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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가며 새로워지는 것들에 대하여
원철 지음 / 불광출판사 / 2021년 6월
평점 :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그 책 덕분에 역사를 전공하게 되었고 역사와 답사는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스님의 답사기. 답사에 혹했고 스님이 쓰신 답사기라는 것에 더 마음이 갔다. 뭔가 내가 모르는 사찰에 대해 소개해 줄 것 같고 비밀스런(?) 절집의 이야기도 들려주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원철스님으로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이시고 대한불교 조계종 연구소장 이시다.
차례는 1. 만남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다시 만남을 만든다, 2. 길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3. 삶은 내가 기억하는 것 보다 더 아름답다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 경기, 충남, 강원, 부산, 중국까지 정말 전국 방방곡곡을 무대로 하며 담백한 수묵화와 함께 곁들여 설명해 주신다. 책을 읽으며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은 전쟁 영웅 사명대사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해인사 사명대사 탑비이다. 예전에 청소년 답사를 진행했을 때 사명대사 유적지를 간 적이 있고 해인사는 장경판전을 보러 몇 번 다녀왔는데 해인사에 사명대사 탑비가 있는 것은 몰랐다. 비석은 반달리즘에 의해 두 번이나 훼손되었지만 1958년 복원했고 비문을 허균이 지었다고 한다. 허균은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이자 허난설의 동생이다. 최명희 작가의 허난설헌을 읽고 인물에 빠져 생가와 유적지를 투어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명대사는 승려의 모습보다 장군의 모습이 많이 부각되어 내부적 힐난을 받으며 사셨는데 대사가 가야산으로 들어오며 ‘사흘동안 벼슬살이 한 것은 임금의 명을 어길 수 없었던 까닭이요, 한밤중에 산으로 돌아온 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릴 수 없어서이다’ 라고 하셨다 한다.
나도 그간 사명대사를 장군으로서만 알고 있었는데 사명대사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책을 통해 알게 되었고 사명대사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산서원의 완락재도 가보고 싶다. 사실 도산서원은 다녀왔는데 완락재는 처음 들어서 그때 나의 답사가 얼마나 수박 겉 핥기 였는지 너무 절실하게 느꼈다. 완락재를 지을 때 정일스님이 머무르시며 일을 하셨는데 숭유억불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유생과 승려가 함께한 공간이라는 것에 의미가 크다고 책은 말한다. 종교를 뛰어넘어선 두 분의 우정과 교감이 너무 감동적인 곳 이었고 다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을 방문해 그분들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 갑절이 있으면 을절도 있다는 제목이 너무 재미있었던 이야기 속의 봉갑사, 봉갑사는 도갑사, 불갑사를 포함해 호남 삼갑으로 불리는데 갑은 으뜸과 최초를 상징하는 것으로 공주 계룡산 갑사는 독보적 갑이라고 한다. 갑사를 20살 학과 답사로 다녀왔는데 역시 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크고 당당한 모습에 위축되었던 기억이 난다.
갑이 있으면 을도 있는 법, 을절은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마애삼존불, 태을암, 은을암 등이 있다. 갑과 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항상 본분을 잊지 말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동네답사이다. 나는 멀리 떠나서 우리 고장에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답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철스님은 동네 구석구석 숨겨진 이야기를 쉽게 풀어주시고 잊혀진 지명에 대해서도 알려주셔서 가보지 않은 동네인데 낯설지 않고 가본 동네처럼 친숙했고 나도 우리 동네에 대해서 깊이 관찰해 보아야겠다 싶었다.
고민되었던 부분도 있었는데 종로거리가 탑골공원에게 진 빚으로 문화유산이란 보존하고 전승해야 할 책임이 따른다. 연등회가 국가 무형 문화재에 등재되고 최근에 유네스코에도 등재가 되었지만 작년 코로나로 인해 행사가 취소되고 연기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고 연등회를 계승하기 위한 노력을 끈임없이 하고 있다. 탑골 공원은 조선시대 연등회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곳으로 원각사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원각사 동종이 종로의 어원이 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원각사가 종로에 전해준 메시지가 얼마나 큰 지 알수 있다. 나역시 사학도로서 항상 문화재의 보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유형, 무형을 가리지 않고 우리가 우리 것을 지켜 후손과 선조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지혜로움은 까칠하지만 자비로움은 부드럽다. 밥할머니에 대해 소개하시며 밥은 단순히 끼니가 아니라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어느 때는 지혜가, 어느 때는 자비가 필요한 우리 사회에서 밥할머니의 가르침은 깊은 여운을 준다. 나도 부지런히 닦아 자비를 갖추고 지혜도 갖춘 인간이 되어야 겠다.
책을 읽는 동안 바랑 하나 매고 뒷 짐 진 스님과 동행하는 것 같았다. 여름 매미 소리가 우거진 날 밀집 모자를 쓰고 천천히 이곳 저곳 돌아다는 기분으로 책을 마주했고 코로나로 답사를 가본지 정말 오래 되었는데 오랜만에 답사의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 스님이 들려주시는 답사라 부처님의 가르침과 인문학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책을 통한 색다른 만남의 시간은 갖게 된 것 같아 즐거웠다. 최태성 작가는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 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쉽고 재미있는 인문학과 역사 서적이 많이 나와서 사람들의 관심이 늘어나기를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연등회와 관련된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 책을 마무리 하고 싶다.
날이 밝도록 이끄는 이를 뒤따라 연꽃 등을 들고서 춤추며 놀고, 하늘 가득한 별들은 휘장 너머 연등 불빛과 얽히면서 더욱 밝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