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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수 우잘라 -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2006년 다른 곳에 썼던 리뷰가 생각나서 여기에 옮긴다)
이 소설(1923년 발표)은 원래 20세기 초 극동 시베리아의 우수리강 동편, 시호테 알린 산맥의 연해지방을 탐사했던 사실을 기록한 탐사기로서 일종의 르뽀문학인 셈이다. 저자 아르세니에프는 탐사대장으로서 원주민 길안내자로 고용한 데르수 노인(당시 58세)과 지낸 반 년 간의 기록을 통해서 야생의 자연인인 데르수와 영혼을 울리는 깊은 우정을 맺게 되고 또한 그가 들려주는 자연에 대한 가르침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저자는 책 앞에 소개된 고리끼의 편지에서도 지적이 있다시피 ''풍부한 자연묘사와 특유의 표현력''을 지닌 서정성 높은 작가였기에, 이 소설이 단순한 과학적 사실기록의 탐사기를 넘어 ''위대한 영혼''의 삶을 형상화한 소설로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문명의 힘을 업고 탐사에 나선 저자와는 달리 고리드족인 데르수는 문명세계와는 무관해 보이는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가 들려주는 산천의 대지나 하늘과 온갖 동식물들에 관한 지식은 바로 그의 삶 자체가 증거해주는 지혜였던 것이며, 저자 역시 그런 시선으로 자연을 대하면서 자연의 생명감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그런 자연 속에서 싱싱한 평화를 느낀다. 그건 다름아닌 사람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참된 의미이기도 하였다.
저자는 지리학자, 지질학자이자 인류학자로서 자연대상만이 아니라 탐사지역 곳곳에 삶의 터전을 일궈내고 살아가는 우데헤족과 러시아정교 구신도들, 그리고 중국인들이나 조선인들의 삶의 모습도 상세히 그려 보여준다. 이들은 문명세계와 완전히 등지고 살지는 않는다. 그 연결통로는 바로 사냥, 특히 검은담비의 사냥을 통해서이다. 그렇기에 여기에도 모피, 금광, 인삼 등등 이미 문명세계의 못된 마수가 뻗쳐 있는 것이다. 데르수 역시 주로 검은담비의 사냥을 하지만, 그의 사냥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정당한 공존이자 나눔의 행위였다. 시력이 갑작스레 약화된 데르수를 하바로프스크의 자기집으로 데려온 저자는 결국 그가 다시 숲으로 돌아가려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와중에 비운의 최후를 맞게 되자 이에 대해 깊은 자책과 후회를 고백하는 결말부에서는 문명세계의 비정하고 야박한 모습이 정말 가슴을 후려치는 듯하다.
책 날개에 소개된 작가의 약력을 보면 그와 그의 가족도 역시 스딸린 체제의 희생자였다. 누군가는 구소련이 해체되고 난 후, "역사가들이 소련과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대해 부검을 실시한다면, ''생태계 살해로 인한 사망''이라는 결론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을 본 적이 있지만, 소설을 읽고 나서 언젠가 뻬레스뜨로이까 시기에 읽었던 아이뜨마또프의 소설들 생각도 났다. 시베리아의 늑대나 중앙아시아의 낙타의 삶을 소설화한 그런 러시아문학의 생태적 전통도 결국 아르세니에프로부터 이어내려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탐사가 진행된 1906년이면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한 직후였고 만주와 조선을 비롯한 극동정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시기였는데, 저자는 이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탐사지역의 실상을 가감없이 본 그대로 서술하였다.
특히 이중에 이미 19세기 중반경에 조선인들이 이 지역까지 진출해 있었다는 사실(184쪽)과 "조선인의 삶은 한마디로 약탈과 착취다."(181쪽)라는 언급은 기울어가는 나라의 반영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하며 또 이후 의병이나 독립군의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모로 자료적 가치가 있을 것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호랑이와 가장 가까운 시베리아 호랑이 ''암바''의 이야기는 얼마 전 국내 텔레비전에서도 다큐멘터리로 소개가 된 적이 있었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장면들도 과연 긴장된 흥미를 더해준다. 무난한 번역에다, 앞에 고리끼의 서문이나 지도까지 넣은 꼼꼼한 편집도 좋았다. 하지만 지도는 많은 도움이 되긴 했어도 정확하거나 더 자세하지는 못했고, <옮긴이의 말> 등 책의 어디에서도 번역의 대본이 된 텍스트를 소개해주지 않아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럴 수가!
책을 읽고 나서 우연찮게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1974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를 보았다. 애초 그렇게 보지 말아야 하는 건데, 정말 별 감흥이 없었다. 다만 ''암바''(호랑이)와 마주치는 대목에서 실제 호랑이가 나와서 실감이 났다는 정도. 거센 폭풍우나 눈보라, 적막 속의 강가의 아침, 산등성이에서 조망하는 화창한 해안지대의 웅장한 풍경 등등 영화로서 장점으로 살려볼 만한 장면에도 끝내 인색했다. 소설 이전에 저자가 썼던 탐사기를 참조했는지는 몰라도 영화의 도입부에는 데르수를 만나게 되는 장면과 항카 호수의 탐사 때 겪는 눈보라 속의 야영 장면이 길게 자리를 잡는다. 영화의 진행이 몇몇 일화를 엮어 스토리를 이어가는 단순한 방식이어서 문제다 싶기도 했다. 후반부에서 특히 데르수가 눈이 나빠지고 저자에게 자발적으로 의존적이게 되었다는 식의 과장된 해석은 데르수의 이미지에 결정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었다 여겨지기도 했다.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데르수를 연기한 사람이 작은 키에 오다리인데다가 촐싹거리며 잰 몸동작을 보이는 것은 그에 대한 경이감보다는 탐사대장의 시종쯤 된다는 이미지를 더 심어줬다. 작품에서 보이는 중후함과 점잖음을 지닌 ''위대한 영혼''이라는 느낌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못내 아쉬움과 실망감을 주고 말았다. 그런 영화라면 소설만으로도 족하다! 장마가 끝나고 한여름 더위가 시작되는 이제, 다시 데르수 우잘라가 그리워진다.
[인상깊은구절]
○. "자연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막 잠에서 깨어나 새벽과 더불어 잠깐의 휴식을 즐길 때, 그 평화로운 정적이다."(241-2쪽)
○. "해변을 적시는 파도소리와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은 바위, 산들의 굳은 침묵과 이를 지켜보는 숲. 이것이야말로 자연이며 생명이다."(274쪽)
○. "이토록 순수한 야생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바라던 빛이었다."(3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