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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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의 사회, 문화, 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이길보라 감독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직접 감상한 적 없는 나마저도 어디에서나 그의 이름을 많이 봐 왔으니까. 이길보라는 스스로를 아티비스트(artist+activist)로 정의한 예술가이자 활동가다. 로드스쿨러이자 코다(Children of Deaf Adult)로서의 정체성을 영화에 녹여내고,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그런 그의 삶과 시선이 담긴 첫 사회비평집 <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읽게 되었다. 이름만 알고 있었던 이길보라를 나는 이 책으로 처음 접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코다라는 단어가 있는 줄도 몰랐다. 청인으로 태어나 청인 중심 사회에서 살아온 나는 한 번도 농인의 청인 자녀라는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길보라 작가의 모어는 한국어가 아닌 수어였고, 그는 풍성한 농문화 속에서 자라났다. 그런 그가 지적하는 청인 중심 사회의 문제점은 내가 전혀 자각하지 못했던 것들이었고, 그렇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나름 관련 의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가시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세상이 이렇게 많으니 도무지 나 하나만으로는 이 부조리를 타파할 수 없음이 더욱 선명해졌다. 책을 읽으며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연대하는 일의 중요성을 내내 곱씹게 되었다.







이길보라 작가는 여성 의제에도 꾸준한 목소리를 내오던 사람이다. 그는 그가 여성으로서 살아오며 겪은 차별을, 여성의 경험이기에 묵살되고 마는 이야기를 지면에 거침없이 풀어놓는다. 생활 속의 교묘하고 직접적인 차별에서부터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며 마주한 구조의 병폐, 임신중절 경험과 여성의 성욕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가 그 모든 것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기 위해 목소리를 냈던 순간들은 책을 덮은 지금도 마음속에서 반짝이고 있다. 정말이지 책의 제목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이길보라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움츠러들지 말고 더 많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계속해서 서로를 이어 말해야 한다고.







책에는 그가 영화감독으로서 창작에 대해 고찰하고 사유한 경험도 실려 있다. 그가 아티비스트로서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창작론을 다룬 부분이 무척 흥미로웠다. 어렸을 때 그는 NGO 활동가이자 영화를 찍는 프로듀서가 되고 싶었고, 이 두 꿈은 사실 그에게 하나였다.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그의 경험을 토대로 왜 질문에 답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지, 실패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알려주는지를 이야기한다. 몰입하며 읽었고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이길보라의 멋진 친구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소개해 준 것도 좋았다. 어딘글방의 아웃풋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이런 사람들이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니, 앞으로 만날 그들의 작품이 너무 기대된다.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영영 몰랐을지도 모르는 삶의 모습을 알게 되다니. 정말이지 귀한 경험이었다. 이길보라의 영화 <반짝이는 박수소리>와 <기억의 전쟁>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렇게 멋진 신념을 가진 사람이 만든 영화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길보라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누군가를 이어 내가 말했듯 나를 이어 당신도 말하고 글 쓰고 외칠 수 있게 되기를.” 나보다 앞선 사람이 이렇게 말해주는 건 정말이지 큰 용기를 준다. 우리가 꼭 지고 있는 것 같을 때, 도무지 아무 것도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 당신이 이 책을 꼭 읽었으면 한다. 새로운 물결을 만들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어주었으면 한다. 내가 어딘가의 당신을 이어 말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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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파 - 2018년 제3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박해울 지음 / 허블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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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 만든 1인칭 어드벤처 스토리 게임을 플레이한 기분이었다. 소행성과 충돌해 난파 당한 우주 크루즈 오르카 호, 그곳에서 홀로 살아남아 정체불명의 외계 바이러스와 싸우는 '기파'라는 의사. 플레이어 '충담'은 그를 구출하여 지구로 돌아와야 한다. 그가 기파를 무사히 지구로 송환한다면, 그 대가로 그의 딸이 심장 수술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은 그렇게 시작되고, 충담이 기파를 추적하면서 오르카 호와 기파에 얽힌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정말 SF 게임이 만들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웅장해질 텐데....


이 소설은 다양한 종류의 로봇이 상용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책의 149쪽에 그 시대에 대한 설명이 잘 적혀 있다. 로봇의 상용화가 만들어 낸 새로운 형태의 신분제가 기존의 계급 체계를 대체했을 뿐, 모두가 편안한 삶을 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기계를 하대하고, 기계가 섞이지 않은 온전한 인간은 사이보그화 된 인간을 차별한다. 온전한 인간을 고용하여 부릴 수 있는 온전한 인간이 진정한 부자로 추앙받는 시대에 충담은 하반신이 기계인 사이보그 인간이다.


충담 자신도 사이보그지만, 그의 딸 연이도 기계 심장을 가진 사이보그다. 그들 가족이 기계에 의존하여 살아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율 주행 자동차의 인공지능이 내린 판단 때문이었다. 그의 일가족이 탄 차와 버스가 충돌하기 직전, 각각의 차량에 탑재되어 있던 인공지능은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를 구하기로 합의한다. 그 판단 때문에 충담의 아내는 죽고, 충담의 하반신은 으스러졌으며 연이는 기계 심장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다. 이처럼 충담은 기계 문명에 증오심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그가 오르카 호의 성자 기파를 찾아 떠나게 된 것은 우연이다. 연이의 기계 심장을 생체 심장으로 대체하거나 최소한 기계 심장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수술비를 벌기 위해서라도 충담은 고물 우주선으로 우주 택배를 배달하는 일을 한다. 어느 날 그가 맡은 택배가 도난 사건에 휘말려 충담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소행성대까지 먼 여정을 떠난다. 끝내 도둑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대신 소행성대에 난파된 오르카 호를 발견한다. 지구에서 기파는 난파된 오르카 호에서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싸우고 있는 의사로 알려져 있다. 기파의 이름을 내건 기파복지재단에서는 그를 찾아 무사히 지구로 송환하는 이에게 어마어마한 보상을 약속한 바 있다. 충담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오르카 호에 접근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포함)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충담이 된 기분이었다. 충담이 되어 외계 바이러스가 창궐해 폐허가 된 호화 크루즈 선에 승선하고, 알 수 없는 인기척을 느끼고, 생존자를 발견해 협력하며 우주선의 곳곳을 조사한 것 같다. 작가가 이 배경을 설정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 것이 느껴졌다. 단서를 하나씩 모으고,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호감도를 높이고, 숨겨진 장소를 찾아내는 모든 과정이 정말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 줄거리와 배경이 정말 게임으로 구현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지 감탄하며 읽었다.


충담이 발견한 생존자인 아누타라는 인물이 이 이야기의 진행에 기여한 바도 빼놓을 수 없다. 아누타는 완벽한 인간 승무원만이 서비스를 책임지는 오르카 호에서 그림자처럼 생활하며 각종 잡일을 처리하던 섀도 크루의 일원이다. 그녀는 기계 의안을 갖고 있었기에 매우 뛰어난 가상 영상 제작자임에도 불구하고 섀도 크루로 일해야 했다. 하지만 아누타가 섀도 크루로 일하며 섭렵한 선체의 비밀 통로와 비밀 공간들에 대한 지식과 기파의 동료 의사였던 이언과 나누었던 유대감은 이야기의 진행에 중요한 열쇠가 된다.


아누타와 충담은 둘 모두 완벽한 인간이 아니지만 기파의 진실과 마주하고 두 인물이 갖는 태도는 정반대다. 성자로 추앙받던 기파라는 인간은 사실 인간보다 우월하고 완벽한 이언이라는 로봇의 존재에 겁을 먹었던 사람이었다. 기파의 업적으로 전해져 칭송받던 모든 일은 사실 이언이 죽음으로 도망친 기파를 대신해 해냈던 것이다. 아누타는 꿋꿋한 사명감을 보여준, 이미 인간과 다름 없는 그를 받아들인다. 이언은 자신의 기계 의안을 비웃지 않았던 선내의 유일한 승무원이었고, 그와 함께 우주를 바라본 밤이 아누타의 기억 속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충담은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언이라는 로봇이 승선 후 여러 번 위기에 처했던 자신과 모두를 구한 진짜 성자임을 인지하면서도. 지구에서 추앙받는 기파의 미담이 전부 거짓이라는 것에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도. 기파재단에서 요구한 대로 기파의 행세를 하는 이언을 사살해야만 한다고, 그가 결국 로봇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연이의 수술을 떠올리며 자신을 계속해서 설득한다. 이언이 스스로를 파괴하기 직전, 충담과 나눈 대화에서 충담은 이 모든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택했다는 죄책감이 자신을 평생 따라다닐 것을 예감한다.


하지만 나는 충담을 탓할 수 없었다. 그는 인간이니까. 그 또한 시대의 피해자이니까. 나 또한 결과적으로는 충담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과정은 좀 더 온건할 수 있었겠지만, 결국 나는 기파의 시신을 찾고 이언을 폐기한 뒤 지구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연이의 가슴 속에서 뛰는 생체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연일 보도되곤 하는 기파재단과 기파의 성과를 들으며 끔찍하게 괴로워했을 것이다. 진실을 밝히기로 마음먹는다 해도 거대하고 힘 있는 재단을 상대로 가난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이언, 충담, 아누타는 모두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완벽한 인간형 로봇, 로봇을 증오하는 사이보그 인간,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뽐낼 수 없었던 사이보그 인간. 그들이 각자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행하는 모습에서 나는 막막해졌다.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인간이 아닌지, 우리는 왜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서로를 착취하게 만들어졌는지. 인간은 대체 자신들이 뭐라고 생각하기에 이렇게까지 오만할 수 있는지. 많은 질문을 하며 읽었고, 그러면서도 결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인간이니까.


아누타와 충담은 둘만의 비밀을 안고 끝끝내 살아갈 것이다. 자신이 목격했던 인간 아닌 것의 이타심과 자신이 행한 인간의 이기심을 곱씹으면서.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이대로도 괜찮은 거겠지? 제발 그렇다고 해 줘."

"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 아마 평생 사라지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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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과 도넛 - 존경과 혐오의 공권력 미국경찰을 말하다
최성규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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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BlackLivesMatter 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큰 이슈가 되었던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해 경찰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던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했다는 사실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 사건 때문에 미국 경찰은 '인종 차별에 기인한 과잉 진압'이라는 이미지로 나에게 처음 각인되었다. 아마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이상 우리나라 경찰의 구조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할 텐데, 하물며 미국 경찰에 대해서는 어떻겠는가.


한 조직의 구조와 문화, 그들만이 공유하는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의학 드라마나 수사 드라마처럼 주변에서 쉽게 보고 들을 수 없는 치열한 일상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TV 시리즈가 흥행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최성규의 「총과 도넛」은 이런 점에서 무척 흥미롭고 유익하다. 저자가 3년 동안 시카고에서 직접 머무르며 관찰하고 조사한 미국 경찰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일화에 기반한 에세이는 아니지만, 미국 경찰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점이 우리나라와 다른지에 대해 책은 꼼꼼히 설명한다.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우리나라와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었다. 땅덩어리의 면적, 인구의 규모와 인종적 구성, 공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 마약과 총기의 합법화 여부까지 모든 면에서 커다란 차이를 느꼈다. 이렇게 다른 사회문화적 배경 위에서 공공 안전을 위한 조직이 만들어진다면 당연히 많은 것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책은 이런 차이점을 하나하나 짚으며 그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미국 경찰이 발전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화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어떤 선진의 기준으로 삼아 무조건적으로 동경하곤 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런 실체 없는 환상이 깨끗하게 정리되었고, 그 현실을 좀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미국의 문화와 맞닿아 발생하는 미국 경찰만의 특수성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미국의 경찰은 부업을 하는 것이 상당히 흔한 일이라고 한다. 제복을 그대로 입고 순찰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학교의 야간 경비를 서는 등의 일에 종사하여 수입을 늘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민원이 발생하고 시민들의 항의가 잇따랐을 것이다. 이런 일이 흔하기 때문에 미국의 경찰들은 승진에 무조건적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거부하기도 한다. 경찰로서의 승진은 부업에서의 인건비 상승을 뜻하는데, 이로 인해 부업에서 실직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약과 총기, 인종 차별이 사회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국가에서 일하는 경찰의 고단함에 대해서도 실감하게 되었다. 마약은 미국 사회에서 너무 흔하기 때문에 완전히 뿌리뽑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그 자체로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차적인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총기 사건은 또 어떤가. 총기 사건에 투입된 경찰들이 심각한 PTSD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알게 되기도 했다. 인종주의는 사회 뿐만 아니라 경찰 조직 내에서도 수많은 병폐를 만들며 비극적인 사건을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두드러지지 않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처하는 경찰의 모습을 보며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도도 조금 더 높아졌다.


내가 소개한 내용은 책의 정말 일부분에 불과하다. 누구보다 책을 명료하게 설명한 저자의 머리말의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미국 경찰을 칭찬하려는 것도 아니고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화면에서 접하는 영화 같은 화려함보다 생활 속에서 접하는 진짜 미국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중략)
30년차 경찰이다 보니 미국 경찰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미국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의 화려함을 보면 부러움과 자극을 받게 되면서도 그 민낯에서 우리가 모르던 우리의 강점을 알게 되어 자신감도 얻었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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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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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내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니기 시작한 때부터 어떻게든 나의 뒤에 오는 이들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 같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주고 싶어서 그애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해 고민하고, 그들이 자라서도 그들의 다음을 위해 고민할 수 있도록 보다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힘썼다. 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했던 것과는 별개로 나의 선의가 소수의 행운아들에게만 닿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는 경제적 여유가 보장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아니라면, 공교육 외의 다양한 교육 현장에 참여할 기회를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니까.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 가족>은 한국의 아동 복지 및 가족 정책 현실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엉망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단순히 수많은 아동 학대 사건을 다루기만 하는 책은 절대 아니다. 책은 압축된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실패한 우리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망가져 가고 있는지를, 공동체의 시작인 가족을 통해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모든 구조적인 문제가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가장 힘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짓누르게 되는지를 분석한다. 사회가 나누어 져야 할 짐을 가정이 전부 떠안은 현재의 우리나라에서는 가족에 대한 논의가 사회 구조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이 책은 저출생, 양극화, 타자 혐오, 아동 학대 같은 사회적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성찰한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돌봄과 양육에 대한 의제는 여성주의 담론에서도 많이 접하게 되는 터라 나는 나름 이 의제에 대해 잘 안다고, 친숙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피상적이기만 한 화를 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나의 경계 안에서만 사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 부끄러워졌다. 나는 임신 중절권에 대해서는 제법 논리적인 주장을 할 줄 알았지만, 출산을 선택한 미혼모가 아이와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하는 상황이 왜 그렇게 많이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대한민국 입양의 절차는 시작부터 사후 관리까지 죄다 엉망진창이고, 해외 입양이 영아 수출이라 비난 받던 이유가 말 그대로 수출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이주 아동이 실질적으로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지원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정상 가족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가 이렇게나 뚜렷하고 직접적인 차별을 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책을 읽으며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조해진 작가의 단순한 진심, 이영애 주연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책을 읽기 전과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결혼도 출산도 마음에서 지운 지 오래다. 하지만 만약 교육과 돌봄의 부담을 국가가 함께 부담했다면, 한국이 적극적인 공공성으로 가족 계획에 개입하여 부모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나라였다면. 어쩌면 나는 언젠가는 좋은 보호자가 되어 아이에게 세상을 알려주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르는데. 나 뿐만이 아니라 어린 사람들의 소중함을 잘 아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가 금전적, 사회적 부담에 쫓기지 않았다면 스웨덴의 가족 정책의 성공적 결과처럼 자발적으로 부모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이었고 내가 모르는 삶이 얼마나 많은지. 강화된 가족주의가 사회와 타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며 낳은 수많은 끔찍한 결과를 책을 통해 알게 될 때마다 물속처럼 막막했다. 이 배타적 가족주의를 극복하고 고통 받는 개인들을 구하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이를 어른과 동일한 한 개인으로 바라보고, 아동 학대로 이어질 수 있는 수많은 위험 요소를 사회 제도적 차원에서 예방하고, 우리 모두의 자율성과 모든 형태의 가족을 존중하는 일. 전통적 가족주의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다름을 받아들이는 일이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아이에서 시작해 아이로 돌아오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를 넓게 둘러본 기분이 든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처럼 결심하기를 바란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나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더 나아가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우겠다’고 마음먹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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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습니까? 믿습니다! - 별자리부터 가짜 뉴스까지 인류와 함께해온 미신의 역사
오후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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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유쾌한 글투와 날카로운 풍자 덕분에 읽는 내내 웃었다. ‘별자리부터 가짜 뉴스까지 인류와 함께해온 미신의 역사’라는 부제 때문에 정말이지 각종 미신에 대한 이야기만 할 줄 알았는데, 나처럼 오해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 미리 일러둔다. 책은 미신의 범위를 상당히 넓게 바라본다. 보편적인 시각에서 말하자면 이 책은 인류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종교, 이념, 사상은 물론 탈진실(post-truth)과 음모론에까지 가닿는다. 분신사바나 오컬트 얘기만이 가득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책은 인류를 가장 크게 도약시킨 미신인 ‘씨앗을 심으면 먹을 것이 그 자리에 자라날 것이다’에서 시작한다. 수렵 채집이라는 확실한 식량 조달 방법을 포기하고, 계절을 꼬박 기다려도 결과가 불확실한 농경을 시작하게 된 건 당시로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농경 사회의 시작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신, 우스운 믿음에 기인한다. 이렇게 바라보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미신이 아닌가?

점성술과 명리학 같은 것들 말고, 세계를 쥐고 흔드는 거대한 종교마저 ‘프랜차이즈 미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점술가처럼 당장의 미래를 점쳐 주지는 않지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내세의 보상인 천국을 약속함으로써 얼레벌레 믿음을 권하는 논리는 같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자본주의는 왜 종교가 아닌가? 우리에게 돈이 가져다 줄 행복을 무조건적으로 약속하는데. 책은 정말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처럼 종교와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작가의 통찰은 특히 빛난다. 작가는 얼핏 보면 절대 하나로 모일 수 없을 것 같은 종교적 원리주의자, 날스괴(FSM), 민주주의, 백신회의론자 등의 주제들을 ‘믿음’이라는 공통점을 중심으로 짜임새 있게 엮어나간다. 거기에는 근현대를 관통하는 사회적 정서가 있다. 이 많은 주제를 재치있게 끌고 나가는 작가의 필력에 탄복하게 된다.

작가의 풍자가 가장 두드러진, 블랙 유머로 나를 시종일관 웃게 만들었던 부분은 책의 후반부다. 미국을 호구의 나라라고 소개하며, 그런 강대국에서 횡행하는 얼토당토 않은 음모론과 가짜 뉴스를 개탄하는 허심탄회한 글이 정말이지 너무 웃겼다. 그리고 웃다가 생각해 보니 웃을 때가 아닌 것까지. 저 사람들 때문에 정말 세계가 망하면 어떡하지. 게다가 우리나라라고 크게 다르겠는가…. 스케일은 더 작아서 그 파급력이 미국만큼 거대하지는 않지만,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우리는 어디에나 있는걸.

뉴스의 권위는 사라지고 대안적 진실이 팽배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런 요지경 같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 게 정신 건강에 조금이라도 더 이로울지. 이 책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엄청난 재치와 통찰과 함께. 인류를 이곳까지 이끌어 온 믿음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보길 권한다. 분명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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