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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자전거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3년 1월
평점 :
‘시작’이라는 말에 곧바로 따라붙는 단어는 ‘끝’이다. 많은 이들이 이 두 단어를 함께 생각한다. 글을 쓰는 이는 한 단어로 시작해 또 다른 단어로 끝을 맺는다. 그림 그리는 이는 거친 드로잉과 함께 시작하고 마지막 붓 터치 혹은 서명으로 작품을 끝낸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과정에 시작과 끝이라는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있을까? 탄생과 동시에 의미가 배태된다. 이 의미는 창작자에게서 향유자로, 그리고 또 다른 향유자에게서 또 다른 창작자로 연쇄되어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난다. 의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 모습으로 어딘가에 존재한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혹은 어떤 글 속에 있다. 대물림과도 같은 이러한 연쇄는 거창해 보이는 예술작품의 의미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지는 물건과 어릴 때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옛 이야기에도 마찬가지다. 우밍이吳明益의 묵직한 소설 『도둑맞은 자전거』가 품고 있는 씨앗도 바로 그것이다.
화자 청은 “내가 들려줄 이야기는 자전거에서 시작된다”(15)고 말하며 문을 연다. 그의 말은 헛되지 않다. 세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자전거가 있으니 말이다. 청은 수십 년 전 불현 듯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좇는다. 당시 아버지가 아끼던 자전거와 함께였다는 사실에 청은 집중한다. 그는 자전거를 추적하면 아버지의 실종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우연과 운의 도움을 받는 청은 여러 사람을 거친다. 독자는 이 흐름을 그대로 타고 서사를 따라간다. 청에게서 청의 아버지로, 청의 아버지에게서 압바스에게로, 압바스에서 바쑤야에게로, 바쑤야에게서 무 분대장으로 이어지는 서사를 감싸는 것은 전쟁이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었다. 저자는 그 역사적 흐름 가운데 뚜렷이 자리하는 자전거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전쟁이 진영을 막론한 모든 이들에게 남긴 흔적에 고개 숙인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간다’는 진부한 설명 대신, 그는 생생하고 날카로운 묘사를 선보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당시의 공기를 깊게 호흡하게 한다. 그 공기는 매캐한 연기를 품고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습기 가득한 밀림의 생명을 머금고 있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은 바로 동물이다. 전쟁에 희생된 것은 인간, 기술, 식량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인간사와 전혀 무관하다 짐작되는 동물이기도 하다. 코끼리는 여러 인물을 한 데 묶는 또 다른 소재다. 전쟁에서 코끼리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인간에 의해 희생되어야만 했던 코끼리가 생존을 위해 어떤 식으로 학습해야 했는지에 대해 저자는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초현실적으로 서술하고 있다(특히 후반부의 ‘림보’장이 아주 매력적이다). 코끼리에 대한 여러 사람의 기억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말과 말을 통해 이어진다. 코끼리의 이야기에 있어서도 시작과 끝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무겁고 씁쓸한 소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이야기를 비극으로 끝맺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대해 기억하자고, 그는 그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