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의 역사 - 침묵과 고립에 맞서 빼앗긴 몸을 되찾는 투쟁의 연대기
킴 닐슨 지음, 김승섭 옮김 / 동아시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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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열심히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커다란 행운이다. 장애를 중심으로 미국의 역사를 다시 바라보는 일. 배제되었던 인물들을 역사의 한가운데에 가져다 놓는 일.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여러 언어를 배웠고, 나의 무지를 돌아보았으며, 자각하지 못했던 편견이 깨어지며 내 영혼의 외연이 확장되는 순간들을 경험했다. 정치적 올바름에 관심이 있지만 무엇부터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서이자 교양서가 아닐까?

킴 닐슨은 페미니스트이자 장애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다. 그런 그가 주목한 역사 속의 ‘장애’라는 개념은 생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틀린 줄도 모르고 장애를 정지된, 더 이상 변하지 않는, 일관적이고 신체에 국한된 상태로 관념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자 나의 짧은 식견이 부끄러워졌다. 지정학을 배우며, 젠더를 공부하며,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며 수없이 말했던 논리의 반복이 아닌가. 그 모든 관념들이 정지해 있지 않듯이 장애 또한 그렇다. 장애는 몸과 정신의 상태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가 장애를 정의하는 범주와 기준은 지금도 변하고 있다. 우리는 맹인, 농인, 발달장애인 등의 분류를 넘어서야 한다. 특정한 장애의 형태를 뭉뚱그리지는 말이 아니다. 우리를 속이고 장애의 다양성과 유동성을 배제하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버리자는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작가가 비장애중심주의를 이야기하며 인종, 젠더, 계급, 경제적 상황에 대한 논의를 빼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의 분석은 한층 유의미하다.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라도 자신이 처한 사회적 조건에 따라 그 경험은 천차만별이다. 우리는 우리의 다양한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름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놀라웠던 건, 인종주의와 성차별로 얼룩진 장애의 역사를 되짚으며 장애와 성별, 인종이 각각의 독립된 요인으로 작용해 차별을 가속화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여성이라는 열등하게 여겨지던 성별, 백인에 비해 미개하게 취급되던 유색인종. 그 모든 정체성이 이 사회에서는 장애 그 자체였다. 우리가 서로의 다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면서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결국 우리는 타인을 배제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은 수도 없이 많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도 흘러넘치지만. 전부 담을 수 없으니 책을 강력히 권하며 글을 마친다. 만약 당신이 책을 읽기 전의 나처럼 전문적으로 정치 이론에 대해 공부해본 적이 없다면. 하지만 그런 당신도 사회적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겠다는 의무감이 들기 시작했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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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 드럭스 - 인류의 역사를 바꾼 가장 지적인 약 이야기
토머스 헤이거 지음, 양병찬 옮김 / 동아시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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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약 산업계에서 일하게 된다면 높은 확률로 제약 회사에 취직하게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토머스 헤이거의 「텐 드럭스」는 내게 아주 좋은 과학 교양서였다. 어떤 면에서는 인문사회 교양서로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약물에 대한 생화학적인 배경 지식은 갖고 있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역사적인 사건과 그들이 불러온 사회적 파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토머스 헤이거는 세상을 바꿔놓은 영향력 있는 약물들과 그 역사를 훌륭하게 간추려 소개하고, 더 나아가 제약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통찰력 있게 성찰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업계 종사자들에게 그가 건네는 충고이기도 하겠다.


책은 십여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아편유도체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의 약학은 아편의 부작용과 중독성은 없애고, 진통제로서의 효능만 갖춘 약물을 개발하려는 시도로부터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약물도 순기능만을 가질 수는 없기에 인류는 자꾸만 아편유도체의 수를 늘려가고,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약물과의 전쟁을 치르는 중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마약이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지는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마약이 다른 범죄와 비교했을 때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는 약물과 거리가 멀고, 그 중독성과 금단 증상이 개인과 사회를 어떻게 망치는지 실제로 목격한 적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물 중독을 뿌리뽑기 위한 투쟁의 역사를 알고 나니 확실하게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사회가 약물 중독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아편유도체들 말고, 중독성 없이 세상을 구한 약물들도 인상 깊었다. 설파제와 피임약에 얽힌 이야기가 그랬다. 설파제는 페니실린 이전의 항생제로, 전장의 참혹함을 목격한 연구자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 낸 약물이다. 피임약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삶을 영위할 기회를 주었다. 두 약물은 모두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삶을 구하고 있다. 


생명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큰 울림을 받았던 건 단연 단일클론항체를 개발한 쾰러와 밀스테인의 이야기였다. 그들의 우정이 부러웠고, 선한 마음에 먹먹해졌다. 나 역시 과학은 밀스테인이 지향한 방식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믿기에 그 마음을 저버린 사람들이 너무 미웠다. 이 일화에 덧붙여 현재 제약 산업계에 팽배한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한 저자의 비판에도 크게 공감했다. 약물과 산업, 그리고 인간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에 수긍할 수 있었기에 독서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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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폭스 갬빗 - 나인폭스 갬빗 3부작
이윤하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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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진입 장벽이 있다. 두께, 그리고 세계관. 그렇지만 한 번 흐름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장벽이었던 것들은 어느새 매력이 된다. 아직 책이 많이 남았다니, 두 권이나 더 번역될 예정이라니! 두툼한 분량에 감사하게 되고, 생소해서 어려웠던 세계관은 소설 속 세계에 깊이를 불어넣는다. 책의 첫 챕터를 읽다가 쏟아지는 낯선 이름과 수학적 용어에 당황하신 분들이라면 아래의 가이드를 꼭 읽어보면 좋겠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수학적인 개념을 전부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런 지식이 없어도 큰 그림만 파악한다면 책의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국내 SF 작가들을 통해서 SF에 입문한 터라 이렇게 본격적인 장편 스페이스 오페라를 읽은 건 처음이었다. 크고 장엄한 스케일의 세계관이 펼쳐지는 소설은 초등학생 때 읽었던 해리포터 시리즈, 황금 나침반, 율리시스 무어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들마저도 배경이 우주는 아니었다. 「나인폭스 갬빗」은 <제국의 기계> 3부작의 첫 번째 책으로, 이단 세력에 맞서기 위해 위험한 도박을 택한 켈 체리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역법이 물리 법칙을 지배하는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역법을 믿으면 적용되는 물리 법칙이 달라지게 된다. 역법의 힘은 구성원들의 신뢰도에 영향을 받기에 육두 정부는 이단 세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전략적 요충지인 요새를 이단들에게 점령당한 상태다. 이단 역법의 영향력 하에 놓인 요새에서는 육두 정부의 이능력 역법이 힘을 쓸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체리스는 그녀의 뛰어난 수학 능력과 기지를 눈여겨 본 이들에 의해 작전에 투입된다.

소설 속 세계는 많은 부분이 흥미롭다. 우선 작중에는 한국적인 정취가 조금씩 묻어난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식단은 상당히 한국적이다. 고사리 반찬, 양배추 절임이라고 번역된 김치, 식후 귤 같은 간식들까지. 또한 체리스는 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뛰어난 지략가이자 잔악한 학살자였던 제다오 장군의 영혼과 결합한다. 그가 속한 분파 슈오스의 문장이 여우인 것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익숙한 구미호가 제다오의 문장이었다. 내가 아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작품들에는 한국은커녕 동양인이 등장이라도 하면, 그리고 그게 오리엔탈리즘을 강화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는데 사소한 설정에서 익숙한 것들이 보이니 기분이 묘했다. 이걸 읽는 세계의 독자들은 신기했겠지?

그리고 진정한 우주 시대답게, 인물들의 행적이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우주 전쟁을 배경으로 한 SF 작품에서 이렇게 많은 여성 인물이 등장해 호승심에 불타고 지략을 펼치며 활동하는 이야기는 많이 보지 못했다. 주인공 체리스는 여성이면서, 뛰어난 수학자이고, 자신이 속한 분파인 켈의 군대적 위계에 순응하고 충성하는 인물이다. 성별이분법적인 문법에서 탈피해서 인물 하나하나의 특성에 집중할 수 있는 이야기였기에 등장인물들의 매력이 한층 더 두드러졌다.

이제 겨우 1부의 이야기가 마무리 된 시점이기에 자세한 줄거리에 대한 설명은 조금 아껴두겠다. 하지만 1부의 끝에서 체리스가 보여준 성장이 2부와 3부에서 어떻게 이어질지 몹시 궁금하다. 처음 몇 장을 꿋꿋이 읽어나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니, 이전과는 다른 스페이스 오페라에 매료되고 싶다면 꼭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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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하늘 빨간지구 - 기후변화와 인류세, 지구시스템에 관한 통합적 논의
조천호 지음 / 동아시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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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건 부끄럽지만 몇 년 되지 않았다. 이건 도무지 십 대 시절에 환경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틈을 주지 않은 정규 교육 탓도 크다. 초등학생 때는 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 물 부족 같은 주제에 대해 학기에 몇 번 정도 배우는 시간이 있었던 기억이다. 그러나 그런 위기 의식은 매년 같은 발표 자료와 수치에 점점 무뎌져 갔다. 5년 전에도 30년 후 석유 고갈이었는데, 5년 후에도 30년 후 석유 고갈이라고 하니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는 그런 의무적인 환경 교육 시수조차 줄어들었고, 고등학교에서는 입시에 매진하느라 다른 어떤 의제에도 마음을 쏟을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정말 많은 대한민국의 학생들에게 해당되는 상황일 것이다.

대학교에 진학한 뒤 나 너머의 것들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을 때, 그제서야 도처에 널려 있던 시스템의 병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많은 것이 엉망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절망적이었던 건 환경 문제였다. 트럼프가 파리 협약에서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무렵이었다. 기어이 인류는 최악을 향해 가고 있는 듯했다. 이러한 지구적 위기 상황에 조천호의 「파란 하늘 빨간 지구」는 지구인 필독서가 아닐까? 나처럼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이제 막 자각한 사람들에게도, 혹은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책을 읽으면서 느꼈다. 정말 맞는 말만 하는 책이구나. 매 문장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저자는 과학적인 지식과 인문사회적인 가치와 시사점을 적절하게 엮어 독자에게 소개한다. 학생 때 지구과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그래서 이게 내 인생이랑 무슨 상관인데?', '내가 이걸 배워서 대체 어디에 써 먹을 수 있는데?' 하는 괴리감이 하나둘씩 해소되어 갔다. 책을 읽기 전 내게 지구과학은 지루하고, 어렵고, 지나치게 광범위한 학문이었다. 이 책을 읽으니 내가 배웠던 현상들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이 책이 있었다면 절대로 내가 배우는 것들을 우습게 여기고 지나가지 않았을 텐데. 지구과학이라는 학문이 가진 사회적인 의의를 발견하고, 환경 문제 전반에도 큰 흥미를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더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다.

또한 저자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면서도, 인류의 미래를 비관하거나 패배적인 관점을 내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변화가 반드시 특정한 결과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라며, 아직 인류에게는 인류의 몫이 남았음을 상기시킨다. 기후 우울증(climate grief)이라는 개념을 아는가? 기후 문제에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큰 무력감을 느끼고 좌절하는 일을 뜻한다고 한다. 나 역시 이런 무력감과 회의감을 느낀다. 지금도 마음 한 편으로는 인류 멸종은 업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은, 아직 세상을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한 청소년들에게는 무슨 죄가 있지? 이대로 기성 세대가 망쳐 놓은 지구에서 무력하게 예정된 끝을 받아들여야 하나? 민음사의 잡지 릿터 24호 <How dare you?>에 실린 청소년 기후 운동가들의 인터뷰를 읽으며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세대를 떠나 하나의 지구에 살아가는 인류로서 우리는 함께 노력해야 한다. 저자는 그 점을 끊임없이 되새겨주며, 있는 줄도 몰랐던 희망을 손에 쥐여준다. 책을 다 읽은 뒤에는 그만큼의 용기가 생겨 있었다.


이것을 이상이라고 치부하면, 현실의 모든 제약이 ‘지금 이곳‘을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곳으로 전락시킬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는 가치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우리 스스로 냉소로 상황을 견디게 됩니다.

이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현실은 벽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 모두를 살리게 될 겁니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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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이 부른다 - 해양과학자의 남극 해저 탐사기
박숭현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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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마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하게 될 생명과학과 대학생이다. 같은 이공계열이지만 공대에 비해 자연과학대는 학생 수가 적고, 재정도 넉넉하지 않으며, 졸업 후 학계 밖의 선택지도 많지 않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생명과학과는 취업의 문이 참 좁은 축에 속하는데, 그런 탓인지 과 친구들끼리 만나게 되면 생명과학은 마이너 중의 마이너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곤 한다.

일단은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지만, 랩에 출근을 하면서도 불안정한 미래에 대해 걱정이 많아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나 하나 먹여 살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서른을 넘기고도 '박사 디펜스...! 조금만 더...!' 하는 학생 신분이면 어쩌나. 연구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이 자꾸 서늘하게 목덜미를 붙잡는다. 과연 나 같은 우주 먼지가 학계에 남아 성공적인 커리어를 가질 수 있을까? 나는 아무 것도 믿지 못하고 흔들리는데, 망설임 없이 아카데미아를 선택하고 뛰어드는 몇몇 친구들을 보면 부러우면서도 경이롭다.

그런 의미에서 박숭현 박사님이 자신의 연구 경험을 글로 옮긴 「남극이 부른다」는 먼 곳으로부터 전해 온 용기 같았다. 이 책에는 대학원생 시절, 해양과학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모든 불확실을 딛고 망망대해로 떠나, 세계적인 해양과학자가 돌아온 박숭현 박사님의 연대기가 담겨 있다. 생명과학 못지 않은, 아니 어쩌면 더더욱 인지도가 낮은 해양과학이라는 학문에 자신의 일생을 걸고 뛰어든 사람.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나에게 물결처럼 용기를 가져다 주었다.


책의 1, 2, 3장은 연구 경험과 여러 가지 일화를 다루고 있고, 4장은 지구과학에 대한 지식을 알려준다. 4장을 읽을 때는 꼭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서 지구과학을 공부하는 기분이 들어 감회가 새로웠다. 연구가 점점 진행되고 경력이 쌓이면서 멋진 발견을 해 나가는 박사님의 모습도 멋있었지만, 내게 가장 큰 위로와 공감이 되었던 건 역시 1장이다. 비주류를 연구하는 일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또 랭뮤어 교수의 일화를 보며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분야도 파고들다 보면 흥미롭기도 한 일이니, 미리부터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나를 꾸준히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겠다고. 미리 하는 결심은 이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각본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인간적 난관과 자연적 난관이 우발적으로 다가올 때마다

이를 헤쳐나가고자 하는 의지와 인내 그리고 행운이 있었을 따름이다.

박숭현, 남극이 부른다, p.155


목적, 의지, 인내, 행운. 악화된 해황 속에서도 극적으로 탐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일에 대한 회상이 그려진 부분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행운은 준비된 자가 기회를 붙잡는 순간의 다른 말이라고 느꼈다. 좋은 연구를 하는 사람은 많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마침 아라온호가 건조 중이고, 그 쓸모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때가 왔을 때, 그때의 자신에게 늦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두는 사람이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내가 많이 자랐다는 걸 느끼기도 했다. 예전에는 그저 멋있어 보이기만 했던 사람들과 일화에서 애환을 느끼게 되다니. 남들이 열심히 사는 이야기는 나를 벅차오르게 만든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데서 오는 유익함을 넘어서서, 과학을 하며 가져야 할 태도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어떤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든, 이 책은 분명히 잔잔한 감동과 즐거움이 되어 줄 것이다.


물론 각본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인간적 난관과 자연적 난관이 우발적으로 다가올 때마다

이를 헤쳐나가고자 하는 의지와 인내 그리고 행운이 있었을 따름이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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