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인생수업 - 지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동섭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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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는 화가이다.

그래서 나는 저연스럽게 다양한 그림과
그림책을 자주 읽는다. 이책을 읽으며
그간 내가 몰랐던 고흐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배울수 있어서 너무 의미 있었다.

책을 사랑하는 나는 이책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다짐을 해본다.

한 평생 어머니가 자유로운 자연의 그림에
가치를 부여하듯 나도 본받아 내가 사랑하는
그림과 그림 책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살고 싶다.

내가 사랑한 책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을 삶의
소명으로 삼고 먼 훗날 멋진 공간에 어머니의
그림과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소개하는 공간을
만드는 꿈을 꼭 이룰 수 있도록 노력 해야겠다.

어머니의 그림 계정도 많은 사랑 부탁드리며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좋은 그림 그리실
수 있도록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 🖼️

하나의 그림은 하나의 소중한 시간이다.

아래는 내가 읽은 글중 감명 깊은 구절이다.

✍️ 좋아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좋아하는 것을 할때 느끼는 행복은
잘하는 것을 할 때의 만족감과 비교되지 않는다.

그러니 잘 하는 것을 좋아하면 인생이 편하겠지만,
좋아하는 것을 잘하면 행복하다.

✍️ 열정에 물들다
파리에서 예술을 공부하던 시절, 내게 빈센트 반 고흐는
큰 의문이었다. 그는 무엇으로 서양 미술사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을까? 작품? 그랬다면 미학적 관점과
역사적 판단이 복잡하게 얽혀들었을 텐데, 그는 그 편차를
없애고 그저 '반 고흐'로서 불렸다.
자살한 미치광이 화가? 그림 외적인 것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니 어쩐지 탐탁지 않았다. 그래도 되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화가를 굳이 나까지 좋아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프랜시스 베이컨 등 아끼는 화가들로 인해 몇 번 그와
부딪혔지만 스쳐지나갔다.

그러다 내가 깊이 사랑하는 분의 죽음을 통해 처음으로
빈센트를 '만났다'.

왜 나는 빈센트의 그림을 보며 그분을 애도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찾으러 빈센트의 전생애를 통과하며 묻고 물었다.

자주 오르세 미술관을 찾았고, 그의 삶과 그림을
연결시켜 이해하려 노력했다.

✍️ 빈센트는 무릇 예술가란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개성을 지켜야만 순결하고
고귀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그분의 무엇이
나를 빈센트에게 빠져들게 만들었을까?

내가 찾은 답은 단순했다. 그들은 평생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찾았고, 찾은 후에는 그 일에 목숨까지
걸었다.

열정적으로 살았고, 열정의 그림자인 수난마저
정열적으로 헤치고 넘었다.
그들의 열정에 청춘의 나는 물들고 싶었던 것이다.
열정의 빈칸을 나는 삶의 질문들로 메우고 있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던 허기는 여자의 가슴에 기대어
잊으려 했다.

사랑은 달콤했으나, 나는좋은 연인은 되지 못했다.
빈센트와 그분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인간 빈센트 반
고흐를 꺼내는 이유이다.

오늘의 청춘들과 그의 열정적인 삶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빈센트와 그의 그림에 대한
해설서 이기보다는, 그를 통해 나를 돌아보고 우리를
살펴보기 위한 인문학적 재료라 할 수 있다.

🎨 서른이 다되어 그림을 시작했으면서도 빈센트는
자기만의 그림을 그렸다. 그 길고 외로웠던 과정을
죽는 순간까지 글과 그림으로 꼼꼼히 기록했다.

그것들로 나는 빈센트를 가깝게 느꼈고, 그는 나를
친구처럼 다독여주었다. 그러니 빈센트를 통해 나를
바라보는 시간들은 많이 힘들었으나 크게 유익했다.

내가 빈센트를 선택했으나 그가 나를 성장시켜준 셈이다.
빈센트는 젊어서 죽었다. 그 나이를 지나서도 살아 있음이
자주 부끄러웠다.
내 청춘의 고민과 헤맴을 갈무리하며, 나는 이 책을 썼다.

이동섭, <반고흐 인생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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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포인트 그림감상 - 원 포인트로 시작하는 초간단 그림감상
정민영 지음 / 아트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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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나의 그림 감상법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가 작가님의 그림 감상법에 기초하여
나만의 그림 감상에 좀 더 가치를 발견하길
기원해본다. 아래는 인상 깊은 구절을 필사
해 보았다.

✍️’패스트 감상'에서 '슬로 감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주말에 인사동이나 사간동 등지의 갤러리 순례에
나설 때는, 미리 가이드북을 통해 보고 싶은 전시회
1~2건부터 정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여행지의
정보를 미리 챙기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전시장에 가서 출품작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팸플릿이나 도록을 챙긴다.

다시 근처 커피숍에서 도록을 펼쳐가며 천천히
작품을 재음미한다. 그러다가 전시를 다시 보고
싶거나 한 번 더 보고 싶은 그림이 있으면 전시장을
재방문한다. 이로써 갤러리 순례는 완성된다.
그리고 지나다가 눈에 띈 전시회 관람은 덤이다.

이는 내가 전시장을 다니면서 정한 관람법이다.
정보과잉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라도 충분히 음미 할 시간이다.

'원포인트 그림감상'이 '슬로 감상'인 이유다.

✍️ 먼저 감상포인트부터
미술작품은 감상하지 않으면 나와 무관한 사물과
다를 바 없다. 감상은 작품에 마음을 주는 일이다.
감상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오감을
사용하는 적극적인 사색 행위다.

그렇다면 작품 감상의 포인트로 무엇을 잡아야
할까? 직간접적인 요소들로 나눠볼 수 있다.

직접적인 요소는 소재, 구성, 구도, 색상, 제작방식
(가위질, 점묘, 시점 등) 등이 있고,

간접적인 요소로는 서명, 낙관, 작품명, 작가의 일화,
제작시기 등의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곁다리텍스트를
고려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쉽게 해볼 수 있는 것은 소재에서
감상 포인트를 취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식이 감상의 정답일수는 없다.
감상은 정답 찾기가 아니다. 감상에는 수많은 방식이
있다. '원 포인트 그림감상‘은 하나의 제안이다.

감상자가 사각의 화폭에 펼쳐진 이미지들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향유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를 제안하는 것이다.
감상에 나름의 요령이 생기면 이런 제안은 잊어도
좋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마다의 감상이다.
“예술작품의 가치는 보는 이에게달려 있다.
작품은 관객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힘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스거 요른, 덴마크 출신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그런 만큼 각자 자기 식으로 감상하면 된다.

“그림을 처음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 없이
그저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일 게다.
평론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식은 온전한 작품 감상의
장애가 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 난 다음에
지식의 힘을 빌려 다시 보는 것이 가장 풍성한 감상 방법이
될 것이다"(츠베탕 토도로프, 『일상예찬』, '옮긴이의 말').

정민영, <원포인트 그림감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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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 우리 시각으로 다시 보는 서양미술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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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의 세가지 두드러진 특징
- 인간 중심
- 사실 중심
- 감각 중심

🗽우리의 시각으로
서양미술을 이해하다.

이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강의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아래의 첫 서문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해하다'라는 말의 일차적인 사전적 정의는
'깨달아 알다' 혹은 '잘 알아서 받아들이다'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인데, 이 앎에 한계가
있는 게, 사실 무언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해하다'라는 말의 풀이에 안다는 말이
들어간 것은 항상 100퍼센트 확실히 안다기보다
최소한 그 상황이나 사정에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기본적인 삶을 갖는다는 의미로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서 '이해하다'의 사전적 정의에는 '양해하다'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다'라는
뜻이 더불어 있다.

그러니까 상대 혹은 대상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는
못해도 우호적인 방향으로 판단해 수용하거나,
상대 혹은 대상을 수용할 수 없다 하더라도 어쨌든
존재하는 당위로서 긍정한다는 뉘앙스가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서양미술의 이해'라는 타이틀로 서양미술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 설명하는 강의를 해온 지 햇수로 어언
17년이 되었다.

내가 이 강의의 타이틀에 '이해'라는 말을 쓴 데는,
우리가 서양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서양 사람들과
같을 수 는 없으니, 한국인의 입장에서 서양미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헤아려 수용하는게 좋을지 함께
고민해 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

역사 경험과 문화가 크게 다른 까닭에 우리가 서양
사람들처럼 서양미술을 느끼고 바라볼 수는 없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입장에서 느끼고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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