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동의 달
김정식 지음 / 이유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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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호동의 달’을 읽고


 작가는 25년이나 한 동네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 동네가 변해가는 모습, 즉 그 동네의 역사와 함께 해왔을 것이다.

 나 역시 작가보다는 횟수에서 뒤지기는 하지만, 이사를 꽤나 많이 다녔었다. 그리고 이사를 할 때마다 거리가 먼 동네로 이사를 해왔기 때문에 한 동네가 오랜 시간동안 변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자기가 어릴 때 살던 동네를 다시 방문한 사람들은 실망하고 놀란다고 한다. 자기가 뛰어 놀던 곳이 그리 작았나 하는 생각에 실망하지만, 자기가 한 세계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데에 놀란다고 한다. 나는 자랄 때 지나온 동네들을 다시 가보지 못했다. 멀기도 했지만 이사를 올 때마다 힘든 기억들이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가 일부러 찾아가지 않고서도 어린 시절 우리 동네를 찾아간 것만 같은 강한 느낌을 받게 된 이유는 뭘까.

작가가 그려준 금호동이라는 동네도, 글에 등장하는 식구들도 낯설지 않은 이유는 작가보다 연식이 조금 늦은 내게도 조금 늦긴 하지만 그와 비슷한 시절, 7~80년대를 보냈기 때문이다. 스케이트장이 아닌 땅에 물을 대어 얼린 공터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2차선 도로보다 좁은 통로를 두고 마주한 가게에서 서로 손님을 보내주던 재래 시장이 있고, 한 지붕아래 서너 가구가 함께 쓰던 마당의 수도와 화장실, 그리고 그 수도에 겨울이면 칭칭 동여 맨 새끼줄과 내복을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그 시절에만 있었던 정과 낭만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른 아침이지만 두부 아저씨 종소리는 벌써 멀리 걸어가 버렸다. 귀를 기울이면 두부 장수가 끌고 가는 수레의 쩔렁거리는 소리가 낮게 환청처럼 들렸다. 나는 아침이라기엔 서툴고 새벽이라기엔 게으른 묘한 시간의 골목 사이에서 주춤거렸다. 부엌에 물을 받아 둔 항아리에는 어둠과 같이 밤을 보낸 먼지가 얕게 쌓여 도마에 남아 있는 생선 비늘처럼 미끈거렸다. 두부 수레의 환청과 미끈거리는 부엌의 항아리에 ‘담긴’ 물의 촉감을 생각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p. 14 1장 유년의 기억_새벽 수돗가

“무리를 지어 사는 짐승들은 가족처럼 다정해 보인다. 그러다 어쩌다 다친 한 마리에게 맹수가 달려들면 무리는 외면한다. 상처 입은 짐승이 포식자에게 먹이가 되면 다른 짐승들은 잠시나마 편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엔 정신 나간 녀석들도 가끔 있다. 늑대들은 까딱 잘못하면 자기들도 맹수에게 잡아먹힐 것을 알면서도 상처 입은 다른 늑대들 옆에서 서성댄다고 한다. 얼빠진듯한 늑대들. 그러면 상처 입은 늑대를 노리던 맹수는 여러 마리를 다 잡기가 버거워 사냥을 포기한다.

 아주 오래전 금호동에 다른 늑대의 상처를 핥아 주는 얼빠진 늑대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늑대는 내 자전거를 밀어주고 나와 눈싸움을 했었다. . -p. 99 1장 유년의 기억_얼빠진 늑대”

작가가 살던 금호동에는 다른 동네에서는 찾아 보기가 힘든 사람들이 보인다. 이 동네 사람들은 저 하나 살기도 그리도 퍽퍽했던 시절이었음에도 상처입은 사람을 보듬고 핥아주었다. 금호동에는 작가의 표현처럼 얼빠진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얼빠진 사람들이 많은 금호동, 그 동네를 가보기도 전에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바로 직전에 지나온 길도 뱅글 뱅글 돌며 ‘이 길이 맞는겨?’하고 묻는 내가 혼자서 금호동이라는 동네에 가보고 싶어졌다. 금호동에 도착해서 정식이가 새로 사귄 친구라 하면 안여사가 반겨주실 것만 같다. 그리고 아직도 버리지 못한 선학 냄비에 금새 지어낸 고소하고 뜨끈한 냄비밥에 배춧국을 끓여, 어젯밤 구워 둔 김으로 집밥을 지어 차려주실 것만 같다. 그럼 나는 또 넉살 좋게 그 밥을 밥알 하나 국물 한 숟가락 남기지 않고 다 먹을거다. 마지막 남은 김 한 장을 입에 물고 고소함을 음미하면서 말이다.


  어느 까만 밤, 날씨가 좋은 어느 날 밤에, 금호동에 가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김정식 작가의 노오란 수필집이 달이 되어 떠오를 것이다.

우리가 잊고 지내던, 한동안 올려다 보지 못한 그 시절의 우리만 아는 달이다.

그 달 속에는 계수나무집도 있고, 개천 옆에 살던 규호도 있고, 허스틀러를 손에 쥐고 입에 침을 잔뜩 바른 동환이가 있다. 용무늬 잠바를 입은 가오의 대명사 은상형도 있다. 인물이 준수한 성도형과 뽀빠이 천규 삼촌도 보인다. 그리고 저 뒤에 물컹하고 긴 순대를 훌라후프처럼 손목에 건 용준이도 보인다.
 함께 지나온 세월 속에 지금은 서로 약간은 달라진 모습을 하고, 그때를 잊은 채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그들이 작가의 기억 속에 이리도 생생히 남아있는 것은 그 시간을 온전히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그가 사랑한 그 시간들을 달빛을 잔뜩 받은 특별한 추억의 종이로 한 장 한 장 빛나는 수필로 엮였다.
 책을 붙들고 추억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울다가 웃다가 결국엔 화장을 다시 고쳐야 했다. 조신하지만 조근조근 할 말을 다 하는 말솜씨가 꽤나 좋은 선배가 자기 동네 금호동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작가는 화려하진 않은 고백을 하고 있었지만 진행 솜씨가 워낙 좋은 가이드여서 25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책은 40~50대 중년에게는 추억 여행을 떠나기에 너무나 좋은 가이드북이기도 하고, 우리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부모나 이모 또는 삼촌 같은 어른들의 시대를 알게 해주는 훌륭한 추억의 답사서가 되기도 한다. 세대를 막론하고 함께 읽기를 권해도 손색이 없는 책이다.
 자신을, 또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는 것은 때로는 즐겁고 기쁜 일이기도 하지만 모든 추억이 달고 맛있는 것은 아니어서 아프고 쓰기도 하다. 그런 추억들을 이렇게 잘 정리한 작가에 대해 사뭇 존경하는 마음이 든다. 나는, 또 이 책을 읽는 당신은 김정식 작가처럼 추억 속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사랑과 이별에 관한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Say not in grief 'he is no more' but in thankfulness that he was.

- Hebrew Proverb -

'그 사람은 이제 없다'라는 말과 함께 슬퍼하지 말고, 그가 당신의 삶에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는 말이다.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금호동’을 그리워하는 작가에게 건네고 싶은 위로의 말이다.
‘금호동’이 김정식 작가 당신의 삶에 있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이렇게나  부러운 일이니 말이다.

“기억이라는 게, 내 나이쯤 되면 천상병의 시처럼 해맑게 남거나 흑백사진의 기형도처럼 심연으로 가라앉으며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잊고 있던 오래전 모습들이 마치 금홍이가 외출하면 혼자 방을 지키던 이상이 화장품 뚜껑을 만지작거리던 몽환적인 느낌으로 한 번씩 내게 돌아온다. 일곱 살의 내가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지금의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이제 알았다. 나는 나를 다시 만나려 살고 있다는 걸.”- p. 16 새벽 수돗가


 금호동에는 아직도, 달이 뜬다.

2024. 7. 17. 수요일 오후
금호동의 달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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