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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서효인 작가는 과열된 경쟁사회 속에 무감각해진 현대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슬프지만 무섭도록 현실적인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서로 경쟁을 해야만 살아남는 정글 같은 곳에서 현대인은 고독해진다. 쓰레기 냄새를 감추려고 향수를 쏟아 부은 듯, 가면 속에 곪은 상처를 감추고 행복한 ‘척’ 살아간다. 저자는 그런 우리의 곪은 상처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질문한다. ‘당신의 행복은 안녕하십니까?’
도토리는 일본어로 ‘돈구리’라고 발음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자매 이름은 ‘돈’코와 ‘구리’코, 둘을 합치면 ‘도토리’가 된다. 이런 어이없는 이름을 지어준 부모는 자매의 어린 시절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자매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힘든 세월을 견뎌낸다. 마지막으로 함께 살던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자매는 유산으로 집을 물려받고, 지금까지 할아버지에게 받았던 사랑을 베풀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아는 사람이 아닌 모르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을 때, 외로운 사람들은 도토리 자매에게 메일을 보낸다. 그러면 도토리 자매는 반드시 답장을 한다. 무일푼의 일이지만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을 보듬는다. 언니의 연애, 첫사랑과의 추억, 야스미씨의 메일 등 일련의 상황 속에서 자매는 진정한 행복에 대해 스스로 깨달아간다.
‘지금은 진짜 여행을 하고 있지만, 가령 여행을 하지 않는 때라도, 여행을 하듯 사는 삶이로군. 그런 생각을 했다.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 이, 꿈과 현실이 뒤섞여, 가끔 맞닿거나 떨어지는 광활한 바닷속을. 도토리 자매는 오늘도 헤쳐 나간다.’
저자 요시모토 바나나는 상실과 고독에 빠진 현대인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한다. 이는 그의 대표작인 《키친》이나 《암리타》에도 잘 나타나는데, 두 작품 모두 가족이나 연인을 잃은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 상실감과 상처는 사람으로 극복하고 일상의 행복으로 치유해 간다. 작가는 모든 사람이 한데 녹아 섞여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따로 존재할 수 없으며, 소소한 행복이야말로 사람에게 필요한 원동력이라고 말이다.
잔잔한 이 이야기의 매력은 소설과 에세이가 적절힌 섞인 듯한 문체에 있다.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지만 그렇다고 에세이처럼 노골적이지도 않다. 작가의 솔직함이 문체에 담백하게 녹아들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중간에 한국 이야기가 잠깐 나오는데, ‘다들 살아있다는 느낌의 활기가 있고, 피어오르는 에너지가 마치 눈에 보이는 것 같다’는 작가의 표현은 한국인 독자로서 기쁘고 고마울 뿐이다. 유명 방송인 콤비와 가면라이더, 첫사랑의 추억과 반전, 책 중간에 삽입된 감성 사진, 오키나와 여행 에피소드 들은 요시모토 바나나 특유의 분위기로 독자의 흥미를 이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읽을 때면, 조미료나 향신료를 가미하지 않은 웰빙 음식을 먹는 기분이다. 빠른 전개나 자극성이 강한 것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조금 밋밋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은근한 변화는 아주 건강하다. 심신이 지치고 고독할 때 독자들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기다린다. ‘도토리 자매’의 답장을 기다리듯. 이제 그 오랜 기다림에 응답한 작가의 답장을 찬찬히 음미해 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