 완전히 등지고 살지는 않는다. 그 연결통로는 바로 사냥, 특히 검은담비의 사냥을 통해서이다. 그렇기에 여기에도 모피, 금광, 인삼 등등 이미 문명세계의 못된 마수가 뻗쳐 있는 것이다. 데르수 역시 주로 검은담비의 사냥을 하지만, 그의 사냥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정당한 공존이자 나눔의 행위였다. 시력이 갑작스레 약화된 데르수를 하바로프스크의 자기집으로 데려온 저자는 결국 그가 다시 숲으로 돌아가려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와중에 비운의 최후를 맞게 되자 이에 대해 깊은 자책과 후회를 고백하는 결말부에서는 문명세계의 비정하고 야박한 모습이 정말 가슴을 후려치는 듯하다. 


책 날개에 소개된 작가의 약력을 보면 그와 그의 가족도 역시 스딸린 체제의 희생자였다. 누군가는 구소련이 해체되고 난 후, "역사가들이 소련과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대해 부검을 실시한다면, ''생태계 살해로 인한 사망''이라는 결론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을 본 적이 있지만, 소설을 읽고 나서 언젠가 뻬레스뜨로이까 시기에 읽었던 아이뜨마또프의 소설들 생각도 났다. 시베리아의 늑대나 중앙아시아의 낙타의 삶을 소설화한 그런 러시아문학의 생태적 전통도 결국 아르세니에프로부터 이어내려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탐사가 진행된 1906년이면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한 직후였고 만주와 조선을 비롯한 극동정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시기였는데, 저자는 이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탐사지역의 실상을 가감없이 본 그대로 서술하였다. 


특히 이중에 이미 19세기 중반경에 조선인들이 이 지역까지 진출해 있었다는 사실(184쪽)과 "조선인의 삶은 한마디로 약탈과 착취다."(181쪽)라는 언급은 기울어가는 나라의 반영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하며 또 이후 의병이나 독립군의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모로 자료적 가치가 있을 것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호랑이와 가장 가까운 시베리아 호랑이 ''암바''의 이야기는 얼마 전 국내 텔레비전에서도 다큐멘터리로 소개가 된 적이 있었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장면들도 과연 긴장된 흥미를 더해준다. 무난한 번역에다, 앞에 고리끼의 서문이나 지도까지 넣은 꼼꼼한 편집도 좋았다. 하지만 지도는 많은 도움이 되긴 했어도 정확하거나 더 자세하지는 못했고, <옮긴이의 말> 등 책의 어디에서도 번역의 대본이 된 텍스트를 소개해주지 않아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럴 수가! 


책을 읽고 나서 우연찮게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1974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를 보았다. 애초 그렇게 보지 말아야 하는 건데, 정말 별 감흥이 없었다. 다만 ''암바''(호랑이)와 마주치는 대목에서 실제 호랑이가 나와서 실감이 났다는 정도. 거센 폭풍우나 눈보라, 적막 속의 강가의 아침, 산등성이에서 조망하는 화창한 해안지대의 웅장한 풍경 등등 영화로서 장점으로 살려볼 만한 장면에도 끝내 인색했다. 소설 이전에 저자가 썼던 탐사기를 참조했는지는 몰라도 영화의 도입부에는 데르수를 만나게 되는 장면과 항카 호수의 탐사 때 겪는 눈보라 속의 야영 장면이 길게 자리를 잡는다. 영화의 진행이 몇몇 일화를 엮어 스토리를 이어가는 단순한 방식이어서 문제다 싶기도 했다. 후반부에서 특히 데르수가 눈이 나빠지고 저자에게 자발적으로 의존적이게 되었다는 식의 과장된 해석은 데르수의 이미지에 결정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었다 여겨지기도 했다.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데르수를 연기한 사람이 작은 키에 오다리인데다가 촐싹거리며 잰 몸동작을 보이는 것은 그에 대한 경이감보다는 탐사대장의 시종쯤 된다는 이미지를 더 심어줬다. 작품에서 보이는 중후함과 점잖음을 지닌 ''위대한 영혼''이라는 느낌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못내 아쉬움과 실망감을 주고 말았다. 그런 영화라면 소설만으로도 족하다! 장마가 끝나고 한여름 더위가 시작되는 이제, 다시 데르수 우잘라가 그리워진다.

[인상깊은구절]
○. "자연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막 잠에서 깨어나 새벽과 더불어 잠깐의 휴식을 즐길 때, 그 평화로운 정적이다."(241-2쪽) 

○. "해변을 적시는 파도소리와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은 바위, 산들의 굳은 침묵과 이를 지켜보는 숲. 이것이야말로 자연이며 생명이다."(274쪽) 

○. "이토록 순수한 야생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바라던 빛이었다."(31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