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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찰스 번즈 지음, 박중서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서점을 발견하면 자동적으로 빨려 들어가던 시기가 있었다. 불광역을 향하다 전원적인 느낌의 작은 북카페를 발견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연역적으로 카페를 방문했다.
책장에 책이 아주 많지는 않았다(책장 자체가 작은 것 하나밖에 없었다). 다만 책장에는 내용이 있어 보였다. 환경문제, 사회문제, 예술 서적들, 몇몇 문학 작품들. 그리고 이 책장에 『블랙홀』이 있었다. 북카페를 나오며 이 책을 알라딘 어플 장바구니에 저장했다. 며칠 후 이 책을 주문했을 때에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일단 그림체가 노골적이고 역겹다. 사람들의 음영은 톱살모양으로 표현되는 데, 작가들이 벌레들을 그릴 때 쓰는 방식과도 같았다. 남자 성기, 여자의 가슴, 뼈, 벗겨진 피부 따위가 등장한다. 게다가 블랙홀이라는 메타포가 훌륭했다. 이 작품에서 ‘블랙홀’은 한 방울의 타액만 묻어도 전염되는 병이다. 병에 걸리면 몸 한 부분에 심연이 생기는데, 증상은 제각각이다. 어떤 케릭터는 피부 껍질이 벗겨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꼬리가 생기기도 한다. 병에 걸리면 분명히 외면으로 드러나서, 이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괄시와 혐오를 받는다.
재밌는 건, 10대들의 일상이 ‘블랙홀’이라는 상징 속에서 어떤 이질감도 없이 잘 녹아든다는 것이다. 블랙홀이 갖는 의미가 뭐길래 이게 가능할까 생각해보니, ‘블랙홀’은 무한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과 연루되면 대상들은 곧 0에 가깝게 소멸한다. 0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무’가 되는 일은 자신의 의지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기에 사람들은 '비루한' 생존을 이어간다. 게다가 ‘블랙홀’에 대해, 이것의 발생원인도 모르고, 이것을 더 이상 없앨 수도 없기에, 당사자들은 곤란함을 느낀다.
이렇게 보면 결국 이 책은 훼손으로 잠식되며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맺는 관계들에 대해 다룬다.(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가정하면, 굉장히 강력한 상징이 된다.) 이들은 ‘정상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지만, 역시나 사랑하고 사랑 받는다. 때론 정상인을 만나 위로 받기도 하고, 때론 같은 종류의 사람을 만나 같은 상실을 나누기도 한다. 그 어떤 관계에서든 불안이 만들어지지만, 그 불안이 여름 해변의 모래 같은 온기와 시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서 결국, 그들은 살아남아 다른 세계로 향한다. 이 작품의 세계관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블랙홀을 지니게 되자,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의 블랙홀은 어떤 모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