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어머니는 종이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던 거야. 힘들어하는 줄은 알고 있었다. 산책할 때면 내 팔을 잡곤 했으니까, "내 눈은 별로예요." 라는 말을 자주 했지만, 나를 만지려는 핑계이거나, 그냥 하는 말이라고만생각했어,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왜 도움을 청하는 대신, 볼 수도 없으면서 그 많은 잡지와 신문들을 부탁했을까,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 도움을 청하는 방식이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난간을 꼭 붙잡았었나, 그래서 내가 보는 앞에서는 요리를 하지 않았던 건가, 그래서 내가 보는 앞에서는 옷을 갈아입거나, 문을 열지 않았던 건가?
항상 앞에 뭔가 읽을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도 다른 것을 볼 필요가없게 하기 위해서였나? 그 긴 세월 동안 내가 그녀에게 적어줬던 모든 말들, 난 그녀에게 단 한 마디도 전하지 못했단 말인가? 굉장하군, 나는 곧잘 하던 식으로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어, 광장해요. "더 얘기해 봐요. 당신 의견을 말해 줘요." 그녀가 말했어.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내 뺨 위에 놓고, 어깨 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그녀는 대화의 흐름으로 미루어 그 행동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했지, "여기서 이런 것을 읽을 수는 없소. 침실로 가져가서 천천히, 꼼꼼히 읽겠소, 당신의 자서전인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우리의 대화 문맥에서 그것은 이런 의미였어,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소." - P172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에 맥박, 체온, 뇌파 등에 종합적으로 반응하는 화학 물질을 처리해서, 피부색을 기분에 따라 바꿔주면 어떨까?
엄청나게 흥분했을 때는 피부가 초록색으로 바뀌고, 화가 나면 붉은색, 기분이 십장생 같을 때는 갈색, 우울할 때는 파란색으로 바뀌는거다.
그러면 모두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알 수 있게 될 테고, 서로 좀 더조심할 수 있겠지. 피부 빛이 자주색이 된 사람한테 네가 늦게 와서화가 났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분홍색이된 사람한테는 등을 두드려주면서 "축하해!"라고 말해 주고 싶을 것이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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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밤 늦게까지 자지 않고 보석을 디자인했다. 내가 디자인한 것은 산책용 발찌로, 이 발찌를 차면 걸을 때 밝은 노란색 흔적이뒤에 남는다. 그래서 행여 길을 잃어도 왔던 길을 찾을 수 있다. 또결혼반지도 한 쌍 디자인했는데, 이 반지는 그것을 낀 사람의 맥박을읽어내서 심장이 뛸 때마다 붉은색으로 번쩍이며 다른 반지에 신호를 보낸다. 황홀할 정도로 예쁜 팔찌도 디자인했다. 일 년 동안 제일좋아하는 시집에 고무 띠를 감아놓았다가 빼서 차고 다니는 것이다. - P150

애나를 생각하고 있어, 그녀 생각을 다시는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내놓아도 좋으련만, 나는 잃어버리고 싶은 것에만 집착한단다, 우리가 만났던 날을 생각해, 애나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만나러 올 때 그녀도 따라왔지, 두 분은친구였다, 전쟁 전에 그들은 예술과 문학을 논했어, 하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두 분은 전쟁 얘기만 했지, 멀찍이서 그녀가 다가오는 모습을 봤어, 나는 열다섯이었다, 그녀는 열일곱이었고, 우리는아버지들이 안에서 이야기할 동안 잔디밭에 같이 앉아 있었어, 우린어쩌면 그렇게도 어렸을까? 딱히 화제랄 것도 없었지만, 꼭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어, 우리는 잔디를 한 주먹 가득 쥐어 뽑았어, 내가 그녀에게 독서를 좋아하는지 물어보자, 그녀가 대답했어, "아니, 하지만 아주, 아주, 아주 좋아하는책들이 있어," 그녀는 늘 이런 식으로 같은 말을 세 번씩 되풀이했단다. "춤추는 거 좋아하니?" 그녀가 물었어, "수영 좋아해?" 내가 물었어, 모든 것이 불꽃을 올리며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어,
- P159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고, 내 마음도 그녀를 따라갔어, 하지만 나는 내 껍질과 함께 남겨졌어, 그녀를 다시 만나야 했어, 왜 그래야만 하는지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지,그래서 그 욕망이 아름다웠던 거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잘못이 있을 수는 없는 거란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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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것은 예비되어 있던 것이다. 머리맡 책장엔 항상 이 ‘사랑의 역사‘가 꽂혀 있었는데 오랜 시간 읽지 않다가 이제야 읽는다. 그 옆자리엔 역시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 꽂혀 있었고, ‘엄청나게..‘는 무려 두 권이나 판형을 달리해 가지고 있으니, 이것은 무려 두 번이나 예비되어 있던 것이다!(실은 모르고 두 번 산 것이다..)
아무튼 이제야 작정하고 읽게 된 것인데, 대단한 소설이다. 캐릭터 묘사가 탁월하여 개성이 뚜렷하므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어설픈 놈이 없단 얘기다.
사랑을 위한 일생의 몸부림, 그러나 사랑은 미완이고 인생은 상실의 슬픔으로 계속 된다. 잃기만 하는 패배자의 성마른 삶이다.
사랑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가 슬픔으로 목이 메이고, 영원한 농담들로 잠시 시시껄렁지고, 역사는 돌고돌아 내 앞에서 마침내 찬란해진다. 이루지 못한 사랑 고백이 역사로 이어져 생의 종장에 와 모든 진실을 보여준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할 아사코와 피천득 선생의 만남도 시간이 흘러 결국엔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사랑은 완성이든 상실이든 분별없이 삶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모든 문장이 시처럼 시종 아름답다. 레오 거스키의 부고는 눈물로 읽었다. bgm은 드보르작의 songs my mother taught me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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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크 바벨의 죽음.

사람들이 침묵의 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한 후에야 바벨은 침묵의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깨달았다. 음악을 들을 때 그는 더 이상 음표를 듣지 않고 그 사이의 침묵을 들었다. 책을 읽을 때 오로지 쉼표와 세미콜론, 마침표와 뒷문장의 대문자 사이의 여백에 집중했다. 방 안에서 침묵이 모이는 곳도 발견했다. 커튼 주름이 접힌 곳, 움푹 파인 은식기, 사람들이 그에게 말할 때 그는 그들이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을 들었다. 어떤 침묵의 경우는 그의미를 해독하게 되었다. 단서는 없고 직관만 있는 어려운 사건을해결하는 것과 비슷했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선택된 직업에서 다작을 하지 않았다고 아무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침묵의 완전한 서사시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어려웠다. 당신의 아이가 하느님이 존재하느냐고 묻거나 사랑하는 여인이 당신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침묵을 지키기란 어려웠다. 처음에 바벨은 ‘예‘와 ‘아니오‘ 라는 두 단어만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단어만 말하더라도 침묵에 담긴 그 미묘한 유창함을 잃어버리리라 - P161

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그를 체포하고 빈 여백뿐인 그의 원고를 모조리 불태운후에도 그는 말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이 머리를 한 대 치거나 군발로 사타구니를 걷어차도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마침내 총살대가 눈앞에 다가오자 작가 바벨은 자신이 실수했을 가능성을감지했다. 총들이 그의 가슴을 겨냥할 때 침묵의 풍요로움이 실은말하지 않은 빈곤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침묵이 무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총에서 총탄이터져 나올 때 그의 몸은 온통 진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의 일부는 통렬히 웃었다. 늘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침묵에는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 P162

그들은 다른 종(種)이었다. 확실히 다르다고 리트비노프는 생각했다. 이제 하나의 주제에 대해 각자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단어의 페이지를 보았다면 친구는 주저함과 검은 구멍, 두 단어 사이의 가능성이라는 들판을 본 셈이다.친구가 얼룩진 빛과 도주의 행복감, 중력의 슬픔을 보았다면 그는참새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보았다. 리트비노프의 삶은 실재의 무게를 즐기는 것으로 정의된다. 반면 친구의 삶은 비타협적인 사실로가득 찬 실재를 거부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리트비노프는 어두운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무언가가 벗겨져 나가면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보통 사람이었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창성을 발휘할 잠재력은 전혀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가 속속들이 잘못되었고,
그날 이후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그를 낙담시킬 수는 없었다.
이사크 바벨의 죽음 밑에 종이 한 장이 더 있었다. 리트비노프는자기연민의 눈물로 코 끝이 찡했지만 계속 읽었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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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바보라도 창문 앞에 있으면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가 되는 법이다. - P12

용서하려고 노력했다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분노가 나를 압도하던 시절도 있었다. 내 안의 추악한 심성이 밖으로튀어나왔다. 그렇게 쓰디쓴 감정에는 어떤 만족감도 있었다. 스스로불러들인 일이었다. 밖에 서 있던 그것을 안으로 불러들인 셈이었다. 내가 세상을 노려보자 세상도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는 서로 혐오하며 얽혀 있었다. 나는 사람들 면전에서 문을 쾅 닫곤 했다. 방귀 - P31

가 뀌고 싶으면 그냥 뀌어댔다. 손안에 동전을 쥔 채 출납원들이 동전을 떼어먹으려 한다고 욕하기도 했다. 하루는 내가 비둘기에게 독약이나 먹여대는 미친놈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나를 피해 다녔다. 나는 인간 말종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실제로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은 아니었다. 오래전에 내 분노를 공원 벤치에 내려놓듯 내려놓있다. 그런데도, 너무 오래전의 일이어서다른 식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하루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중얼댔다. 너무 늦은 건 아니야. 처음 며칠은 어색했다. 거울 앞에서미소 짓는 연습도 했다. 결국 돌아왔다. 나를 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내가 가게 놔두자 무언가가 나를 가게 놔주었다. - P32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머리만 그리려면 전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줄리언 외삼촌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파리 하나를 그리기 위해 모든 풍경을 포기해야 한다. 처음에는 나 자신을 한정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하늘을 전부가진 척하는 것보다는 어떤 것을 아주 조금만 갖는 편이 우주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더 깊이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엄마는 이파리나 머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선택했고, 아빠에 대한 그 하나의 감정에 기대고 싶어서 이 세상 전부를희생했다.
- P67

하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쯤에 너는 다 자랐지만 어린아이처럼 길을 잃었다고 느꼈다. 너의 자존심이 무너졌지만 그녀에 대한 너의 사랑만큼 크다고느꼈다. 그녀는 사라졌다. 남은 거라고는 울타리 옆에서 자란 나무처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자랐던 너의 공간뿐이다.
오랫동안 텅 비어 있었다. 아마도 몇 년 동안. 마침내 그 공간이다시 채워졌을 때 너는 다른 여인을 향한 새로운 사랑조차도 알마없이는 불가능하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빈 공간은 없었을 테고 또 그걸 채울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 P83

뚜렷하게 분리가 되어 있는 이세상, 그래서 그것을 이겨내고 서로 가까워지는 즐거움을 누릴 수있는 이 세상에 감사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극복할 수 없는차이의 슬픔을 절대로 잊을 순 없지만.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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