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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이상우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상우 작가는 2011년 문학동네 신인문학상으로 데뷔하였다. 『프리즘』은 그의 첫 단편소설집이고, 그가 지면을 통해 4년간 발표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지면에 발표한 순서대로 목차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작가의 변화 과정을 차근차근 따라갈 수 있다.
문학동네 문예지를 통해, 이 작가의 등단작을 처음으로 읽었고 흥미로웠다. 이후 발표하는 작품들을 문예지를 통해 줄곧 챙겨보았는데, 소설에서 묘사되는 이국적인 풍경들과 국적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의 등장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무협지 속 인물들을 그대로 작품에 가져오는 시도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너무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독자로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소설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더군다나 「객잔」을 기점으로 이후 소설에서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과 그 시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서사로부터 벗어나, 다른 세계로 이행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보였다.
이런 시도들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소설은 「888」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너는 의자에서 일어난다."라는 문장에서 시작해서 "나는 의자에서 일어난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데, 소설을 다 읽고나면 이야기가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너'가 어떤 문장들을 거치면서 결국 '나'가 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너는 왜 내가 되는가. 나는 이 소설집을 읽으며, 8편의 소설 전반에 걸쳐 고독와 공허의 정서를 느꼈다. 여기서의 고독과 공허는 내가 영원히 '나'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나는 영원히 '나'이기 때문에 고독하고, 다른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공허하다. 명확한 '나'야말로 영원한 분절 상태가 아닐까. 나는 너와 나눠져 있다. 나는 사물이 아니다. 나는 개가 아니다. 나는 공기가 아니다. 나는 모든 것과 나눠져 있음으로 나는 영원히 나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는 영원한 1인칭이다. 그러나 이상우 소설에서는 '나'가 모든 것이 된다. '나'가 모든 시공간에 산다. 나는 모든 것이 된다. 나는 모든 것이 되기 때문에, 내가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분절된 것을 한 번 더 분절시킴으로써, 분절되지 않은 상태를 만드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미 분절된 상태로 존재하는 '나'는 더 이상 고독한 언어가 아니다.
“내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둘 중 내가 울고 있었다. 나의 뒤에서 각기 다른 얼굴을 한 인면견들이 지붕으로 올라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또 반복되는구나. 나라는 공포 속에서 꿈꾸던 순간마저 지나쳐버리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건반 위에 손을 올려둔 채 우리는 모두 혼자 영원히 울고 있었다.”
「프리즘」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듯, 나는 둘이다. 또는 두 명 이상이다. 내가 나를 내려다보려면, 나는 최소 둘이어야 한다. 이미 ‘나’라고 규정되어 ‘너’와는 분리된 ‘나’가 작가의 문장 속에서 다시 한 번 쪼개진다. 언어에는 무언가를 규정짓고 나누는 힘이 있다. 이상우는 이 힘을 무력화시키듯, 이미 분절된 언어를 다시 한 번 더 분절시킴으로써, 언어의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문장을 따라가는 독자는 여러 명의 ‘나’를 마주하는 체험이 가능해진다.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영화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나 주제를 설명 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의, 훨씬 다른 것을 물어봐야 한다. 영화는 관객의 지각을 바꿔줘야 한다. 시각적 이미지, 소리, 생각을 결합해서 하나의 경험이 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영화의 내적 존재를 즐기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이상우의 소설에도 해당된다.
'그의 소설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나 주제를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훨씬 다른 것을 묻고 있다. 우리의 지각 체계를 바꿔 준다. 지각을 통해 새로운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글을 통해 새로운 지각을 하게 된다. 시각적 이미지, 소리, 생각을 결합해서 하나의 경험이 되게 해준다. 문학의 내적 존재를 즐기게 해준다.'
이상우 소설은 독해하는 소설이 아니라 경험하는 소설이다.
'나'가 처음으로 '나'에게서 벗어나 모든 것이 되는 아주 아름다운 경험이다.
「중추완월」에서 시작한 작가의 소설 세계는 점점 확장되어 「프리즘」이 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프리즘이란 광선을 굴절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유리 다면체이다. 나는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작품을 수렴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프리즘」이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이유로 표제작이 「프리즘」인 것 또한 마음에 든다. 책의 표지 디자인도 프리즘에 의해 굴절된 빛이 중심을 향해 쏟아지는 느낌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그린 소설 「중추완월」에 프리즘을 가져다대면, 소설 「프리즘」이 되지 않을까.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