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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계와 의학 - 진료대기실에 있는 코끼리
콜린 제임스 알렉산더 지음, 심용식 옮김 / (주)글통 / 2022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복잡성-복잡계를 주창하는 이론적인 팜플렛이 아니다.
자신이 마주한 현장에서 마주하게 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한 진정한 지식인의 저작이다.
난 이 책에서 표현되고 있는 “과학함”이 근대 과학과 근대 철학의 진정한 얼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사상사가로서 우리가 잊고 있는 우리의 기원을 상기시키는 것을 나의 과제로 삼고 있지만, 이 책과 이 책의 저자는 정말 과거의 과학자와 철학자가 활동했던 것처럼 그렇게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의 번역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직역이기도 하고, 단어들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으며, 특정 단어들이 맥락에 맞게 조정이 안 되어 돌출되어 있다.(역자가 굉장히 흥미로운 연구를 수행하는 뛰어난 의학 연구자인 것 같은데, 이런 전문가들에게 유려한 문장을 요구하는 것은 과할 수밖에 없다. 요즘 시대에 진정한 전문가는 너무 바빠 그런 역량을 기를 시간이 없다. 출판사에서 실력 있는 편집자를 붙였어야… 사실 이런 전문가가 직접 번역하기보다는 전문 번역가와 협업하는 방식으로 번역을 하는 게 베스트다)
하지만 바로 이런 투박함이 나에게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내가 연구하는 과거의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전문적인 글쟁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전문 직업인이자 아마추어 글쟁이로 자신들의 활동을 표현했다.
때문에 그들의 글은 투박했고, 어설펐다.(물론 데카르트나 푸앵카래는 아마추어 글쟁이라고 불릴 수 없을 천재적인 글쟁이었지만….)
하지만 그러한 어설픔이 그 진실됨과 위대함을 훼손하진 않았다.
결국 근대와 과학을 이룩한 것은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위대한 선조들을 상기시킨다.
그들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들처럼 고민하고 실천함으로써 말이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다고 입으로만 떠드는 나 같은 사람과 달리,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가능성을 현실로서 실천으로 보여준다.(이것이 최고의 증명 아닐까? 가능하다고 떠드는 것보다는 그것을 그냥 해내는 것…)
어찌보면 굉장히 세부적인 의학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일 수도, 아니면 복잡성-복잡계 과학을 주창하는 이론적 팜플렛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정말로 자신의 앎을 존중할 줄 아는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해결하려는 문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고백의 글이자,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앎의 열정과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앎의 위대함을 증언하는 글이다.
다만 번역의 투박함과 문제의 복잡성 때문에 이 문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겐 버거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P.S. 최근 안네마리 몰의 <바디 멀티플>이 번역되었는데, 그 책과 같이 읽길 권유한다. 이 책과 묘하게 다른 부분들에서 지식의 실천의 복잡함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