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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ㅣ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나는 누구인가. 누구나 한 번쯤 던져봤을 법한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는 어떻게 정의되는 가에 대한 물음. 이런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밀란 쿤데라는 이 책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제시한다. 과거와 현재의 정체성 파악의 기준, 우정과 사랑에 의한 정체성의 정의를 자연스레 소설에 녹여 보여주는 쿤데라의 힘은 여느 그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놀라웠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그리고 정체성의 개념은 무엇인가. 총 세 가지 정도로 정체성은 정의된다. 우선 과거에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를 규정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찾았을까? 그 답은 ‘직업’에 있다. 과거 사회에서는 자신의 삶을 바치는 어떤 ‘일’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농부의 정체성과 어부의 정체성은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본인의 직업에서 삶의 의미나 자신 스스로의 연속성을 찾았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런 모습을 포착하기란 여간 쉬운 게 아니다. 본인이 좋아하고 평생을 바쳐 매진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희귀할 정도이다. 현대 사회인들은 본인이 종사하는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러한 직업으로 부터의 정체성 확인의 결핍이 현대인의 불안, 정체성의 혼란의 원인 들 중 하나이다.
정체성이란 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유지하는 어떤 하나의 총체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총체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우정’이다. 왜 우정인가? ‘친구’라는 존재는 ‘나’의 과거에 대해 기억한다. 그것이 비록 내가 오래 전에 잊어버린 기억일지라도 그의 기억 속에서는 선명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그 기억에 대해 ‘나’에게 이야기 해줌으로써 ‘나’는 과거의 ‘나’를 기억할 수 있고, 항상 과거의 이야기를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자아의 총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런 기능은 우정의 부차적인 기능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기능이 주가 되어버렸고, 이를 위해 친구와 우정이 일종의 계약이 되어버렸다고 쿤데라는 소설 속에서 탄식한다.
마지막으로 정체성은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는 개념이다. 타인과 나는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이의 시선’이다.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모든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어떤 사람에겐 단 하나의 존재, 세상의 전부이다. 사랑으로부터의 정체성 확인은 앞선 두 개의 정체성 확인을 모두 포함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을 통해 우린 과거를 추억할 수도 있으며, 그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그가 나의 세성이라 인정함으로 본인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소설 속 여주인공인 샹탈이 낯선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으로의 정체성 확인으로 전환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결국 내가 나일 수 있는, 나의 정체성을 찾고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이다. 쿤데라의 소설들을 읽으며 느끼는 생각이지만 쿤데라의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사랑’이 삶의 근원적인 힘인 듯하다. 그러한 그의 소설 속 생각들과 관점들은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평생을 배회하며,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상대에게 사랑받고, 그의 눈길을 받게 되면 우리는 달라진다. 배회했던 지난날들을 뒤로한 채 곧을 길을 걷게 된다. 사랑은 이렇게 누군가를 하나의 총체적인 인간으로, 정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