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하늘지기 > 서른에 다시 읽은 전혜린
목마른 계절 범우문고 10
전혜린 지음 / 범우사 / 1994년 7월
평점 :
품절


여고시절 전혜린은 여고생들의 우상이었다. 전혜린의 수필집이나 번역서들을 한권이라도 읽지 않은 학생들에게도 전혜린은 전설이었다. 구전설화처럼 전혜린은 여고생들에게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고, 신비한 성이기도 했다. 나의 여고시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열 일곱의 나에겐, 서른 한 살에 자살했다는 '똑똑한 전문직 여성'의 이야기는 틀림없이 매력적이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전혜린은 나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50년대, 1960년대를 산 전혜린이라는 인물은, 당시 대부분의 서민들이 겪었던 절대적인 빈곤상태와 암울한 정치상황을 비켜 간, 어찌보면 서구에 대한 짝사랑으로 무장한 한 부르주아 여성에 다름아니었다.

그렇게 전혜린이 나의 기억속에서 희미해져갔다. 며칠전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지나치게 얇고 작은 전혜린의 책 하나를 발견했다. [목마른 계절]이라는 범우사에서 나온 2.000원 짜리 문고판이었다. 별다른 기대없이 읽기 시작한 그 조그마한 책은 그 날 밤 나를 다시 흔들어 놓았다. 내 나이 서른... 서른 넷을 달리고 있는 남편은 코를 골며 잠이 들었고, 새벽 두시가 다 되도록 젖을 놓지 않고 징징거리던 만 십사개월이 된 아들녀석도 겨우 잠이 들었다.

'예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놀이 새빨갛게 타는 내 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광경이 아름다워서였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3학년때였던 것 같다. 아니면 대학교 1학년때, 아무 이유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이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그랬던 그녀 나이, 스물 아홉에, 전혜린은 고백한다.

'수레에 끼워진 바퀴처럼 자기 자신이나 주위에 신선한 흥미를 잃고 타성처럼 회전하고 있었던 생활이 단적으로 말해서 내 일년간의 생활이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도대체 커다란 흥미가 없어지고 만 것 같다. 이것이 곧 내가 삼십대 여인으로 되어가고 있는 징후일 것이다. 전과 비할 것 같으면 나 자신의 보질이나 현실이나 미래에 별로 강렬한 호기심이 안 일어나고, 말하자면 일종의 자기에 대한 권태기-'

해서 그녀는 스물아홉의 끝에서 다시 결심했다.

'서른이라는 어떤 한계선을 경계로 해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피동에서 능동의 세계로 들어가서 보다 열렬하게 일과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고 싶다. 밀폐된 내면에서의 자기 수련이 아니라 사회와 현실속에서 옛날에 내가 가졌던 인식애와 순수와 정렬을 던져 넣고 싶다'고.

그리고, 그녀는 일 년 후에 자살을 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심하게 억누르기도 했다. 담배가 피우고 싶기도 했고, 술이 마시고 싶기도 했고, 누구라도 붙잡고, 막 대화를 하고 싶기도 했다. 열일곱에 나는 어떻게 전혜린을 이해했던 것일까? 열일곱에 전혜린은 어떻게 나를 휘감았던 것일까? 서른이 되고 보니 이렇게 아픈데, 서른이 되고 보니 그녀가 이렇게 애절한데... 그녀의 결심을 고스란히 일기에 배껴본다. 그리고 일년, 그 이상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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