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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놀라다 - 믿고 싶은 대로 믿던 불신앙을 끝내다
마이크 어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 복음은 상품이 아니다.
“하나님? 좋은 분이지만, 항상 좋은 것을 주시지는 않죠.” 언제부터인가 하나님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불완전하고 부족하고 허전한 현실을 느낄 때, 단순한 실망감을 넘어 하나님에 대해 심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이것을 현대인의 소비 심리에 빗대어 설명한다. 가령 ‘복근왕’이라고 하는 상품이 있다고 하자. 전류가 흐르는 이 밸트를 배에 차기만 하면, 약한 전류가 흘러나와 복부를 수축시켜준다는 멋진 설명이 뒤따른다. 꼭 필요할 것만 같은 이 멋진 상품은, 구매자에게 운동 없이 소모되는 지방 대신 뻔한 실망감을 안겨준다. 이는 뻔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상술이다. 대부분의 상술이 그러하듯, 사람들의 욕구를 창출하며 그것을 충족시켜 줄 것을 제시하는 것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복음은 어떠한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복음은 상품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만족과 공허감과 불확실성을 없애주겠노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교회는 사회를 향해 예수님을 통해 찾아오시는 하나님 없이는 그 어떤 대상도 우리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없다고 떠들어 댄다” 마치 판촉 광고와 같은, 값싼 싸구려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의 잘못이 크다. 예수님은, 그리고 살아있는 복음은 오히려 우리의 삶에 긴장과 불확실성을 자꾸만 가져주며, 때때로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 놓이도록 한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영적 메마름의 시기를 보내기도 한다. 이러한 고통이 영적 성장에 필요한 과정이라고 하더라도, 지독히 힘들고 아픈 일이란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 하나님의 관심, 나 그리고 너.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 분은 정말로 선한 분이신가. 때로는 타락한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죽도록 고생하다가 바라던 대로 죽는 것이 인간의 숙명처럼 느껴진다. 이 세상은 지독하게 부조리하고,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연약하다. 악에 너무나도 쉽게 침략당하며 소모되어 간다. 성경에 따르면, 빛과 어둠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오랫동안 피조 세계에 존재해온 반역의 세력 또한 하나님의 허락에 의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소생시켜줄 생명을 찾지만, 언제나 쉽게 좌절되고 만다. “생명을 줄 수 없는 것에서 계속 생명을 찾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찾거나”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짜 관심이 다름아닌 우리 자신에게로 향해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의 결핍, 역설, 긴장, 욕구불만, 갈망, 공허감, 이별, 고독, 어려움, 상실, 슬픔 보다는, 이 모든 것들이 제거되는 것보다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당신을 바라보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의지를 놓고 호불호를 표현한다는 것이 좀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이것이 무척 마음에 든다. 하나님이 적어도 당신의 자녀가 완전히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는 것을 원하는 부모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해되지 않는 상황 앞에서 그 분의 참 의지를 의심하며 힐난할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안다. (실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저자는 본문에서 자신의 셋째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며 이것으로 인해 염려와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담담히 고백하고 있다. 아이의 병을 알고 깊은 슬픔에 잠겼을 때, 일부 사람들은 그와 그의 아내가 신앙인답지 않은 슬픔에 빠져있음을 지적하는 메일을 보냈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대처하는 데에는 대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세상이 권하는 대로 도피하거나, 아니면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아닌 척 가장을 하거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도피하거나 가장하지 말고, 아픔을 받아들이고 갈증을 느끼라고 말씀하신다. 인생의 슬픔과 비통함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신다.” 성경에 씌여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런 것이다. 구하면... 찾을 것이요 만나고자 하면... 만나주시는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불확실함을 제거해주시기를 바라며 교회 문을 두드린다면 십중팔구 분노와 실망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아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원하는 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그분께서 먼저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하나님께 놀라다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이 우리를 괴롭힌다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둔감하게 하고 부패하게 만든다. 신학을 신봉하는 것이 하나의 사례이다. 하나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믿지 않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매사에 회의적인 태도가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충격적인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되는, 다시 말하자면 인생의 불가해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조차 그저 체념하거나, 회피하게 되는 것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영혼이 손상되는 일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늘 언제나 새롭게 체험되어야할 분이다. 그 분은 영靈이시며 살아계신 분이다. 하나님을 성경 속에서나 역사하시는 분으로, 내가 경험했던 과거의 어느 한 점에 머물러 계시는 분으로 정의하고 속편하게 잊어버리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는 있지만, 결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분이시다” 저자는 강조한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견해도 그분을 제대로 담아낼 만큼 충분히 크거나 충분히 선하거나 충분히 참되지 못하다.” 하나님의 실체와 대면한 것으로 기록된 욥과 요한은 둘다 ’엎드러져‘ 단지 경외감에 사로잡힐 뿐이었다.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신비를 알고 느끼는 것은 지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든 그것을 알아보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한다.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볼 수 있는 지침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말씀과 그 분이 하신 일이다. 예수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낮은 곳에 임하시는 분이며, 약한 것과 아픈 것들과 초라하고 작은 것들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 분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저버린 곳은 없다. 교회가 저버린 곳이 있을 뿐이다. "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 애쓰자. 안락하고 걱정 없는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힘쓰자. “우리는 결국 각자 귀하게 여기는 것을 염려하게 된다. 그러니 하늘의 것들을 귀하게 여기라. 그렇게 하면 새와 꽃처럼 염려 없이 살 수 있다.” 새와 꽃 같은 삶. 보살핌을 받지 못할까 안달하며 사는 삶이 아닌, 주어진 순간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참 존재가 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