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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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한지혜
‘개천’과 ‘용’을 소재로 시작하여 누구나 가질 수도 있겠지만 잘 밝히려 하지 않을 도덕적 우월감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자신이 경험했던 가난을 소재로 글을 쓰면서 그보다 더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어렸을 적 끔찍하게 가난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만과 치기뿐이었음을 느끼고 나서부터는 누구도 함부로 연민하지 않았다고 밝히는 프롤로그에서부터 그녀가 마음에 들어왔다. 아직도 한국문학에 문외한인 탓에 처음 본 그녀의 이름과 글이었지만 금세 내 마음을 빼앗겼다. 그 시절 대부분이 그랬듯이 나 또한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기에 공감 가는 내용도 너무 많았고 추억을 떠올릴 만한 내용들도 정말 많았다. 다른 점은 정말 다행히도 내가 부모님과 사이가 좋고 (성인이 되고 결혼해서 뱃속에 아이가 있는 지금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보통 딸들이 그러하듯 엄마와의 갈등과 불화는 있었지만 엄청나게 용기를 냈던 3번의 허심탄회한 대화와 눈물바다를 이룬 후로는 앙금이 남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인생 선배라고도 할 수 있을 그녀에게서 배운 게 너무 많아서 정말 고맙다. 부모님, 아이, 나의 꿈과 열정, 인생의 고난과 극복, 수많은 어릴 적 추억과 기억들과 같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일 수 있는 것부터 위로와 격려, 성공과 희망에 대한 역설, 사회의 역할과 책임, 교육의 중요성, 시대정신과 의식과 같은 전체적이고 상호작용적인 것까지 아우르고 있는 산문 한 편 한 편이 더없이 소중하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독서와 리뷰인생에서 10번도 채 되지 않은 리뷰대회 참가 경험 중 한국작가의 작품도 처음이고 산문 장르도 처음이라 어떻게 리뷰를 작성해야 할지 감이 오지는 않지만 내가 느낀 바대로 쓰고 싶은 형식대로 작성하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최근까지 겪었던 사건, 일화, 감정들을 과도한 수식어들 없이 깔끔하고 담백하게 펼친 글들에도 적잖이 감동했지만 그녀가 속해 있는 사회에도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반성하고 자문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시도를 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촉구하는 글들에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특히 남들 눈에는 별 거 아닌 일에도 가끔 눈물바람인 나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울어도 돼’ - 마음껏 울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라며 눈물 흘린 만큼 위로받고 아픈 만큼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모습에서,
‘쫓겨난 늑대는 어디로 가야 할까’ - 사회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배척과 혐오, 격리, 낙오를 일삼는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하고 그로 인해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이 갈 곳은 어디인지도 걱정하는 모습에서, 그래서 우리 사회는 실제로 안전한가도 되묻고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혐오가 늘어남에 따라 그 혐오와의 공존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모습에서,
‘꿈조차 꾸지 못하는 아이들’ - 학력주의자와 계층주의자 중 누가 더 나쁜지 생각해 보곤 한다며 자본이 꿈을 제한하는 사회,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고 걱정하는 모습에서,
‘요정과 마녀 사이’ - ‘빙의’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메타포로 이해했는데 요즘은 ‘죄’와 ‘사람’이 다른 것인지 헷갈린다고 의심하는 모습에서 (나 또한 예전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마치 빙의된 것처럼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갈수록 그 사람의 본성과 천성으로 죄를 지은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과 폭력’ - 우리에게 선택, 판단하는 권한을 갖게 되는 순간이 올 때 ‘혼자에게만 정당한 기준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자신을 향한 ‘다짐’이자 권력을 가진 분들에게 ‘부탁’하는 말이라고 피력하는 모습에서 그녀에게 한 인간으로서 공감도 많이 됐고 작가로서의 관심과 통찰에 존경스럽기도 했다.

1. 그녀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나와 나의 가족
‘숨어있기 좋은 책’ - 현실에서의 도피처로 선택한 시간과 장소. 식당을 운영하던 엄마. 택시운전을 하던 아빠. 가난했던 집과 동네에서 겪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과 같은 모험가들과의 여행 이후 소공녀의 ‘새라’에게서 받은 환상 같은 위로, 다락방 같은 기적. (기적이 뭐 별건가, 꿈을 꾸면 기적이지.) 동심과 희망의 세계를 파괴했던 최초의 잔혹동화 ‘못나도 울 엄마’. 인생은 비극이고, 비극이 곧 성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 독자로서의 삶이 작가로서의 삶으로 건너가게 해 준 동화. 리얼리즘을 가르쳐준 최초의 책. 마지막으로 읽었던 동화. 더 이상 권선징악을 말하지 않는 세계로 건너와 비로소 제대로 책을 읽기 시작. (스트레스를 쉽게 받는 기질을 가지고 있는 내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방법이 독서다. 그렇게 나도 책에 숨어있기 좋아했다. 그러나 많은 사건, 사고들을 겪고 난 후로 책과 현실(레알)의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중심점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못나도 울 엄마’라는 동화로 리얼리즘을 알게 됐다는 단편에서 또 한 번 공감이 된 부분.)
‘누가 우리의 가족인가’ - 정말 새로운 시각과 생각을 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릴 적 완전한 결합체라 생각했던 가족이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사실은 매우 특이하고 불안정한 결합체의 단위라는 것, 가족의 생성이라는 것은 서로 너무도 다른 서사를 가지고 살던 타인 둘이서 하나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선천적 결합보다는 후천적으로 공유한 경험의 집합체로 언제든 결합될 수도 해체될 수도 있기에 ‘누구나’ 가족이 될 순 있지만 ‘아무나’ 가족이 될 수는 없고 가족을 가족으로 존재케 하는 일도 전적으로 우리가 하는 것. 언젠가 읽었던 메리 파이퍼의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에서 봤던 내용 중 가족 사이의 갈등과 불화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이해와 용서를 생각하면 국제연합이 하는 일은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는 메이 사튼의 말이 떠올랐다. 가족을 가족으로 존재케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2. 그녀의 추억들, 그리고 나의 추억들
‘내가 살던 골목에는’ - 메밀묵 장수의 ‘사려엇~’소리, 뾰족구두 신고 아슬아슬하게 비탈길을 내려가던 젊은 여자들의 엉덩방아 찧는 소리, 여름철 장대비 소리, 한겨울 자박자박 눈 내리는 소리를 들려주던 슬래브 지붕. 담벼락 낙서와 숨바꼭질, 다방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소꿉장난 놀이들. 내게도 떠오르는 엄청난 추억들. 나 또한 한 지붕 열세가족이 살던 마당이 크고 낮은 옥상이 있던 다세대 주택에 살았다. 동네 아이들과 방과 후 해질녘까지, 엄마들이 저녁 먹으러 오라고 소리치기 전까지 질리는 줄 모르고 놀았던 일명 ‘도깨비 방망이’ 구조물. 그 금속냄새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고, 도깨비 방망이가 놓여있던 공터와 그 옆을 흐르던, 옆 동네와의 구획을 나눠주던 더러운 개울가도 눈에 선하다.
‘해바라기를 심었더니 그리움이 피네’ - 식물 키우는 것에 상처를 받았던 그녀가 캔 화분으로 키워낸 해바라기의 꽃봉오리 맺힌 날 죽은 식물도 살린다는 ‘초록엄지’였던 (영어표현 green thumb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긴 이 단어에서 그녀의 재치를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가 잘 키워냈던 풋고추 따서 밥상에 올려주던 것처럼 무덤가에 올려놓으면 기뻐하실지 궁금하다고 하는 데서 목구멍에 뭔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나이를 먹고 처음 기른 식물에서 그리움을 배우고 어떤 그리움은 꽃으로 피어난다고 했다.
‘내 영혼의 불량식품’ - 입덧으로 이것저것 못 먹다 어렸을 때 먹었던 불량식품들을 까먹었던 그녀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쉽게 잊은 자신 때문에 목이 멨다고 한다. 아빠가 직접 만들어주던 칼국수와 돼지고기 수육을 먹고 싶은데 그 음식들을 해달라고 조를 아빠가 세상에 없으며 먹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진 후에야, 입덧 하는 동안 잊고 있던 그리움을 먹느라 수시로 마음이 뻑뻑해진 후에야 잊은 것, 그리운 것, 추억해야 할 것이 많았던 걸 느끼는 걸 보고 지금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엄마의 맛’ -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엄마에게 던졌던 자신의 미움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엄마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일이 아직 두려워서 일부러 엄마가 가르쳐준 방법을 피했다가 모두 망친 여름용 저장반찬을 씹을 때마다 미움, 후회, 미안함, 옹졸함을 함께 삼켰다고 한다.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덜 느끼기 위해서라도 지금 옆에 계실 때 잘 해드려야지.
‘서울 78-236415의 남자’ - 아빠가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던 아빠의 가계부 안에 있던 근로 이력 증명서들. 아빠가 그랬듯이 그녀 또한 교육 인증서, 명함, 영수증, 청탁서, 출판사의 거절 답장들을 버리지 못한다. 이유는 그것을 버리는 순간 그녀의 열정, 최선, 꿈과 좌절을 모두 버리게 될 것 같아서 미련이든 열정을 위해서든 실패를 간직한다고 했다. 아빠만의 방식으로 삶을 증명했듯 그녀 또한 그랬고 나도 사실 각종 과거들을 보여주는 문서들과 물건들을 간직하고 있다. 남들 눈에는 그저 종이뭉치들이나 잡동사니로 보이겠지.

3. 성공에 대한 역설
‘누구에게나 빛나는 한 가지’ - 문예지 응모작 심사를 맡은 작가가 서툴고 미흡한 작품일수록 더 천천히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보석 같은 문장이 한두 문장쯤 툭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그런 문장을 만나는 순간이 너무 좋아서라고 했다. 리뷰대회에 응모하려고 리뷰작성 중인 내게 더할 나위 없이 고맙고 특별한 존재로 다가온다.
‘성공 대신 성취’ - ‘새옹지마’의 인생 역정을 생각해본다. ‘성공’은 시스템의 문제, ‘성취’는 온전히 개인의 몫. 끝도 없이 나쁜 일만 찾아왔던 서른 살에 바닥을 치며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는 신춘문예 응모자들에게 행운을 빌었지만 나는 나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놓친 ‘성공’ 대신 나의 패배가 이룰 ‘성취’를 기약하라고 말이다.
‘생략된 삶에 대한 연민’ - 공모전 심사에서 소설을 쓴 사람의 삶으로 느껴져서, 소설 한 편을 기어이 끝낸 사람에 대한 예의 때문에, 혹시 만나지 모르는 빛나는 문장에 대한 기대 때문에, 어떤 삶도 함부로 생략하거나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 대한 증표처럼 비효율적인 읽기를 멈출 수 없다는 그녀에게 존경심이 우러난다.
‘4등이어도 괜찮아’ - 존재조차도 몰랐던 영화 ‘4등’을 보고 주인공이 끝내 1등을 하지 않기를 바랐건만 결국 1등을 한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그녀. 자신의 아이에게도 자신만의 속도가 있으니 그 속도에 맞춰 살라고 조금 지거나 늘 져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을지 자문하며 단편을 끝낸 그녀. 나 역시 나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태어날 아이가 성장한 후에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4. 받았던 위로와 격려 돌려주기
‘세월은 가고 사람은 늙지만’ - 꿈은 남는다. 창간 전문 편집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잡지 창간이 꿈이었던 사십대 중반의 선배. 꿈이 있고, 꿈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불가능은 없을 것이다. 그 나이에 첫발의 꿈을 디딘 걸 보고 눈물이 나도록 부러웠다는 그녀. 다가올 나이 마흔을 생각하며 꿈이 나이와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그녀.
‘참 괜찮은 눈이 온다’ -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로 시작하는 미당의 시에서는 눈이 ‘괜찮다’는 소리로 내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눈 소리를 그녀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서른이 된 참이었던 시절 구조조정으로 인한 송별식의 주인공이 되었던 그녀는 식물인간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백수가 되어 돌아가야 하는 날. 기억나지 않는 어느 술집으로 들어가 라이브 밴드의 반주에 맞춰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노래를 부르던 날. 그녀는 이 날 어떤 순간을 느꼈다. ‘아주 사소한 진지함’으로 ‘태산 같은 막막함’을 훌쩍 뛰어넘는 순간을. 그렇게 술집에서 나올 때 폭설이 쏟아졌고 함박함박 떨어지던 그 눈이 그녀의 귓가에 위로하며 말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그 ‘괜찮다’는 소리와 함께 서른이 시작되었고 그녀의 삶도 한결 깊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위로를 건네주었다. 무엇이든 마음을 낮추면 세상 만물은, 그 안에 깃든 마음은 다 괜찮아질 수 있다고. 마음을 낮춘다는 건 욕심을 내려놓는 걸까.

5. 진정한 내면의 완성은 외부로의 관심
‘아이는 어쩌고?’ -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가 겪고 있듯이 여성으로서 게다가 아이를 기르는 작가로서의 그녀도 고용불평등의 현실, 불편과 차별의 시선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더구나 창작이라는 행위를 비생산성으로 보는 사회에서 작가의 삶은 가족 전체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먹고사는 문제인 ‘밥’ 때문에 작가로서의 존엄과 정체성이 개인의 의지와 무능으로 돌아왔다고 자조하는 부분에서는 작가들이 처한 현실이 녹록치 않다는 걸 실감했다. 작가로서의 삶을 막연히 꿈꾸고 있는 내게 자문하고 고민하게 하는 부분이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말할 수 있게’ - 보통 생각하는 ‘사회적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장들이 많았다. ‘리어왕’에 나오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사실은 타인이며, 타인의 시선과 통제가 자신을 규정하고 통제하며 그렇게 우리는 ‘시선에 갇힌 인간’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도 타인의 삶에 대해 간섭하고 규정, 통제하는 오만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말하고 싶어 하면서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자신이 규정하고 싶어 하는 이기심에서 자유롭기 힘들다는 말도 마음에 와 닿았다. 그녀가 말한 대로 꽃들도 자기 이름으로 태어나 자기 이름으로 저무는데 하물며 숨 쉬며 살아 있는 삶은 물론 죽음에 대해서까지 그런 이기심을 표출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서로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대한민국 김장 노동자’ - 단편 제목에서 또 한 번 그녀의 재치에 감탄한 부분. 감정 노동자 패러디 김장 노동자. 그러나 김장을 하는 사람이 여전히 여자들이라는 점을 최근에야 인식했다는 그녀를 보고 나도 새삼 놀랐다. 나 또한 어렸을 때부터 봐 오던 엄마와 이모들, 그리고 친구들의 김장철 모습을 보면서도 단 한 번도 왜 여자들만 김장을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그녀보다 더 절실하게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고난은 내가 그 한가운데에 있지 않을 때에만 위대하며 노동이나 모성도 바깥에 서 있는 자들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의 나라’ - 사춘기 시절 아는 사람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그녀의 고백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METOO 사건들에서 여전히 여성들은 ‘다정과 격려’로 포장하는 남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이 나라에서 성추행, 성희롱을 일상처럼 경험하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지금의 내 직장은 여성들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 않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성추행이나 성희롱이라 생각하지 못 했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옆집 언니와 오빠에게 당했던 일들이 어렴풋이 떠올라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지금 직장에서 생활하지 않았다면 또 하나의 스트레스와 고통을 겪으며 생활했을 걸 생각하니 아찔하기도 했다.
‘인문학적 수학’ - ‘평균, 평균의 수치’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던 단편. 특히 최저임금제 개편으로 인한 삶의 조건에 필요한 수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수’에 대한 고민을.
‘촛불 이후 광장은 진화할까’ - 2016년 탄핵정국의 해에 권력형 비리라 할 수 있는 그동안 숨겨졌던 사회의 치부와 비리들이 민낯을 드러냈고 우리는 정치와 투표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 빚어냈다는 책임의식과 부끄러움으로 분노했고 더 늦기 전에 용기를 내 싸우기로 했고 우리 가족들을 포함해서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밝혔다. 탄핵을 성공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가 자문한 것처럼 우리는 같은 것을 비판해도 다른 방식으로 비판하는 태도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성숙한 시민, 국민의식일 것이다.
‘치유의 광장’, ‘고통은 왜 증명해야 하는가’ 그리고 ‘생리대 기본권’ -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알려야 하고 도움을 받기 위해 증명해야 손길을 내미는 사회, 도움을 주기 위한 인프라는 구축하지도 않은 채 지원을 구실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선별작업, 치료와 지원을 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의식과 시선. 그것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악순환은 계속 될 것이다.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역시나 교육이 답일 것이다. 국가에서 행하는 어른들을 위한 교육, 그리고 거기서 어른들이 행하는 자녀들을 위한 교육. 국가와 어른이 정책과 말로만 행하는 교육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는 것을 보여주는 교육만이 답일 것이다.

6. 꿈과 목표, 열정과 열매, 운명과 행운
‘꿈, 견디면 즐거운’ - 황동규 시인의 시 ‘꿈, 견디기 힘든’의 역설. 시의 마지막에서 시인이 정의한 꿈은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라고 했다. 신분증에 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실패했을 꿈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삶의 색깔을 결정하리라며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꿈을 꿈 자체로 견딜 수 있을 때 삶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인생의 풍요로움은 꿈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그녀의 통찰에 놀랐다. 그녀가 언급한 대로 실패해도 버리지 않을 때, 꿈은 꿈 그 이상의 되어줄 거라고 나도 굳게 믿고 있다.
‘멈추지 않는 순간’ - 삶은 완성, 미완성의 문제가 아니라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시작 (Birth), 끝 (Death), 그리고 그 사이의 과정 (Choice)들일 것이다. 그리하여 삶은 덜 이룬 것도 다 이룰 것도 없이 생의 다음 순간,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생의 움직임 그 자체’이고 그저 삶일 뿐이다. 모든 생이 ‘수시로’ 구렁에 빠지고 ‘끝내는’ 실패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생을 ‘멈추지 않는 순간’ 행복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것이고 ‘적어도’ 목표를 향해 한번 더 발걸음을 내디디며 걷는다면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것이다.
‘마음이 가리키는 운명’ -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점집 순례로 깨닫게 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나의 마음이 미래를 좌우한다는 걸 깨달은 후 점집 순례를 끝나고 대신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살아갔다는 그녀. 그녀의 마음이 토정비결이듯이 내게도 토정비결은 내 마음일 것이다.
‘시간을 소유하는 법’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비추어 보더라도 직접 경험해 본 것을 생각해 보더라도 유한하지만 그 유한함 안에 무수히 많은 가닥을 품고 있는 시간은 내밀하고 풍부하므로 그 시간 안에서의 ‘찰나’를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저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찰나의 기쁨, 황홀, 자유를 만끽하여 시간을 무언가로 만드는 알림이 우리 내면에서 울리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온전히 시간을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닥을 딛고 서는 힘’ - 아파트 베란다에 작은 텃밭처럼 식물을 키우던 그녀에게 푸르고 여린 것들이 희미하게 전하는 것 같았다는 잠언을 나도 듣고 싶다. 발아열이라는 엄청난 내열을 견뎌야 싹을 틔우는 씨앗의 모습에서 열악한 환경을 어떻게든 제힘으로 넘어보려 노력하는 모습에서 경이로움을 느꼈을 그녀처럼 나도 그 경이로움을 보고 느끼고 싶다. 식물이 바닥을 치고 딛는 힘이 강할수록 꽃, 열매도 실하듯이 나도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바닥을 치는 것 같다 느껴지더라도 오히려 섣불리 솟구치지 않고 바닥까지도 기어이 내 것으로 움켜쥐는 그런 바닥을 치고 딛는 힘을 발휘해 보고 싶다.
‘반짝반짝 빛나는’ - 고등학교 동창 A의 꿈에 대한 도전 이야기를 곁들인 단편에서 건져낸 아름다운 문장. 자기 자신을 위해 열정을 다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을 만나는 행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다. 그렇다. 자신을 위한 열정을 불태우는 순간이 바로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이고 그것은 행운이다.

7. 삶과 죽음
‘세상과 아름답게 이별하는 법’ - 식물인간이 되어 삶도 죽음도 아닌 모호한 경계의 시간이 시작된 아빠를 돌보며 죽음의 존엄에 대해 처음 생각했다는 그녀.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알게 되었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쌓여 의연하고 덤덤하게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 죽음의 예술, ‘Ars Moriendi’를 상기할 수 있었던 것과 ‘드라이빙 미스 노마’인 91세 노마 할머니의 미 대륙 횡단 이야기를 읽는 것이 내게 아주 귀중한 시간이었다. 또한 아직 내 곁에 건강하게 살아계시며 가끔 잔소리를 하셔서 마음에 짜증이 일어 죄송스런 마음이 들게 하는 엄마 아빠의 소중함을 새삼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너무 뜻깊은 시간이었다. 반드시 세상과 아름답게 이별할 거라던 그녀의 다짐처럼 나도 그렇게 이별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8.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
‘초보농사 고군분투기’ - 아이의 유치원 작은 텃밭에서 시작해 아파트 베란다를 거쳐 분양받은 청계산 텃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삶 내 나는 소설’을 쓰려는 욕심도 내 봤던 그녀는 뜻대로 풀리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얼마나 자신이 오만하고 경솔했는지 깨달으며 그녀의 욕심을 반성한다. 그리고 농사짓는 것이 자식 기르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농사시기에 따라 유아와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시기를 비교하며 공통점과 차이점까지 통찰한다. 아직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지만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장에서 너무 공감이 갔기 때문에 나도 뼈저리게 공감한 공통점이 있었다. 농사지을 때처럼 밭만 가꾸어주고 열매는 간섭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지만 사춘기 농사에서 마음속 천불 다스리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그것이다.
‘부모로서의 용기’ - 그녀도 인정했듯이 아이가 실패했을 때 그 실패를 껴안아주는 방법이 정말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홀로 나서는 길을 바라보며 온전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과정을 사랑과 지지로 지켜봐주는 일에는 정말 큰 다짐과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자식들도 저 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기에.
‘무엇이든 물어봐’ - 그녀의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게 한 부분이 여기에 있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걸 충분히 들어주어서 느꼈던 뿌듯한 기분이 알고 보니 아이가 성장하면서 정말 중요한 자존감이었다는 부분이 정말 좋았다. 그리고 아이의 질문에 답할 때 상상력을 키워주려는 마음에 은유나 상징을 쓰지 않고 정확한 설명을 할 때 너무 당연한 사실이 아이에게는 충격적이고 놀라운 발견이 될 수 있어서 아이의 마음에 더 신비롭고 신기하게 새겨진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좋았다. 멀쩡한 사물을 비트는 동심은 어른을 위한 창조라는 것이다. 정말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9. 희망에 대한 역설
‘희망은 아프다’ - 이상한 기제라는 ‘아픔’은 심할수록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므로 창작의 고통을 산고에 비유하나 보다는 그녀의 말에 아직 뱃속의 아기를 낳지 않아봤고 제대로 된 창작의 고통을 겪지 못 했지만 두 달여 뒤면 산고도 겪을 것이고 출산 전후로 두 달여간 나름의 제대로 된 창작의 고통을 겪을 기회가 올 테니 그 말마저도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간절히 바란다기보다는 닥쳐올 것이므로 차라리 바라는 쪽을 택하겠다. 그녀 또한 희망이 외려 아픈 것이라는 걸 느끼고 ‘꿈’은 그저 꾸는 자의 것이 아니라 컨트롤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니, 엄청난 발아열을 견디며 싹을 틔우는 씨앗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사점을 만나고 그 사점을 지나 저절로 달리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는 마라토너들도 통이 있는 성장을 컨트롤하는 것이니 나도 컨트롤하는 쪽을 택하려는 것이다.

두 달여 뒤 두 달여간 나는 필히 아프고 괴롭고 불안하고 막막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을 성장시킨다는 걸 잊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꽃을 피워내겠다. 그리고 한 마을에 살지만 두 갈래 길인 붉은 길과 푸른 길에 살고 있는 여인과 이야기꾼만큼 마음으로 수를 놓거나 그 놓인 수의 매듭을 풀어 이야기를 만드는 수준까지 닿지 못하더라도 그녀의 이 소설이 그녀 자신에 대한 우화임을, 자신도 몰랐던 작가로서의 운명이자 태도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듯이, 그녀가 처음 소설가가 되었던 순간은 따 놓은 당상처럼 당연한 제1의 작가로 당선된 것이 아닌 두 명의 심사관들이 합의한 2등으로서, 거부당한 자로서 선택 받았듯이 나 또한 나도 몰랐던 그런 운명이었음을 알게 되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 또한 당신들에 대한, 나에 대한, 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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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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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 페터 한트케
어제까지 썼던 페터 한트케의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독서리뷰를 끝내고 오늘은 그의 또 하나의 소설인 이 책의 리뷰를 작성하려고 자리를 잡았다. 이 리뷰도 황금같이 주어진 휴가가 없었다면 리뷰 마무리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확실히 ‘어두운 밤’보다는 심적 부담이 덜 했지만 ‘어두운 밤’ 리뷰를 쓰기 시작할 때와 상황은 비슷하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재독을 해야 그나마 좋은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 읽고 리뷰를 쓰려고 했을 때는 막막하고 작가가 나에게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재독을 하면서 퍼즐을 맞춰 가듯이 실마리를 따라가다 보니 작가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목은 ‘긴 이별’이 먼저 ‘짧은 편지’가 나중이다. 하지만 목차는 그렇지 않다. 처음 읽을 때는 그냥 아, 그런가보다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기가 막힌 설정을 한 작가에게 다시 한 번 놀랐다. 얼마나 적절한지 모르겠다. 소설 구성뿐만 아니라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자신의 경험마저도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문체하며, 204쪽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소설이 담고 있는 너무나도 큰 메시지, 그를 알지 못한 채 처음 접할 때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그가 고심하며 썼을, 읽으면 읽을수록 사랑하게 될 것 같은 문장들도 정말 기가 막히다.
첫 번째 목차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내 유디트가 뉴욕의 웨일런드 매너 호텔 보관함에 남겨둔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라는 ‘짧은 편지’로 시작되는, 장소 하나 바꿈으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치 꿈을 잊는 것처럼 깨끗이 잊어버리게 만드는 데 많은 기여를 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짧은 편지를 남겨두고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여행 초반의 이야기. 화자는 ‘편지는 짧고 간명했다’며 ‘회상해보건대 마치 세상의 빛을 처음 봤을 때처럼 놀랐고 당혹스러웠다’고 했다. 리뷰를 쓰는 지금 처음부터 소설을 다시금 훑어보며 생각해보니 이 말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처음에 읽었을 당시 정말 충격적이고 황당했을, 결코 ‘빛’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편지라고 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짧디짧은 유디트의 편지가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난 뒤 돌이켜보니 마치 태어나서 ‘세상의 빛’을 처음 봤을 때처럼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고 표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는 평가를 생각해보더라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 않는가.
두 번째 목차는 여행 중후반의 이야기. 주인공의 눈과 귀, 촉감을 통해 전하는 것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대조들, 그리고 작가가 밝힌 집필의도인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그 희망의 서술’. 작가는 주인공과 함께 떠나는, 계획도 정처도 없이 헤매며 방랑하는 것 같은 ‘긴 이별’을 위한 이러한 여행 ㅡ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가 자주 찾았던 앨곤퀸 호텔이 있는 뉴욕(그는 자신에게 변화를 독려하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생각하며 일부러 앨곤퀸 호텔에 머무른다. 그리고 이 호텔 근처를 걷거나 버스나 열차, 택시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회상과 회한, 질문과 혼잣말을 하고 진저에일이나 캘리포니아산 포도주도 마시고 영화와 뮤지컬도 보고 망상에 가까운 영상들과 환각들을 보고 지역마다 노랗거나 검은 택시 색깔도 본다.), 전 애인 클레어 매디슨이 살고 있던 필라델피아 서쪽 피닉스빌, 클레어의 딸 베네딕트를 데리고 세인트루이스 서쪽 록힐의 집에 살고 있는 ‘한 쌍의 연인’인 그녀의 친구 집으로 떠날 거라며 함께 가자는 그녀의 제안에 승낙하고 그렇게 셋이서 떠난 세인트루이스, ‘한 쌍의 연인’과 함께 본 영화 ‘젊은 미스터 링컨’의 감독 ‘존 포드’를 꼭 만나보고 싶어 하던 그는 그녀와 헤어지고 콜로라도 주 덴버를 거쳐 도착한 애리조나 주 투손, 솔트레이크 시티를 경유하여 해발 천 미터가 넘는 고지의 에스터케이더, 드디어 만나게 된 당시 76세가 된 존 포드가 살고 있던 벨에어 ㅡ 에서 갖가지 감정들의 흐름과 변화, 만나고 마주치는 사람들, 사물들과의 관계, 그리고 거기서 발견해 낸 모든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것들을 보여준다.
초반에는 확실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내 유디트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영화 타잔을 보고 나오며 앞에 걸어가던 키 큰 여자에게 차 한 잔 같이 하자고 말을 건다. 함께 카페테리아에 갔다가 갑작스러운 두통으로 여자는 나가버린다. 그렇게 혼자 남은 그는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의 사람들을 구경하다 옆 테이블의 신문을 읽게 되는데 기사들이 무척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연민’이 일어나고 신문에서 일어난 사건마다 ‘수긍’이 갔으며 기사 속 모든 이의 입장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전혀 몰랐던 사람들과 장소들에 대해 ‘친근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그 모든 것들이 일시적인 감정이라며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금방 사라져버리는 사람의 감정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 거리에 서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도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다. 어떻게 보면 그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는 긴 이별을 위한 여행의 출발점에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그것이 모두 일시적인 감정이고 그것에서 벗어나려 하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행을 마친 후였다면 알 수도 있었을 ‘자신 안의 거짓된 목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여행 후 같은 일을 겪었다면 아마 그는 바로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체성’이나 ‘동질감’으로 행복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그는 여행을 막 시작했으므로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 읽었을 때는 ‘웬 두통? 여자가 뭔가 마음에 안 들었나?’라는 단순한 생각만 했다. 그러나 재독 이후 큰 시점에서 다시 이들을 바라보니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두통이 있다며 여자가 나갔을 때 그는 이미 물리적으로 ‘혼자’였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존 포드가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말했던 ‘혼자일 때’였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일 때’ 읽고 있던 신문에서 전혀 몰랐던 것들에 대한 ‘연민, 수긍, 공감대, 친근감’을 느꼈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솟아나온 ‘에고의 목소리’에 즉각 반응하고는 일시적인 감정이라 치부해 버리고는 밖으로 나가 거리에 선다. 에고에 침잠되어버린 그는 물리적으로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거리에 서 있음에도 오히려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내 맘대로 해석이지만 내 나름의 퍼즐 맞추기 놀이 같아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렇게 할 수 있게 해 준 작가에게 다시 한 번 놀란다.
내 맘대로 해석을 했던 또 다른 내용들이 있다. 미국에서의 두 번째 날을 맞았던 그는 제퍼슨 가의 한 스낵바에서 진저에일을 한 잔 마신다. 그러고 나서 테이블의 뮤직박스에 25센트짜리 동전을 집어넣고 ‘부둣가에 앉아서’를 선곡하던 순간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찼다가 피곤이 몰려오면서 하품을 한다. 하품하는 순간 그의 안에 ‘공동지대’가 형성되어 칠흑 같은 ‘총림의 영상’이 채워짐과 동시에 유디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질병이 재발하듯 들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내가 생각하는 ‘전체성’ ㅡ 혹은 해설서에 쓰인 ‘어우러짐’ ㅡ 이 그에게서 발현되려다가 ‘에고’의 등장으로 불가능해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시간과 돈, 방향감각에 대한 관념이 너무도 다른 그와 유디트의 대화를 보면서 시간과 돈은 정말 상대적임을 다시 한 번 느꼈고 그들의 대화를 회상하던 그가 기억이라는 것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고 한 부분에서 크게 공감했다. 확실히 기억은 과거와 미래를 혼란스럽게도, 왜곡시키기도, 사람을 오도하기도 하여 현재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낵바에서 나온 그가 마주친 한 학생을 보고 개별적인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부쩍 읽고 싶어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데 나는 이 이유를 바로 밝혀주지 않은 작가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소설을 다시 읽어보며 나름의 퍼즐 맞추기로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어렴풋이 얻은 것 같기는 하다. 물론 정답은 아닐 것이다. 화자가 받는 인상들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고 익숙한 것들에 대한 인상의 반복일 뿐이고 불안 상태에 대한 기억만 살아있다. 그 이유는 그가 매일같이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는 그런 반복된 관념과 관습에 사로잡혀 비교해볼 대상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많이 돌아다니지 못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자신과 다른 조건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못했기에 그는 그 불안 상태를 떨쳐내고 싶어서 비교 대상을 찾기 위해 개별적인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마 작가도 소설의 마지막에 화자가 존 포드와 만났을 때 ‘존 포드가 이야기를 시작했다’며 그의 생각이나 견해는 새롭지 않았지만 그가 그런 견해를 갖게 된 ‘계기’와 보편적인 것에 관한 질문에도 비약을 해서 ‘개별적인, 특히 개별적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틀어갔다’고, ‘언제나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가치 평가 없이 이야기했다’고 서술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존 포드가 ‘적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굉장히 불편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적을 가질 수밖에 없긴 하지요.’ 라고 말한 부분과 ‘사람들한테는 누구나 다 갑자기 자기 자신을 느낄 수 있는 행동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럴 때면 그래, 바로 이거야!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분이 들 때 ‘혼자일 때’ ㅡ 위에서 내가 연결시켜 보았던 바로 그 때 ㅡ 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그와 같은 일을 시도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다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기도 합니다. 어딘가 모르게 연출된 듯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그건 불행한 일이에요. 웃기는 얘기입니다.’ 라고 말한 부분과 클레어가 살고 있던 필라델피아에서 그들의 최종 목적지, ‘한 쌍의 연인’인 그녀의 친구 집이 있는 세인트루이스로 가기 위한 여정 중 첫 경유지인 피츠버그 남쪽 도노라로 가는 길에 오후 늦게 잠시 정차했던 주유소에서 불이 켜지는 순간 그가 데자뷰 현상을 느끼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더 이상 원래의 자기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클레어에게 말하는 부분이 있다. 예전에는 단지 고통스러운 기억만 떠올렸지만 이제야 활력 넘치는 추억 같은 걸 발견했다고. 자신이 느꼈던 최초의 작은 희망을 다시 몽상 같은 것으로 폄하하고 싶지 않다고, 사물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타고난 그의 본성 때문이 아닌 상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감각이 둔감해졌거나 그 순간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오히려 그런 기억들을 일부러라도 떠올리려고 한다고. 이 때부터 그는 버리고 싶었던 에고로 덮여 있던 과거의 자신을 변신시키고 싶어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욕망을 순간적인 감정이라 여기지 않고 미래에 대한 기쁨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그는 그 미래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나와는 다른 누군가, 즉 본래의 자신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미래 속에서 살기 위해 시간이 흘러 얼른 나이가 들었으면 좋겠다고 까지 한 걸 보면 말이다. 또한 그렇게 일몰 직전에 도노라의 한 호텔에 도착한 그는 평지처럼 보이는 언덕바지 위로 하얀 미광을 드리운 구름을 보던 순간 혼동과 감각의 현혹에서 메타포가 생겨나는 이치를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옛날 사람들이 자연현상을 대할 때 ‘나의 온 존재의 활동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는’ 식으로 자연과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치를 말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그의 여행은 여전히 초반부나 다름없었기에 그가 분명한 불쾌감을 느끼고 만다. 오후 늦게부터 일몰 직전까지 깨달았던 소중한 이치를 얼마 안 가 어두컴컴해질 때쯤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부분을 읽었을 때에는 위에서 내가 생각했던 ‘에고’를 버리지 못하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우리가 에고를 버리기만 한다면 적을 갖지 않을 수도, 우리가 느꼈던 최초의 작은 희망을 몽상 같은 것으로 폄하하지도 않을 수도 있는데 그걸 잘 못하기 때문에 적을 가질 수밖에 없고 에고를 버리고 온전히 자신을 느낄 수 있는 행동들을 할 때가 있는데도 하필이면 그럴 때는 ‘혼자일 때’가 많아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똑같은 행동을 해도 그와 동시에 에고가 발동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역할을 연기하는 모습이 나오며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순간들이 와도 잠시뿐 금세 에고에 잠식되어 그 이치를 역사, 사회적인 관습과 개인적인 과거에서 묻어나온 생각과 판단으로 헛소리라며 거부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상 내 맘대로 해석한 내용들이었다.
위에서 내 맘대로 해석해 본 대목들은 기본이고 아래에 나올 대목들도 나에게 의식의 전환을 가져다 줬다. 도노라 이후의 목적지인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호텔에서 화자는 언덕마루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실측백나무를 관찰하게 된다. 그러다 그 나무의 존재도 자신의 존재조차도 잊어버린 채 바람에 가볍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서로의 호흡이 맞닿고 서로가 하나가 되는 것을 감지한다. 그렇게 저항하기를 그만두고 실측백나무의 품 안에서 자신을 흔들리게 하고서 마침내 잉여의 존재가 되자 자신의 안에 있던 살인마 같은 태연함도 해소 되고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들과 궁금증들이 명료해지고 시간도 빨리 지나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바로 그날 밤 인디애나폴리스의 워런 공원에 앉아 클레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호텔로 돌아온 그는 허기가 느껴져 요기를 한다.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클레어를 보며 예전 그녀와의 만남을 반추하던 순간 그의 눈앞에 다른 시간,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방금 전에 체험했던 실측백나무의 놀이에서처럼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천국 같은 삶을 강렬하게 느꼈고 그 ‘텅 빈 세계’ 앞에서 강한 전율을 느낀다. 그 세계는 불안에 취약한 그의 성격과 허약함을 떨쳐내기 위해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곳이다. 그 곳에 들어간 이상 그는 예전처럼 자신과 다른 세계관을 가친 사람이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나고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메스꺼움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클레어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끼며 ‘얼마나 불행한 여자인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그런 체험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기도 하고 나도 그런 체험을 해 보고 싶다는 소망은 있다. 그러면 일상생활에서 시시때때로 불어 닥치는 폭풍 같은 사건들과 골칫거리들을 문제들로 규정하지 않고 사소한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어서이다.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다던 유디트가 마치 그녀를 찾아오게 하려는 듯 그에게 단서들을 보내고 그는 유디트와 만나서 영화감독 존 포드를 함께 만나러 간다. 그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영화로 제작하게 하려고 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작가가 그렇게 구성을 한 것일까. 어찌됐든 존 포드의 집에서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눈다. 특히 유디트와 존 포드와의 인터뷰 형식의 대화에서 아! 이거구나 하는 문장들이 많았다. 왜 항상 ‘나’ 대신에 ‘우리’라는 말을 사용 하냐는 유디트의 물음에 존 포드는 미국인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함께하는 공적인 행동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것 또한 ‘어우러짐 혹은 전체성’의 의식에서 나온 이유 같았다. 무엇인가 행하는 모든 것이 그저 개인적인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행동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는 거라니. ‘나’는 없고 ‘우리’는 있다는 말 아닐까. 그 ‘우리’라는 것 안에 ‘나’도 있기는 하지만 나 따로 우리 따로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있고 ‘나’는 그 안에서 개별적으로 어우러지고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생명체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는 고작해야 회상할 만큼 오래되지도 않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겪었던 것을 말하기를 좋아하고,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보다는 할 수 없었던 일이나, 가보지 못했던 곳에 대해,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고 한 것 같다. 이는 ‘개별적인 것’들 간의 비교를 위함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는 우리가 의식을 깨워 모든 것이 자연으로 환원되던 시대로 돌아가 자신의 현존까지도 잊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존속하여 태곳적부터 살아온 삶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역사라는 개념을 잊은 영원의 느낌을 잊지 않으며.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억압된 에고의 욕망을 자꾸 불러오는 ‘과거’에 대한 ‘회상’과 ‘집착’, 그리고 그로 인한 현재의 ‘판단’을 떨쳐내고 에고라 할 수 있는 ‘자아’와 허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실존’에 대한 고민과 번뇌에서 벗어나 우리 본연의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녹색의 하인리히’와 ‘안톤 라이저’도 꼭 읽어봐야겠다. 이제 이 책에 대한 나의 마지막 정리를 하겠다. 유디트가 화자와 어느 정도 애증의 관계였는지, 비뚤어진 에고의 애정표현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기이할 수 있는지, 순간순간 휘몰아치는 생각들과 사념들이 얼마나 가변적이며 되돌아 봤을 때 우습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하는지 등은 일상적이고 주변적이지만 정말 필요한 것들이기도 하다. 실측백나무의 놀이에 연이어 텅 빈 세계의 출현을 체험한 날 밤 그가 생각했듯이 이런 것들을 겪어 봐야 콤플렉스들이라 할 수 있는 것들에서 아예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ㅡ 그것 또한 에고의 발현일 수도 있기에 ㅡ 그것들을 배려하는 방법이나 자신에게 적합하면서도 남들 또한 나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적절한 생활방식을 찾아내는 것의 중요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이나 중요함을 알게 되기까지의 ‘예행연습’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 겪었던 ‘모든 것들’이다. 그리고 내게도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 책은 ‘너와 나의 다름과 차이의 개별 논리’에서 벗어나고, ‘변화’와 ‘과거와의 이별’을 통해 ‘에고인 나’와 ‘내 안의 타자’와 화해하고, ‘닮음’과 ‘어우러짐’의 ‘공존가치’에 주목하고, 극복과 치유의 길을 나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어휘들과 문장들, 그리고 꿈과 환상과 같은 표현들에서 헤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자칫하면 그것들에 휩쓸려 내려가 한없이 우울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에 그랬듯이. 그러나 마지막까지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혹은 다시 읽어가다 보면 알게 될 수도 있다. ‘사실’은 ‘픽션’에서 나올 수도 있고 ‘픽션’이 ‘사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텅 빈 것’에서 ‘온전함’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개별적이고 특별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완전히 독립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과연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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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페터 한트케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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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 페터 한트케
어둠과 적막함. 부정적이고 암울한 단어 같지만 본질과 내면을 꿰뚫어 보면 중요하고 필요하며 진정한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도 있을 공간의 완벽한 조건이 될 수 있다. 폭풍 속에서도 어떤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고요함과 내면의 빛을 지킬 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둠과 적막함 속에서 지극한 그것들을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화자의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235쪽밖에 되지 않는 글 안에 이토록 많은 것과 환상, 환각적, 편집증적이고 심지어는 자아분열적이라고까지 생각이 들지만 결국에는 자조적이고 달관적인 생각들과 시각들을 담고 있음에 놀랐고 이 책을 한 번 읽고 리뷰 쓰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벅차고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들었기에 재독을 하면서 솔직히 마음속에 짜증이 일기도 했음을 고백하고 싶다. 처음에 읽고 난 후 책을 덮고 느낀 점을 써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는 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뒤죽박죽 엉켜 있는 상태였고 느낀 바도 거의 없이 ‘그냥 난해하고 복잡한 내용’이라는 것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리뷰대회가 아니었다면 평소 나의 리뷰 방식대로 책 앞 속지 빈 공간에 대충 어려웠으며 환각적인 요소들이 많았다는 대략적인 내용으로 마무리하고 말았을 것을 리뷰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이상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시간은 촉박한데 눈물을 머금고 재독할 생각에 짜증이 났다. 그러나 한트케가 난해한 작가라는 선입견 없이 읽는다면 아주 유쾌해질 수 있을 거라던 추천사를 무작정 믿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책 속에서 계절마저 그에게 혼란을 일으켰던 것처럼 내게 큰 혼란을 안겨 준 이 책을 사랑하기로 하고 재독 후 리뷰를 쓰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도 명확한 줄거리를 잡지 못 했고 느낀 점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에 내가 화가 났을 때의 심정과 비슷한 상태이기는 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게 나의 최대 무기이자 장점이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책 여기저기 표시한 곳들을 앞뒤 여기저기 들춰가며 리뷰를 작성할 각오로 시작한다.
어느 여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던 날 저녁, ‘울타리 단지’ 또는 ‘잃어버린 섬’에 있는 ‘독수리 약국’에서 일하던 한 남자가 계획도 의도도 없이 여행을 떠나게 된다. ‘탁스함 약사’였던 ‘그’는 자주 가던 지하식당 손님들 중 세찬 빗줄기 속을 산책하듯 걸어가던 남자 둘을 우연히 자신의 차에 동승시키면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여유 있게 차를 모는 ‘운전기사’가 된 그는 뒷좌석의 두 사람과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그들에게 충분히 있었던 시간 덕분에 목적지도 없이 시작한 여행 도중에 과부인 여인숙 여주인을 만나는데 그는 ‘승리자’인 그녀에게 이유 없이 가혹한 구타를 당한다. 나중에 알고 보면 이 구타는 승리자인 그녀의 남편이 죽기 훨씬 전부터 그녀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남편 아닌 누군가를 다시 한 번 열렬히 사랑될 사람에게 가할 행동이었음이 밝혀지는데 이 구타가 나는 전혀 이해가 안 갔다. 구타를 함으로써 그에게 호감을 표시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것을 나중에 알고 나서도 그대로 수긍하는 그의 태도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게 수많은 터널들을 지나며 여행을 계속하는 그들의 여정에서 그들이 체험한 것은 세 사람 다 제각각 기분은 다르더라도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들의 의식이 서로 비슷했기 때문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롭고 엄청나게 흥미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도 이와 똑같지 않을까. 삶이라는 여정을 지나오며 겪었던 것들에 대한 기분은 제각기 다르지만 그럼에도 앞으로의 삶은 여전히 새롭고 흥미 있을 거라는 사실이 우리들의 희망이기 때문에. 그리고 속도와 관계를 맺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라고 말했던 예전의 스키 영웅의 말에도 공감이 갔다. 최대한으로 가능한 속도에 단호히 나 자신을 내밭긴 채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정한 나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속도에 맞추지 못 하거나 거스르려고 할 때의 우리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안쓰러운 상태인지 알지 않는가.
드디어 마지막 터널을 통과한 후에 만난 스페인의 상상의 도시 ‘산타 페’에 도착한 세 사람. (터널들을 통과했다는 것을 책을 처음 읽을 때에는 인지하지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독했을 때에서야 터널들을 통과하며 여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 터널들 또한 가상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축제를 관람하게 되는데 관객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시인은 잃어버렸던 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녀는 ‘만인을 위한 존재’인 축제의 여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어린 여왕인 딸은 경찰관 두 명에서 체포되어 끌려간다. 그리고 시인과 그의 친구 스키선수도 경찰차를 타고 사라지게 된다. 그 또한 축제행사에서 또래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도둑질 놀이를 따라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간 아들의 얼굴을 때린 이후로 그가 쫓아낸 것과 다름없이 집을 나갔던 아들을 발견하는데 아들은 축제 행렬에서의 악사들 중 한 명으로 아코디언 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에게 한 번도 알은체를 하지 못하고 그렇게 스쳐간다. 신기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의 이 날 사건에 대한 회고였다. 아들이 금세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것부터 그곳에서 겪었던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조금도 불행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다 그런 거지!’라고 생각하고 말았다는 것. 그러나 그 이후에 ‘중요한 것은 거기 밤바람 불어오는 야외에서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말을 읽은 후에야 조금 이해할 수는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고 ‘현재’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야기꾼인 그와 시인, 그리고 전 스포츠 스타 세 명은 ‘산타 페’에 계속 머물면서 비슷한 방식으로 실제로 일을 시작한다. 스텝 지역의 노천 주점을 겸하는 여인숙의 원래 운영자였던 시인의 딸이 체포된 후, 그 낡은 여인숙에 관련된 일들을 각자 맡아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부인 여인숙 여주인을 찾아 나서고자 한다. 그의 추적이 시작되면서 그는 까마귀 주둥이에서 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사과’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적도 있고 먹이를 통째로 삼켰던 부엉이가 뱉어낸 ‘생쥐의 털’이 머리에 가볍게 스쳤을 때도 있다. 이 머리에 가해진 가격은 소설 초반부 ‘숲속에서의 일격, 깜깜한 어둠 속에서의 일격’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런 순간에 분명해지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완전히 변화된 존재가 되기를 끈질기게 강요하는 이 새로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갈망’이다. 마침 이러한 갈망은 현재 나에게도 너무 필요한 것이었다. 물론 완전히 변화된 존재가 되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끈질기게 강요하는 상황은 계속 밀려오기에 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걸 갈수록 실감하고 있기에, 그리고 그것 때문에 며칠 밤을 거의 잠 못 자며 글로 풀어보려고도 해 봤고 주위의 믿을만한 사람들,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의 대화로도 풀어보려고도 해 봤지만 완전한 해결책은 그것에서 찾지 못 했기에 나에게 더욱 절실한 것이라 더 크게 다가왔다. 그 갈망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 나에게도 일격이 필요할까.
후각이 특히 발달한 우리의 화자인 그는 ‘늘 코를 벌름거리고’ 있어야 한다며 매순간 무언가를 ‘재발견’하기 위해 몰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재발견이라는 것은 첫 번째, 중세 서사시를 읽은 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승리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실패자’에게 정해진 운명이기에 ‘승리자’는 처음부터 ‘실패자’였으며 서사시에서의 모험이 무사히 끝나면 ‘패배자’가 마침내 ‘승리자’가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스텝 지역의 식물계에 있는 전혀 다른 것을 다른 의미의 ‘에센스’로 이해하게 되는데 ‘텅 빈’ 라벤더의 뼈대에서 ‘아주 강한’ 라벤더 향기가 나고 ‘빈’ 야생 양귀비 껍질에도 양귀비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수천 개의 길들을 말을 타고 어디든 달려야 모험이 끝날 수 있다는 것과 ‘그의 여정을 통틀어 태고의 거대한, 가장 큰 짐승’은 고슴도치 한 마리임을 알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세 번째이자 결론적으로, 그가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벙어리가 되어 버렸던 순간들과 비교되어 더욱 분명히 인식 되는 모든 ‘이야기하기’와 그의 일상생활의 반경이었던 ‘울타리 단지’ 또는 ‘잃어버린 섬’에서 벗어나 있으며 광활한 상상의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스텝 지역’이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을 새롭게 발견하고, 변화를 만들어내고, 예리하게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조금도 정신을 팔지 않은 상태로 눈을 들어 ‘독수리의 눈으로 본다’는 의미에서의 우러러보도록 하여 안과 밖이 서로 파고들어 완전히 일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스텝 지역의 풍부한 식물, 광물들 중에서도 버섯을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는 그가 인류의 마지막 공통적인 대화 주제는 천차만별의 버섯 종류들이 될 것이며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가능한 공통의 모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입장에서는 화자가 말한 ‘재발견’이라는 것들이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언뜻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첫 번째에서는 ‘승리’와 ‘실패’, ‘텅 빈’것에서 나오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처럼)아주 강하고 진한 에센스’의 역설, 두 번째에서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과 당연하지 않게 여기던 것들 사이의 경계와 혼란,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생각의 필요성 같은 것들 말이다. 마지막으로는 문득 들었던 생각인데, 스텝 지역에서 겪었던 환상 같은 모든 경험들이 그의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야기는 환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사실’과는 다르다. ‘사실’은 중립적이지만 ‘이야기’는 개인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실’에 근거해서만 살기보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에게 고통을 줄지언정 종국에는 성장시키고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늘 코를 벌름거리고’ 있어야 매순간 무언가를 ‘재발견’하기 위해 몰두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는 그의 도서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활한 스텝 지역을 가로질러 가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찾지 않는 나날이 왔는데 그 이전에 수많은 탐색 과정들(까마귀, 고슴도치 / 버섯 / 야생국화, 아니스, 라벤더, 양귀비 / 나비, 개미, 말벌, 말메뚜기, 나방, 벌들에 대한 관찰)이 있었기에 아무것도 찾지 못해도 자유로움을 알기에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는 대목에서는 아! 이거구나! 싶었다. ‘과유불급’을 제대로 느낄 수 있으려면 지나치리만큼 몰입도 해 보고 행동을 해 봐야 거기서 오는 인생과 삶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상처도 입고 좌절도 하고 이래저래 크게 데이며 자아 정체성의 혼란도 겪어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혜와 행복, 기쁨, 평화를 체험하게 되면 욕망과 갈망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비로소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그는 어느 느지막한 오후, 햇빛이 쏟아지면서도 선선할 때 민둥산이나 다름없는 작은 점톳빛 언덕기슭에서 바람이 들지 않는 곳을 찾아 쉬다 두 언덕 사이에 팬 얕은 굴 바닥에서 쉬고 있었다. 그 바닥에 누워 있다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 있는 점토벽에서 ‘벽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친 눈을 쉬게 하면서 천지창조부터 태고의 산맥, 아득한 선사시대의 산비탈, 현세의 전쟁들, 스스로 찬란히 빛나는 것, 빛의 근원, 가지각색의 노란색으로 변화하는 점토, 구현된 빛, 사랑하는 조상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도마뱀, 귀뚜라미, 그와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 그를 겨냥하는 사냥꾼, 메뚜기, 허니문 자동차로 꾸며진 산타나 지프차, 그 차를 운전하던 아들과, 아들의 신부가 된 시인의 딸인 축제의 여왕까지 목격한다. 엄청난 과거의 이야기들과 망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환상들이다. 이 모든 이야기들과 환상들을 체험하고 난 후 그는 비로소 버섯 아래의 텅 빈 지하 세계, 점점 더 짙어가는 어둠 속, 끝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죽음의 땀’이 쏟아진다. 이 ‘죽음의 땀’이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그의 현실 세계인 자투리 세계에서 걸어 나와 가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광활한 스텝 지역으로의 여행을 끝내는 하나의 의식으로서 물끄러미 ‘벽감’ 바라보기로 모험을 완성하고 난 후 스텝 지역에서 점점 빠져 나오며 자투리 세계로의 귀환을 위한 하나의 의식으로서 이 ‘죽음의 땀’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텝 지역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보다 그곳에서 빠져나와 거의 텅 비어있거나 점점 좁아지고 뾰족해지며 작아지는 자투리 땅 위로, 즉 ‘자연에서 빠져나와 대도시로 접어드는 행군이 더 큰 모험이며 완전한 모험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 세계, 자투리 세계에 도착하고 나면 스텝 지역으로의 여행 이전에는 결코 시도할 수 없었으며 애써 기피해오던 것을 직면하고 그것에 도전하며 자연에서 얻은 여유와 마음의 공간을 찾게 됨에 따라 그가 흘렸던 ‘죽음의 땀’이 식어가며 전율이 일 듯 몸이 떨리게 되는 건 아닐까. 그것은 과거와의 화해를 상징하는 과거 자아의 죽음으로 흘리는 땀 같은 아니었을까.
‘역설과 대조, 망상과 환상,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간계를 비롯한 천지계, 식물, 동물, 사물계에 대한 관찰, 시공간 초월’의 내용이 대부분인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내게 좋은 기회였고 끝까지 읽은 것과 재독한 것은 힘든 도전이었다. 리뷰 초반에 고백한대로 ‘화’와 ‘짜증’으로 시작했던 내 감정이 이 리뷰를 작성하며 다시 한 번 책을 훑어보는 중간 과정과 끝을 향하고 있는 지금은 ‘작은 알아차림’과 그것으로 인한 ‘고마움’으로 변해 있다. 이를 보면 우리의 화자가 잘츠부르크 공항의 숲가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일격을 당하리라는 것을 전부터 반쯤은 의식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듯이 아마 나는 페터 한트케의 암호와 같은 언어들에서 일격을 당하리라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리뷰 중반에 썼던 ‘완전히 변화된 존재가 되기를 끈질기게 강요하는 이 새로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갈망’을 이미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 나는 정말 완전히 변화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것을 강요하는 상황과 세상에 거부반응과 자기방어기제, 심하게는 자기합리화까지 내세우고 있었던 것을 인정해야겠다. 그 배후에는 이기적인 자아도 있을 수도 있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의 일면일 수도 있다. 완전히 변화된 존재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안다고 생각해 왔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다. 화자도 그런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고뇌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포용하고 초월하는 모습’들을 보여준 걸 보면 내게도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그냥 그런 것’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서술자와 이야기를 나눈 에필로그에서 그는 그의 스승 파라켈수스의 말대로 ‘귀중한 것을 눈앞에 목격한 자는, 바로 그 순간 벌써 또 다른 귀중한 것으로 눈길을 돌린다’고 말했던 대로 본질적으로 달라지기 위해서라면 어느 곳에 서 있든, 어느 곳을 걷고 있든 ‘다음의 모험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며 그 ‘출발점’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내줄 수 있을 거라고 했듯이 아마 나도 그 ‘출발점’을 찾아 ‘모험’을 떠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런 완전한 모험기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그냥 사랑 이야기’와 ‘모험 이야기’가 되어 말이 아닌 글로 기록해야만 하며 그 이야기들에는 반드시 ‘멈추다’라는 단어를 첨가해야만 할 것이다. innehalten. ‘완수하다, 유지하다’의 의미를 가진 이 아름다운 독일어 단어가 가진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의 모험을 ‘완수’하더라도 또 다른 모험을 할 준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의 마지막쯤에서는 화자의 존재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보는 그런 인간형상의 존재가 아닌 그 존재를 넘어서는 자기 안의 또 다른 존재를 알아채고 그 존재가 자연으로 모험을 떠나게 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화자가 서술자에게 “누군가가 나가고, 집 안은 적막해졌소. 하지만 아직 뭔가가 부족하오. 나는 아직 어느 특정한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지 못했소.”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랬는데, 이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도 처음에는 도통 이해가 안 갔다. 그러나 공허해 보이는 이 문장들이 분명히 ‘에센스’를 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나의 특유의 집요함으로 이 문장들에 파고들어 볼 생각으로 리뷰를 거의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오다 보니 내 나름대로 알 것 같기도 한 것을 알아냈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무언가에 집착하게 하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 하는 자아는 나의 본질이 아니기에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모험을 떠나기 위해 ‘좌절하고 무력해진 자아’를 상징하는 ‘적막한 집’을 나선다. 그 존재가 모험에서 탐험하는 것들은 모두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유로움’ 속에서 그 존재와 관계를 맺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서로 사랑’한다. 이 모험의 ‘완수’는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으므로 나의 생각들과 육체가 현존하는 한 끝나지 않는다. 이를 위해 그 존재는 문을 잠그지 않기에 끊임없는 모험을 ‘유지’하며 모험을 다녀올 때마다 나의 육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경탄’ 속에서 깨어날 수 있게 된다.
바로 거기서, 그 모험에서, 다채롭고 다양한 모든 생명들이 존재하는 광활한 스텝 지역에서, 거대한 자연에서, 현실 세계가 아닌 주변부에서 우리는 잠시 동안이라도 자신에게 경탄하고 감격할 수 있고 그 감각이, 그 작은 알아차림이 이 작디작은 자투리 세계,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는 힘을 준다. 어쩌면 자아를 끝까지 놓지 못할 나의 생각들과 육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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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공주 세라 - 어린 시절 읽던 소공녀의 현대적 이름 걸 클래식 컬렉션 1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지음, 오현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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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작은 공주 세라 –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난 상상하는 게 좋아. 그것보다 재미있는 건 없거든. 마치 요정이 되는 기분이야. 상상에 몰두하면 상상하는 모든 게 진짜처럼 느껴져.”
“모든 게 이야기야. 너도 이야기고, 나도 이야기야. 민친 교장도 이야기지.”
주인공 세라의 별나면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인 이 ‘상상’과 ‘이야기’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세라는 다락방에서 고되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모두 누리는 동시에 더 깨끗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다락방 창가로 꼽고 그런 경관을 경이롭고 아름답게 볼 줄 아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이 ‘소공녀’로 알려진 책과 애니메이션의 원작이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다. 아동 권장도서에서나 봤을 법한 ‘소공녀’를 사실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었고 일본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서 우리나라에서도 방영이 되었다고 하는데 만화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소공자’와 비슷한 제목의 ‘소공녀’라는 책 내용이 부자로 살다가 가난해 졌던 소녀가 그 가난을 극복하고 다시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정도의 줄거리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고 이 책 또한 ‘하이디’처럼 알라딘 단독 독자 리뷰대회가 아니었다면 읽어 볼 생각도 없었던 책이었다. 성인 권장도서들 중 여느 문학소설처럼 고민해 보고 자문할 거리고 생각할 거리도 상당했던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랠프 크루’ 영국군 대위와 또한 그를 지극히 사랑하는 그의 사랑스럽고 조숙하고 용감하고 친절이 몸에 밴 외동딸 ‘세라 크루’는 인도에서 귀족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살다가 세라의 짧은 인생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단 하나의 문제였던 언젠가는 가야 할 ‘그곳’에 가게 된다.
온갖 분야를 넘나드는 독서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사랑하는 세라는 요즘 말로 하면 대단한 영재였다. 영어에 프랑스어, 독일어, 힌두스타니어까지 능통한 소녀다. 거기에 겸손하고 누구에게나, 심지어 동물과 사물에게도 차별 없이 공손하고 예의 있게 대하고 어떤 슬픈 일이나 힘든 일이 닥쳐도 불평하거나 울며 화내기 보다는 차분하고 의연하게 상황에 대처하여 품위를 지키며 해결해 나가는 대단한 통제력과 인내심을 지니고 있어 성인들도 본받을 만한 소녀다. 더욱 놀라운 점은 항상 의연하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과 상상하는 것이 잘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고 인정을 하고 그럼에도 연습을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마음에 와 닿았고 그래서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매일 그렇게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을 그려낸 작가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봤는데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결혼도 하고 미국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과 그녀가 바로 ‘소공자’의 작가이기도 하고 그 유명한 ‘비밀의 화원’의 작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 맨체스터에서의 불우했던 생활이 상상력을 자극하여 글을 쓰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라가 힘들게 지냈을 때를 잘 묘사할 수 있었나 보다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대 생활을 살고 있는 내게 의탁할 곳 없는 무일푼 비렁뱅이가 되어 처참한 생활을 할 때의 세라도, ‘마법’이 일어난 것처럼 다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고 공주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세라도 완벽히 공감하기가 어렵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내게 교훈을 주는 점들이 너무도 많았다. 하인이나 굶주린 거지같은 사람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존중해서 대한다는 것, 누구나 참고 견뎌야 할 줄 알아야 한다며 자신도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지금 전쟁 중이라고 상상하면서 단 한 마디의 앓는 소리나 불평 없이 참고 견딘다는 것,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그 ‘상상력’으로 처량한 상황을 긍정적이고 낭만적으로 볼 줄 아는 눈으로 상상에 몰입해서 현실처럼 보고 느낄 줄 아는데다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고취시켜 삶의 큰 기쁨을 알게 해줄 줄 아는 것, 자신에게 근사한 일이 많이 생긴 것도 자신이 그렇게 부유하고 살 수 있고 잘생기고 다정하고 똑똑한 아빠가 있다는 것도 모두 다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렇기에 좋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얕보거나 그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하는 법이 없는 것, 외모나 재산보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지가 아는 것, 분노가 일었을 때 발칵 성질을 내고 싶은 충동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님과 발끈 화를 내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들보다 분노를 조절할 만큼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상대방에게 되받아 한 대 때리고 싶은 걸 꾹 참고 날카로운 말을 뱉지 않기 위해, 똑같이 무례하거나 악의에 찬 말을 던지지도 않기 위해 얼른 다른 생각을 해야 함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을 몸소 실천한다는 것, 가엾고 항상 굶주려 있는 부엌데기 베키를 위해 ‘자그마하게 꿍칠 수 있는 요깃거리를 찾는 일’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 배운 걸 다시 익히지 않으면 곧 잊어버리게 될 거라며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온갖 잔심부름을 한 후 빈 교실에서 혼자 공부하려는 의지를 굳건히 하는 것, 모든 일에는 우리가 모르는 좋은 점이 있을 거라며 악독하고 탐욕스러운 민친 교장한테도 좋은 점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줄도 알고 역경이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한다는 것도 아는 것, 다락방의 쥐 한 마리에게도 존재감을 인정하고 쥐로 살아가기도 힘들겠다는 생각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세상 만물은 말로 이루어지지 않은 언어를 이해하고 모든 것이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리 없이도 다른 영혼에게 의사를 전달한다고 생각해서 쥐 한 마리나 참새들과도 친구가 되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바꿀 수 없는 사실은 누더기와 넝마를 걸쳤어도 자신은 여전히 공주라고 확신하는 '불굴의 의지'와 상황이 최악으로 가기 전에 뜻밖의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며 최악은 절대 닥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긍정 마인드'를 갖고 있는 것, 구박과 수모를 주는 민친 교장에게 오히려 공손한 말투로 교장이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며 결코 복수하려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 ‘친절’이야말로 다른 사람에게 가치 있는 행위라고 말하는 것, ‘마법’이 일어났다고 믿고 멋지고 신비로운 이야기의 세계에 산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들은 ‘그까짓 일’로 치부할 수 있는 것 등이다.
또한 세라 아버지의 친구였던 ‘인도 신사’인 톰 캐리스포드 씨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었다. 다이아몬드 광산 사업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사망한 친구 크루 대위에게 너무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친구에게 삶을 망치게 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사기꾼처럼 도둑처럼 도망쳤다는 죄책감과 후회 속에서 살다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어떻게든 친구의 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한 점과 그는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막대한 수익을 얻게 되었음에도 그 재산이 자신의 것만은 아니라고 자책을 하고 온전히 자신 것도 아닌 많은 재산은 자신에게 고통만 줄 뿐이라고 하소연하는 점이다. 이러한 대목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과연 부처 외에 얼마나 될까? 나라면 할 수 있을 생각과 고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재산 앞에서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웬만하면 울지 않는데 감정이입이 되어서 나까지 울었던 대목이 있었다. 세라가 아빠를 잃기 전 공주처럼 대접받고 살 때 베키를 돕자 베키가 어떻게든 세라의 호의에 보답하고 싶어서 세라의 열한 살 생일파티 때 쓰레기통에서 어밀리아 선생님이 버린 카드를 주워 생일축하 카드를 만들어서 주는데 세라가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아 베키를 꼭 끌어안으며 목울대가 왜 뜨거워지는지 자기 자신은 물론 누구에게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고 할 때, 어느 날 심부름을 나갔다가 배수로에 떨어져있던 4펜스로 근처 빵집에서 빵 네 개를 사게 되는데 빵 여섯 개를 넣어주는 주인아주머니에게도 감동을 받고, 그 빵을 가지고 나가서 길에서 만났던 더 굶주린 소녀에게 빵을 다섯 개나 주고 자신은 하나만 먹는 모습에서, 그리고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주인아주머니가 빵을 열두 개 줬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모습에서 감동 받아 눈물이 났다. 알고 보니 더 굶주린 소녀는 이 소설의 마지막 제목 ‘앤’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세라를 봐서라도 계속해서 빵을 주다가 주방 일을 시켜보니 착실하게 잘 해서 같이 지내게 된 것이었다. 다시 공주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세라가 민친 사립 여자 기숙학교에서 벗어난 후 빵집에 들렀다가 앤과 마주치게 되는데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세라를 앤이 하염없이 바라보는 장면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리뷰대회 덕분에 읽게 됐던 ‘하이디’에서도 하이디가 클라라와 '다락방'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세라도 그녀의 세 친구 베키, 로티, 어먼가드와 '다락방'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걸 보니 '다락방'이라는 장소가 신비하게 느껴졌고 이지성 작가의 ‘꿈꾸는 다락방’도 생각이 났다. 그 책에서도 중점적으로 다루는 주제가 바로 ‘생생하게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Vivid Dream = Realization)’인데 작은 공주 세라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 이외에도 세라가 ‘바깥세상’이라고 부르는 곳에 ‘생각들’이 모여 있어서 사람들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린다는 상상을 즐겨했다는 부분에서는 한 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베스트셀러 ‘시크릿’도 떠올랐다. 세라가 말하는 ‘바깥세상’을 나는 '우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여울 작가의 추천의 글도 나에게는 인상 깊었는데 어린 시절 처음으로 책 주인공을 현실에서 꼭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 인물이 바로 세라였다고 한 것과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세라의 기품이 우러나오는 이유를 세 가지로 아주 잘 정리해서였다. 그리고 프랑스혁명 당시 모두가 자신을 비난할 때조차 꼿꼿함을 잃지 않았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멋지다고 생각한다는 세라 덕분에 역사 속의 그녀는 좋아하지 않지만 ‘세라가 바라보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좋아할 수 있게 됐다고 한 부분과 요즘 시대에 맞게 바꿔 읽었으면 하는 것으로 아버지가 세라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남자로 태어났다면 이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을 꼽은 부분도 좋았다.
또한 위에도 언급했던 상상하기로 성공하는 법을 다뤘던 ‘시크릿’이나 ‘꿈꾸는 다락방’ 혹은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다룬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을 소설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아서 인상적이기도 했다.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갈수록 '상상하고 즐겁게 노는 시간'이 부족해지는 아이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기도 하고 그런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정여울 작가의 추천의 글에서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소중한 성찰의 시간과 ‘상상’과 ‘이야기’의 힘과 매력에 빠져서 살아볼 시간을 선물해 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그 어떤 위험과 고난 속에서도 오직 ‘이야기’를 ‘상상’할 수만 있다면, 온갖 배고픔, 아픔, 외로움마저도 이겨낼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내가 새롭게 다짐하게 된 것들이 있다.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고 싶어서 ‘가짜 공주라 하더라도 이제부터 공주가 된 것처럼 행동하면 어떨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작은 선행, 작은 일들이 다른 이들에게 큰 선물을 나눠주는 것처럼 생각하면 많은 걸 베풀게 된다고 생각했던 세라. 그런 세라를 향해 서술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을 돕고 그것에서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기뻐하는 이유는 조물주가 세라를 ‘베푸는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베푸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손도 마음도 만인에게 활짝 열려 있게 마련이다. 빈손인 경우에도 마음이 늘 충만하니 사람들에게 많은 걸 줄 수 있다.” 정말 대단한 문장이다. 만일 내가 세라처럼 ‘베푸는 사람’으로 만들어 졌다면 그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게 만들어 졌다 하더라도 늘 나의 손과 마음을 만인에게 활짝 열고 살 것이다.
살다 보면 유쾌하고 다정한 웃음이 가장 큰 도움이 될 때가 있고 낯선 사람이 보내는 미소에도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음을 세라가 익히 알았던 것처럼 나도 이러한 진리를 명심하고 살 것이다.
세라가 보내는 다정한 시선이 언제나 지치고 우울한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처럼 나도 그러한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 것이고, 세라가 겪었던 시련과 모험만으로도 큰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듯이 앞으로 겪을 시련과 모험들을 피하려거나 원망하기 보다는 큰 재산으로 여길 것이다. 나도 그렇게 할 것이고 우리 미래의 아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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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디 걸 클래식 컬렉션 1
요한나 슈피리 지음, 이경아 옮김 / 윌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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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하이디 – 요한나 슈피리
‘알프스 소녀 하이디’라는 말은 알았어도 정작 책은 읽지 않았다가 이번 알라딘 단독 독자 리뷰대회로 읽게 된 책이다. 리뷰대회 아니었으면 읽을 생각도 없었던 책인데 읽어보니 참 좋았다. 어떻게 보면 뻔한 동심을 다룬 동화 같지만 다 읽고 나면 그런 생각은 없어진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실제로 행동할 수 있는 어린 소녀 하이디’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기본이고, 신은 믿지만 종교는 아직 없는 내가 읽었을 때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가끔 나오는 이 책에서 처음에는 ‘아니 웬 하느님? 웬 기도?’라고 생각하다가 소설을 읽으면 읽어갈수록 나중에는 전혀 거부감 들지 않게 하는 신기한 힘이 있어서 신과 운명을 더욱 믿게 되는 것은 덤이다. 물론 아직도 종교를 가질 수 있을 정도의 감화나 경험은 없어서 신의 존재를 믿는 것에서 발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그런 계기가 생기면 종교는 가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나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이 소설이 편하게 읽힐 수 있었던 것은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눈에 보이는 듯한 생생하고 반복적인 묘사와 하이디의 말하기 힘든 매력에 푹 빠져서 인 것 같다. 남이 행복한 데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소녀, 조금이라도 어두운 면이 보이는 사람을 절대 지나치지 못하게 타고난 소녀, 남을 돕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소녀, 쉴 새 없이 새로운 발견을 하는 소녀, 자연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여 하나씩 살필 줄 아는 소녀. 너무 순수하고 사랑스럽지 않은가. 그리고 데테 이모가 하이디를 할아버지인 알프스 삼촌에게 떠맡기고 갔을 때 할아버지 집에 뭐가 있는지 보고 싶다며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하이디의 눈빛을 보고 맹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알프스 삼촌도 매우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속사정이 있었던 관계로 겉보기에는 무뚝뚝해 보이고 험상궂지만 염소들처럼 뛰어다니고 싶다는 하이디에게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되지.”라고 말하는 모습이나 어디서 자야하냐는 소녀의 물음에 “자고 싶은 데서 자렴.”이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자유분방하고 소박한 하이디를 제대로 키울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제제만씨가 출장을 갔다 돌아와서 미스 로텐마이어로부터 하이디에 대한 안 좋은 말을 들었을 때에 “아이의 재미난 행동을 결점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던 부분에서 감동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반성도 했다. 지금 학원선생님으로 일하는 내가 ‘나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나?’를 돌이켜 보게 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공부를 시키려고 하다 보면 아이들의 장난이나 헛생각, 헛짓에 대해 나무라고 제지를 하는 입장에 있다 보니 이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되뇌어 봤었다. 결론은 그런 행동을 제지는 하되 제제만씨의 말처럼 ‘결점으로 여기지 말자. 그런 아이들을 미워하지 말자.’이다. 나도 알프스 삼촌이나 제제만씨처럼 곧 태어날 아기와 그 다음의 미래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교육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생각과 의지를 굳히기만 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니까 그런 어른이 될 거라고 다짐을 해 본다. 교육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이 소설에는 알프스 삼촌과 제제만씨 외에도 훌륭한 어른의 모범이 또 한 명 있는데 바로 제제만씨 어머니인 제제만부인이다. 하이디가 보기에 그녀는 ‘어떤 상황이 닥치던 만사를 원만하고 행복하게 푸는 방법을 찾아내는 분’이다. 내가 만난 적도 겪어본 적도 없는 인물이지만 하이디의 안목에 찬성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을 내게 하고 실천하게 해 준 하이디와 저자 요한나 슈피리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소설 속에서 나의 마음을 특히 흔드는 장면들이 있었다. 하이디가 할아버지와 둘이서 사는 통나무집에서 페터의 할머니인 그래니를 만나러 가기 위해 썰매를 태워주고 하이디가 춥지 않도록 세심하게 대하는 알프스 삼촌의 태도가 매우 귀여웠고 썰매 타는 모습을 읽을 때는 나도 타보고 싶을 정도로 너무 재밌겠다고 느꼈다. 어렸을 때 쌀 포대자루를 타고 작은 언덕배기에서 놀기는 해 봤지만 하이디와 삼촌이 타는 썰매와는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 신날 것 같다. 데테 이모의 손에 이끌려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좋은 사람들, 특히 클라라를 만나고 알게 되고 촉촉하고 맛있는 롤빵을 먹으며 지내서 좋은 날도 있었지만 하이디가 진정으로 원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는 별이 총총 빛나는 하늘 아래로 난 길 위의 평화로운 작은 집이 그리운 하이디가 울면 안 된다는 미스 로텐마이어의 한 마디 때문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참는 부분을 볼 때 너무나 안쓰러웠다. 다행히 내게는 아직까지 그런 슬픈 경험이 없어서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런 비슷한 경험이라도 있었다면 아마 함께 울었을 것 같다. 하이디의 증상을 정확히 진단해 주었던 의사 클라센씨 덕에 ‘드디어 집으로’ 갈 수 있게 된 하이디의 눈에 들어온 낯익은 산봉우리들이 내 눈에도 들어온 것만 같았고 ‘그 산들이 오랜 친구처럼 하이디에게 오래간만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고 할 때 나도 그 인사를 받는 것 같아서 자연을 만끽하는 느낌을 받았다. 제제만부인의 덕에 거의 하룻밤 만에 철자를 다 익히고 글을 읽을 줄 알게 되고 나서 그녀에게서 선물로 받은 그림책 한 권을 할아버지에게 읽어주다가 할아버지를 다시 아랫마을 이웃들과 교회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줬던 대목도 인상 깊었다. 실제였다면 한 사람이 인생을 바꿔준 것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염소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하이디도 너무 귀여웠지만 저자가 염소의 생김새나 행동을 묘사한 부분들도 마음에 들었다. 염소들이 하이디나 클라라에게 머리를 비벼대는 부분을 읽으면 마치 나도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교훈적인 내용도 들어있어서 아이들이 읽기에도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클라라가 하이디와 함께 지내면서 하이디를 뺏겼다고 생각한 페터가 클라라의 휠체어를 일부러 골짜기 아래로 떨어뜨려 박살나게 한 후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파수꾼’인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던 점과 제제만 부인과 휠체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당장 털어놓는 것이 고생을 훨씬 덜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점, 그리고 아무리 호화스럽고 아름다운 집이나 침대가 있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통나무집이라도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 있고 건초더미라도 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며 잠들 수 있는 잠자리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데테 이모가 거의 강제로 프랑크푸르트의 제제만씨네 집에 가서 클라라와 함께 지내게 되었을 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지만 어떻게든 적응해 보려고 눈물을 삼키며 참기도 하지만 ‘마치 자유를 향해 창살 사이로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새장 속 야생의 새 같은’ 하이디가 향수병 때문에 몽유병까지 앓게 되어 읽고 있던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팠다. 대자연의 품속에서 자유롭게 지내던 하이디에게 어느 곳을 둘러봐도 돌, 벽, 탑들 밖에 없는 도시에서 지내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지금 시대에 온갖 문명의 이기의 혜택을 누리며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가 스위스에서 하이디처럼 살게 된다면 그 또한 힘든 일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은 습관과 적응의 동물이기에 하이디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는 것도 내게는 별난 경험이었다. 그리고 하이디는 향수병에 걸린 반면 하이디 덕에 클라라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개인 과외 수업 시간이 더 이상 지루하지 않고 언제나 웃을 일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모순도 내게는 하나의 생각할 거리였다. 누군가에게 득이 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독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제제만부인의 말에 따르면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기에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게 뭔지 아셔서 우리가 뭔가를 기도하며 부탁해도 우리에게 옳지 않으면 그걸 주시지 않고 그럼에도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계속 기도를 하면 더 좋은 것을 적당한 때에 주신다’는 부분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생겼었다. 과연 소설을 끝까지 읽다 보니 하이디가 집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을 때 하느님이 하이디의 기도를 바로 들어줬다면 이 소설의 마지막처럼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었다. 게다가 제제만 부인의 말을 믿고 기도를 계속해 왔던 하이디가 외동딸을 잃고 스위스로 여행을 왔던 제제만씨의 친구인 의사 클라센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혼자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면 하느님에게 말해보라고 하지만 클라센이 슬픔을 보낸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이에 하이디는 자신 있게 “일단 기다리셔야 해요. 하느님이 그 슬픈 일로부터 좋은 것을 준비해두고 있다고 계속 생각하세요.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셔야 해요.”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고 신에 대해 감화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페터가 클라라의 휠체어를 일부러 박살낸 후 제제만 부인과 나눴던 대화중에서 “너는 클라라에게 해코지를 하기는커녕 큰 도움을 주었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바꾸는 방법이란다. 잘못을 저지르고 그 대가로 괴로움을 당한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었어.”라는 부분에서도 ‘아~! 정말 그렇구나!’했다. 그래서 신은 믿지만 종교는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언젠가 계기만 생긴다면 종교를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 꼭 한 번은 스위스에 여행하러 가서 하이디가 살던 되르플리에 방문하고 책에서 봤던 경관들과 자연들을 만나보고 싶고 되르플리로 하이디를 보러 여행 왔던 제제만 부인이 마음에 들어 했던 골짜기와 산봉우리들도 직접 보고 싶고, 푸른 하늘이 펼쳐진 특별한 ‘식당’에 가서 부드러운 미풍이 나무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사르락사르락 소리를 내며 상쾌해지는 음악도 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하이디의 기운을 가상으로라도 실제처럼 느끼고 싶다. 아픈 몸만 아니라 아픈 마음까지 달랠 수 있는 그곳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그래서 “내일 염소들과 함께 산 위의 고원에 가시지 않을래요?”라며 까만 두 눈을 반짝이며 묻는 하이디의 ‘최고의 환영 선물’을 나도 받고 싶다. 나의 목표와 소원에 추가해야겠다. 그리고 하이디 같은 생각과 감정을 잊지 않고 살고 싶고 미래의 아이들도 그리 살았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은 이후의 나를 포함한 가족과 내 주변 사람들 모두 ‘날이 밝으면 즐거운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던’ 그래니처럼 이전보다 희망찬 기대를 가지고 매일 아침을 맞이하면 좋겠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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