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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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각본, 김지혜, 창비(2023)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적인 시선에 대한 김지혜 작가님의 책 『OO각본』 일부를 읽게 되었다. 전작이 ‘장애’에 중점을 두어 내가 나의 언행을 돌이켜보고 반성할 수 있는 타자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었다면, 이번 『OO각본』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 더욱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결혼과 출산에 갇힌 우리나라는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소위 정상가족이라고 일컫는 구성에 포함되지 못하면 하자 있는 사람, 어딘가 이상한 사람, 심지어 어딘가 아픈 사람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나라가 제공하는 복지조차 제공받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제도와 사회적 시선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저출산과 같이 나라의 성장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를 전혀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족각본을 공고히 하려는 사회의 노력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의 가족제도가 얼마나 불합리하고 차별적인지를 ‘결혼’과 ‘출산’의 관점에서 상세히 다룬다. 그러다보니 결혼이나 출산이 여성에게 가하는, 더 나아가 결혼이나 출산의 선상에서 언급조차 되지 못하는 동성커플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우리나라의 동성애 수용도는 매우 낮고, 미혼모의 출산이나 동거 부부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다.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유행은 그렇게나 빨리 따라가면서, 우리나라는 왜 정상가족에 대한 열망과 집착은 버리지 못하는 걸까?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막연하게 차별이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을 명확한 문장으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가제본 도서의 1장부터 3장까지가 ‘왜 며느리가 남자면 안 될까’, 결혼과 출산의 절대공식’, ‘초대받지 않은 탄생, 허락받지 못한 출산’이라는 표제인데, 대한민국에 사는 30대 여성으로서 자유로울 수 없는 주제라 더욱 공감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1장에서 ‘자유론’으로 알려진 존 스튜어트 밀이 “실질적으로 결혼제도야말로 우리 법체계 안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노예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하며 결혼이 여성이 “강요에 의한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인 노예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혼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32쪽) 말했다는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15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여전히 달라진 게 없다는 것조차.

3장에서는 우리 사회가 ‘출산의 자격’을 얼마나 엄격하게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의 출산에 얼마나 가차 없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이 장의 내용은 절반 정도는 공감하고 절반 정도는 공감할 수 없었다. 출산과 육아의 ‘자격’이 있는 사람을 결혼을 한 이성부부에게만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장애의 정도, 경제적 환경 등 실제로 아이를 제대로 양육할 수 있는 조건 정도는 갖춘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님은 이러한 걱정에서 비롯된 염려 또한 차별이라고, 사회 전체가 변화하고 공동체를 형성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물론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고,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그게 맞다고 동의하지만 나라가 망해 다시 처음부터 리셋되지 않는 한 그런 환경은 절대 만날 수 없을 것만 같다. 


가제본 도서에 제공되지 않은 장은 동성커플의 양육, 가족질서를 유지하는 규율로 작동하는 성교육, 가족각본을 공고히 하는 법 제도, 가족각본을 넘어선 행복한 사회에 대한 상상에 대한 내용이라고 한다. 이번에 읽지 못한 부분들도 너무나 궁금하다. 2-30대 여성들이 이 책을 한번쯤 읽어봤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에서 ‘정상’이라고 말하는 가족 외에도 우리가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말이다. 

    



📚88-89. 때때로 가장 강력한 차별은 온정적인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태어날 아이의 불행을 예고하는 염려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출산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온정적인 염려와 경고를 보냄으로써, 세상의 차별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될 것임을 기정사실화한다. 그리하여 실제로 닥치는 불행은 오롯이 출산을선택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결국 그렇게 차별을 보존하고 전승하며 어떤 집단의 미래를 영구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행위에 (의도치 않게) ‘가담한다. (생략) 우리는 누군가의 출산을 막을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한 탄생으로 등장하는 구성원을 위해 변화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평소에 잘 인식되지 않지만 가족의 명칭이나 호칭은 온통 성별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 성별이 바뀌면 딸이 아들이 되고, 엄마가 아빠가 되고, 누나가 형이 된다. 호칭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기대도 달라진다. 가족 안에서 역할이 바뀐다는 말이다. 당연한 듯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같은데 성별 하나로 가족 사이에서 바뀌는 게 정말 많다. - P8

며느리는 그 역할이 중대한데 지위가 낮다는 점에서 모순이 있었다. 며느리의 지위는 남편에 따라 정해지지만 남편과 동등한 지위가 아니다. 가령 며느리는 남편의 동생을 동생 대하듯 할 수 없다. 남편의 동생이면 자신보다 어려도 존대해야 한다. 유독 ‘도련님/서방님’ ‘아가씨’라는 호칭과 존대법이 오늘날 문제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반면 아내의 동생에게는 같은 수준의 존대가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대칭적인 위계가 확연히 드러난다. 도련님이 결혼하면 며느리끼리는 서열이 생기겠지만, 아가씨의 배우자는 집안의 사위로서 위계체계가 다르다. - P30

존 스튜어트 밀은 1869년에 발간된 『여성의 종속』에서 "실질적으로 결혼제도야말로 우리 법체계 안에서 발견되는 유일한 노예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직설한다. 그런데 여성에게 강요된 "족쇄는 그 성질이 다르다"라고 말한다. 여성이 "강요에 의한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인 노예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혼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온순하고 고분고분한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타인의 삶에 종속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 P32

그럼 어떻게 해야 이기적이지 않은 출산을 할 수 있을까? 일단 비장애인이어야 하고, 남녀가 결혼을 한 상태여야 하며, 돈이 어느정도 있는 환경에서, 적정한 수의 자녀를 낳아야 한다. 적정한 자녀 수를 인구대체율인 2.1명을 고려해 대략 정리해보자면, ‘중산층 이상의 결혼한 비장애 이성부부와 자녀 2명으로 구성된 4인 가족’ 정도면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 같다. 말하자면 ‘출산의 자격’이랄까.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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