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운명의 상대가 있다는 단 하나의 아름다운 진실’을 깨닫기 위한 ‘고독, 절망, 공포에서 비롯된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두 개의 거짓,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이 소설 속의 있을 법하지 않으면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운명의 상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고 ‘그 목소리’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것을 믿지 않게 된 현재의 나를 돌이켜보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의 중반부부터는 A면이 끝나면 뒤집어서 B면으로 바꿔줘야 하는 레코드판을 바꾸듯이 나름의 반전을 거듭하는 것을 보며 후반부까지 적잖은 스릴도 느꼈다. 그리고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들이 전개 될 수 있는 건지 궁금해 하던 내게 그 수수께끼의 열쇠는 마지막까지 다 읽었을 때쯤 손에 쥐어졌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스무 살이 된 여름까지 자신을 기억하거나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하나 없이 모든 것이 결락된 상태로 지독한 외로움에 잠식되어 자신이 외로운지도 몰랐던 한 열일곱 살의 천재 ‘의억기공사’ 소녀 마쓰나기 도카가 한 인간의 숨은 열망을 뽑아내기 위해 상세히 기록되는 ‘이력서’를 보고 자음 하나만 바꾼 나쓰나기 도카가 되어 그 또한 모든 것에 결락이 있고 자신의 삶과 인생을 증오하고 비난하며 달콤한 기대는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복한 꿈은 악몽보다 더 해롭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던 한 소년 아마가이 치히로를 자신의 소꿉친구로 만들어내는 것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이었다.
첫머리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글이 있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소꿉친구가 있다.’ 초반부까지는 이것이 ‘나의 이야기’로 시작이 되어 똑같은 글이 ‘너의 이야기’로 중첩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었을 때에는 그 글은 너와 나의 이야기를 넘어 ‘그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의억에 의한 가공의 소꿉친구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서로의 기억과 추억이 거짓임을 알고 난 이후 거짓을 밝혀내려는 마음도 있는가 하면 거짓에서 깨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이 동반하는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서로에게 너무 소중한 사람이 되었고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가족이자 친구이자 연인이 된 ‘그들의 이야기’.
그런 그들이 만들어낸 패러렐 월드 속 ‘그들의 이야기’와 ‘추억’에는 우스운 것, 유치하기도 하고 풋풋하기도 한 것, 뻔한 것, 기쁜 것과 슬픈 것, 이해가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 그들과 함께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먹먹하기도 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런 그들을 만들어낸 저자의 소설 속 저자의 이야기에는 참신한 것, 흥미로운 것, 그럴싸한 것, 가슴 아픈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의억, 의자, 의억기공사, 이력서라니. 그린그린, 레테, 메멘토, 엔젤, 허니문, 히어로, 히로인이라니. 정말 기가 막히고 신기하지 않나.
의억이란 어디까지나 결락된 부분을 보충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허니문’이라는 의억에 중독되어 현실의 삶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는 치히로의 아버지. 그와 이혼한 후 ‘레테’로 가족과의 기억을 통째로 삭제하는 단호한 삶의 방식을 택한 치히로의 어머니. 그들은 세상 무엇보다 허구를 사랑했고 세상 무엇보다 현실을 증오했다. 그런 부모들이 ‘엔젤’의 의억으로 만들어낸 네 명의 자식 중 한 명인 치히로. 그들은 그야말로 일그러진 가정이고 거짓의 총체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없고 자식들은 방치된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조차 소외감을 느끼며 사랑 자체를 알지 못한 채로 성장해서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전혀 모르는 인간이 된 치히로는 고독한 어린시절에 이은 청춘시절을 보낸다. 그런 완벽한 잿빛의 나날들은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라는 생각에 텅 빈 것도 담을 그릇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며 완전한 제로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전부 잊어버리기 위해서 ‘레테’를 구입했는데 어이없게도 클리닉에서 이력서를 잘못 읽어서 ‘그린그린’을 보내 왔던 것이다. 클리닉에 배송 오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시 받았던 두 개의 ‘레테’. 하나는 소년 시절의 기억을 지우기 위한 것, 또 하나는 나쓰나기 도카에 관한 의사 기억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개의 ‘레테’가 소설 마지막에 가서 반전의 복선이 된다. 이 부분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불꽃놀이 무늬가 수놓아진 짙은 남색 유카타. 이목을 끄는 하얀 피부. 붉은 국화꽃이 달린 머리핀. 축제 때의 이 이미지는 아주 중요한 이미지가 되는데 이 또한 도카가 만들어낸 의억이었다. 도카가 열아홉에 얻은 새로운 병 신형 AD (Alzheimer’s Disease)는 오래전 기억부터 점차 최근의 기억까지 없어지고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죽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며 스스로 나서서 시곗바늘을 돌리기까지 하며 소극적이고 완만한 자살에 대해 언급할 때에도 초연했던 그녀가 신형 AD 환자 모임에서 다들 가족, 친구, 연인과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자신은 그런 추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그녀가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어 줬던 공상 속의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거짓말로 만들어내게 된다. 이로 인해 고독과 절망이 점점 깊어지면서 허무감이 임계점에 다다라 이제껏 쌓아 올려왔던 방어책이 무너져 버리고 죽기 전 딱 한 번이라도 그녀의 고독을, 그녀의 안에서 갓난아이처럼 오열하고 있는 갓 태어난 시절의 그녀, 한 살 때의 그녀부터 열여덟 살의 그녀들을 치유하고 그녀를 100퍼센트 이해해줄 현실적인 구원자인 100퍼센트의 남자에게 100퍼센트의 사랑도 받고 싶고 칭찬, 토닥임, 동정을 받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그’에 대한 생각을 계속했다. 그러나 방법은 떠오르지 않고 공상 속의 존재에 대해 이토록 깊이 빠지고 변함없이 사랑할 수는 없는 거라며 어쩌면 실재하는 인물이 있을 거라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고향으로 떠난 날, 열네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축제에 나란히 걸어가는데 그 여자아이가 딱 남색 유카타를 입고 머리에 붉은 국화꽃이 달린 머리핀을 꽂고 있었던 것이다.
짙은 남색 유카타와 하얀 피부, 붉은 국화꽃이 달린 머리핀의 이미지의 도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며 기필코 ‘레테’를 복용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기억을 지우기에 좋은 날이 아니라는 식으로 회피하며 ‘레테’를 복용하지 못하던 치히로는 사랑이란 실재하는 인간끼리 하는 것이라며 자신을 채근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달 후 아파트 복도에서 도카와 우연히 마주치고 보이지 않는 못에 의해 공간에 고정되어 서로를 알아보고 이름을 부른다. 그렇게 여름의 마법이 일어났다. 그 마법에서 깨고 싶지 않으면서도 속임을 당하는 걸까봐 두려워서 마법에서 깨려고 노력하는 치히로. 그는 도카가 실재인물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과거를 잊고픈 인간에게 눈엣가시나 다름없는 졸업앨범은 전멸상태라 확인할 길이 없어서 도카가 그랬듯이 그의 고향도 찾아가고 고향에서 떠난 후 한 번도 연락도 않던 아버지에게, 그리고 중학교 때 학급의 부적응자들이 몰렸던 도서관의 같은 주민이었고 그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 동지 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극히 몇 안 되는 상대 중 하나였지만 그 때도 교류가 없었고 졸업 이후로도 교류가 없던 동창 기리모토 노조미와 SNS로 연락하고 직접 만나서 도카에 대해 묻기도 한다. 그렇게 도카는 확실히 자신의 과거에는 실재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러나 의억이라는 것은 몽상보다 좀 더 현실적인 ‘최선의 가능성’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과 일어났어야 하는 일, 일어났으면 하는 일이 일어나게 하므로 ‘행복한 패러렐 월드에 속한 또 다른 내가 겪는 일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리얼'하고 또 그만큼 내가 ‘그토록 원했으나 이루지 못 했던 열망을 발현해 낸다’는 점에서는 '잔혹'하다. 왜냐하면 누구나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으로 애정을 받거나 쏟아 붓고 싶어 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히어로가 되거나 누군가가 자신의 히어로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이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기에 그러한 상실감에서 오는 무력함과 자기혐오에 가까운 비관이나 슬픔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히로는 깊은 슬픔을 느끼다가 뻔히 도카가 가공의 인물임을 알면서도 태풍이 오면 천식이 심해지고 발작하기도 했던 의억 속의 도카를 걱정해서 도카 집 문을 두드리며 “도카!”라고 이름을 외치고 그 때부터는 거짓인 줄 알면서도 진실이라 믿고 싶은 마음과 혼합되어 둘만의 새로운 추억을 쌓아 나아간다.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된 이 “도카!”라고 외쳤던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었다. 도카의 이야기에서 봤을 때 그 순간은 바로 도카가 신형 AD 때문에 죽음으로 시시각각 다가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어떻게든 치히로에게 소꿉친구로서의 마지막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 도카에게 벌을 내리듯 치히로가 도카의 요리를 눈앞에서 쓰레기통에 하나의 의지와 다짐이자 표시로서 버렸을 때 그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을 알고는 더욱 상처를 받아 자신이 물러날 타이밍이라 느낀 도카가 그날 밤 자신의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죽여 울다 이상하게 평온해진 것을 느끼고 그 때 이후로 서서히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굳이 죽음을 얌전히 기다릴 필요가 없이 먼저 마중 나가기로 결단을 내린다. 이전에 이미 한 차례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던 때가 있었으나 치히로의 ‘이력서’를 우연히 발견하고 다시 살기로 했었다. 그렇게 다시 살아보려고 했던 도카는 질식사로 죽는 것은 어려서부터 겪었던 천식의 고통 때문에 싫다며 높은 데서 떨어져 죽기로 한다. 아파트에서 좀 떨어진 맨션의 비상계단 난간에서 떨어져 죽으려던 찰나 발 밑에 떨어져 있던 불꽃놀이 장난감을 들고 불꽃놀이(花火)를 뒤집어놓은 도카(火花)는 그 이름이 운명을 암시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불꽃은 상승한 끝에 밤하늘에 붉은 꽃을 피우는 반면에 자신은 밑으로 추락한 끝에 땅바닥에 붉은 꽃을 피우려 한다는 그런 운명. 너무 미화한 듯한 표현들이었지만 저자가 인물의 이름 같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고 글을 구성했다는 것이 참 흥미로웠다. 그 불꽃놀이 장난감 덕분에 단지 10초 정도만 생각에 잠겼지만 바로 그 10초 덕분에 그녀는 그녀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치히로가 그녀에게 전화를 했는데 도카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가 그녀에게 전화를 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아파트로 달려간 것이었다. 그 때가 바로 치히로가 도카를 구하러 달려왔을 때였던 것이다. “도카!”라고 외쳤던 이름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시인 김춘수의 시 꽃에서처럼 치히로가 도카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도카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가 치히로가 도카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도카는 치히로에게로 와서 온전히 꽃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에서 가장 거짓되면서도 진실 되고 단 하나뿐인 소중한 꽃. 그렇게 그들은 약 3개월간 규칙적이고 건전한 생활을 하며 알콩달콩 지내다 도카의 병이 악화되어 도카는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어떻게 치히로에게 배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도카의 ‘이력서’와 도카가 신형 AD 환자라는 것을 고백하고 자신을 속이려고 한 것에 대해 사과한 짧은 편지를 받은 후 도카가 둘의 뇌에 의억을 이식해서 추억 속의 둘을 구원하려고 했던 것을 알게 된다. 마치 ‘청춘좀비’가 헛되이 보냈던 청춘을 어떻게든 되돌려 보려고 발악하듯이. 치히로는 그런 자신들을 생각하며 불쌍해 하고 원망한다. 도카의 최후까지 허구의 힘에만 의지하고 비눗방울 같은 연약한 행복에만 몰두하다 눈앞의 확실한 행복을 놓친 어리석음에 가여워하고, 상처받는 것에 두려운 나머지 그녀와 너무도 똑같은 아픔과 상실, 증오를 느끼며 자라왔기에 그녀의 고독, 절망, 공포를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던 그였음에도 그녀가 기억을 잃어가는 그 끔찍한 공포와 내내 싸우면서 누구에게도 의지도 못하고, 이해받지도 못하고, 위로받지 못한 외로운 상태에서 절실히 기도하는 심정이었던 그녀의 구원 요청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더욱 악착같이 도카라는 존재를 거부하고 그녀에게 속아주지 않았던 자신을 원망스러워한다. 도카가 그를 위해 뭐든지 다 바치기로 스스로 약속했듯이 그도 그녀를 위해 여생을 남김없이 그녀가 이 세계 없더라도 언제까지나 그녀를 위해 쓰기로 스스로 약속한다. 너무 억지스럽고 소설스럽고 비현실적인 약속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분명 있다. 10여 년 전에 TV에서 봤던 한 연인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들을 모티브로 했던 이승환의 노래도 있었다. 들을 때마다 그 연인이 떠올라 가슴 먹먹해지고 노래 후반부의 가사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너만이 필요해 그게 너란 말야 너만의 나이길 우리만의 약속 그 약속을 지켜 줄 내 사랑’ 이 부분은 멜로디만으로도 가사가 떠올라 언제든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한다.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정말 어떻게 사랑이 그럴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신기하게도 정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논픽션에 기반을 둔 픽션이니까.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치히로는 그 날 이후로 매일 도카의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도카가 그에게 추억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만큼이나 충실하고 성실하게 ‘소꿉친구 계획’을 이어간다. 도카도 처음에는 그를 유산을 노린 사기꾼이라 칭하며 비아냥 거리기도 하고 냉정한 태도를 취하는 연기를 하며 관계에 선을 긋고 스스로를 제어하며 둘 사이에 거리감을 둔다. 도카도 상처 받는 게 두려워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죽어가고 있는 상태라서 ‘앞으로 잃을 것’이나 다름없는 ‘앞으로 손에 넣을 생의 가치’를 제로로 삼고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거라는 걸 치히로가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한다. 생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죽음의 위협도 커지고 죽음에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가 생각났다. 그는 서른여섯의 전문의를 앞둔 신경외과 레지던트였는데 폐암 4기 판정을 받고 초연하게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모든 욕심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존엄사’를 선택한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도카와 치히로는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둘이서 보내는 시간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치히로에게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며 둘의 이야기를 요구하는 도카. 치히로는 도카 앞에서 이야기해 나간다. 그들 사이에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추억. 일어났으면 했던 추억. 일어났어야 했던 추억. 책의 세 페이지 이상을 차지했던 온갖 의억으로 생긴 가짜 추억들을. 그렇게 그들은 일곱 살에서 열다섯 살까지 9년간을 다시 산다. 그 이후의 내용은 없지만 치히로는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처럼 정당한 ‘속편’을 만들며 이야기를, 거짓말을 계속 이어나가면 도카가 더 오래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2주간 그렇게 오래된 추억을 이야기하며 세계의 종말을 지켜본다. 이야기는 도카가 생을 이어나가게 하는 최후의 실이었으므로.
그러던 어느 날 치히로는 도카의 병을 치료하는 치료제가 완성되어 그녀의 기억이 모두 되살아나는 싸구려에 당돌하고 억지스럽고 예정 조화적인 꿈을 꾸는데 현실과 너무 대조되어 치히로는 하룻밤을 고민하지만 시작된 순간 끝나는 사랑과 시작되기 직전에 끝나는 사랑, 둘 중 어느 쪽이 비극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각각이 최악이니까. 정말 둘 다 너무 아련하고 마음 아픈 비극인 것 같다.
그렇게 둘의 진짜 추억을 만들어 나가다가 이 모든 계획의 시작점이 도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도카. 그녀는 치히로에게 마지막 거짓말을 한다. 치히로의 소년 시절의 기억을 지울 ‘레테’를 복용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이 부분이 바로 내가 이 리뷰 초반에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했던 복선이 되는 두 개의 ‘레테’중 하나였다. 사실 그 ‘레테’는 도카가 도카의 기억만 지우는 ‘레테’였는데 치히로의 집에서 두 개를 바꿔치기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반전은 그 뒤에 있었다. 도카가 마지막에 레테를 바꿔치기 할 줄 알고 그 전에 이미 치히로가 두 개의 레테를 바꿔치기 해 놓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치히로가 복용한 레테는 결국 도카의 기억만 지우는 레테가 아닌 소년 시절의 기억을 지우는 레테였던 것이다. 도박 같은 치히로의 머리싸움의 승리로 그의 소년 시절에는 도카밖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그들은 상대의 성향을 완벽히 이해하고 간파하고 있었고 그런 것을 깨닫고서 둘은 뭔가를 확인하기 위한 키스가 아닌 오로지 키스를 위한 키스를 나누고 ‘궁극의 둘’이 된다. 이후 도카는 고요하고 평온하게 짧은 생애를 마치고 치히로에게 영원할 것 같던 그 짧은 여름도 끝이 난다.
도카와의 이야기를 공유한 그는 허구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어 10년 후, 치히로도 도카처럼 의억기공사가 되어 ‘히로인’의 개발자가 된다. 그는 ‘히로인’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이 단 하나의 아름다운 진리를 믿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 진리란 바로 이 세상 어딘가에 운명이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서른이 되어서도 치히로는 여전히 도카만을 사랑하고 있다, 바보처럼. 그는 10년 만에 모교에서 강연 의뢰를 받아 고향을 방문하는데 마침 불꽃놀이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운명이 일어난다면 꼭 일어나야 할 장소인 그곳에서 그는 운명의 상대를 다시 만난다. 불꽃놀이 무늬가 수놓아진 짙은 남색 유카타. 이목을 끄는 하얀 피부. 붉은 국화꽃이 달린 머리핀. 만났다기 보다는 아마 치히로의 의억 속에서 그대로 살아가는 패러렐 월드의 도카였을 것이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이 소설의 리뷰를 마무리 하면서 남기고 싶은 나와 우리 모두의 헛되고 공허해 보이지만 결국 진리일 수밖에 없는 희망과 바람이 있다. 나는 너의 ‘히로인’이 되고, 너는 나의 ‘히어로’가 되어 서로 마주치거나 스쳐 지나가더라도 직감적으로 뒤돌아보게 되는, 일곱 살 때 만났어야 했지만 ‘그 목소리’를 믿지 않거나 무시해 버리는 바람에 그 시기를 놓치더라도 언젠가는 노후에라도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는 그런 ‘운명의 상대’. 만났을 수도 있지만 만나지 못했거나, 만나지 못했으나 만날 수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는 그런 사람. 전자든 후자든 만나기 전인 것은 똑같다. 만나기 전부터 계속되어왔고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린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똑같다. 그러니 운명의 빨간 실로 연결된 ‘운명의 상대’와 만나서 사랑하지 못 했던 그동안의 공백을 채우고 싶은 욕망에 너무 집착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 공백을 한 순간이라도 채울 수 있는 기회와 나날들이 있다면 그것도 못 이룬 인생이 훨씬 더 많은 것을 감안하면 그것으로도 충분한 행운이고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