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 정지돈 첫 번째 연작소설집
정지돈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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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운명처럼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는 로맨틱 패이탈리즘으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운명을 느낀 사람에게는 진짜로 운명이 된다

 

계량경제 연구실에서 짧게나마 공부하며 깨달은 것은, 내가 보는 데이터들이란 결국 연속적이고 무한한 우주에서 불연속적이고 유한한 값으로 실현되고 측정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한동안 이런 시각이 단지 계량경제학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우주와 인간의 관계가 본래 그렇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연속적이고 무한한 우주공간에서 인간의 존재는 존재 자체로 불연속과 유한성을 상징한다. 인간의 내재적 불연속성과 유한성은 인간의 지각과 행동 역시 모두 이산적이고 유한한 것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한계로 작용한다. 인간이 숫자로 세상을 분별하고 제도로 사회를 창조하려 하지만 모두 그럴듯한 근사치일뿐, 그 어느 것도 본연의 우주에 닿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의식이 깃들지 않은 세계라면 어떨까. 무의식의 공간이라면 아마 연속적일 수도 있고 무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산책이라는 행위는, 목적의식에 지배되지 않은 유일한 인간의 행위로서 마침내 무한한 확장성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루소, 키르케고르, 버지니아 울프, 보들레르, 발터 벤야민 같은 사람들은 저마다 분야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모두 보행과 산책의 특이성을 눈치챈 사람들이다. 현대에 와서는 제인 제이콥스와 리베카 솔닛을 빼놓을 수 없을 테고, 내게 있어서는 정지돈 역시 그 사람들과 같은 길에 서있다

 

단지 내 미래가 막연해서 걸었던 서울과 런던의 거리들에서 나는 느리지만 분명하게 이 사람들의 자취를 찾을 수 있었고, 꼭 운명처럼 느껴지는 산책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엿보게 됐다. 내가 산책자였기 때문에 걸었던 것일까 아니면 걸었기 때문에 산책자가 된 것일까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이 아닌>은 산책자 정지돈 작가가 산책과 보행을 정면으로 다룬 첫 번째 산문집이다. 그런 그가 이번엔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한 작품들의 모음>이라는, 누가 보면 잔나비처럼 힙해 보이고 싶어서 무리수를 던진 게 아닐까 싶은그런 제목의 연작 소설집을 냈다

 

주제의식은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보행’보다 더 넓은 개념인 ‘이동’으로 확장된 느낌이랄까. 그러나 산문집에서 연작 소설집으로의 장르적 변화, 장르적 이동은 필연적으로 다른 체험을 불러온다. 작가는, 그리고 또 우리 독자들은 이 이동에서 각자 어떤 체험을 하게 될까. 굳이 보행이니 이동이니 하는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그냥 책을 읽다 보면 정지돈 특유의 유머에 피식거리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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