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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무게 -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최인호 지음 / 마인드큐브 / 2022년 3월
평점 :

《문장의 무게》, 최인호, 마인드큐브, 2022.03
책 서두, 저자 소개가 퍽 인상적이다.
“단어의 나이를 묻는 것이 취미다.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은하수를 여행하기도 한다. 간혹, 어설픈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 우주를 만들기도 한다.”
위 문장만으로, 본문의 질감과 온도가 이미 만져진다면 과장일까. ‘단어와 문장’. 얼핏 건조한 시각물에 불과할 글자의 나열. 이러한 것의 나이를 굳이 묻는다거나, 저 멀리 감히 상상하지도, 닿을 수조차 없는 우주 언저리를 다녀오기도 한다니. 저자는 얼마나 깊은 상상력과 감수성의 소유자일까. 하물며,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치유를 논한다는 내가 저 정도의 감도와 각오 없이 인간을 대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무안하고 아찔하다.
저자 최인호는 문장이 무게를 지니는 것은 ‘여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백은 문장의 존재 근거다. 그것은 문장을 품은 산이며 바다이자 우주다. 그 속에는 태초의 시간과 공가니 있고, 눈앞의 경험과 감각이 녹아 있으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별빛들이 숨어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느끼고, 상상하며, 곱씹는 사람들 앞에만 나타날 뿐이다. (p. 4)”
그렇다. 저자는 단순히 글자라는 흔적에서뿐 아니라 글자가 차지하지 않는 대부분의 공간 속에서 그만의 우주를 느끼고 창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능성의 공간에서 나타나는 글자들은 저마다의 향취와 모양으로 나타날 것이고, 자연스레 존재의 지위를, 곧, ‘무게’를 가질 것이다. 이러한 문장을 저자는 ‘무거운 문장들(p. 5)’이라 말한다. 27명의 ‘대가’들이 남긴 불멸의 고전 속에서 그는 무거운 문장들의 무게를 느끼고, 열병을 앓듯 여백 속에서 노닐었다. 카프카, 밀란 쿤데라, 톨스토이, 헤밍웨이, 베케트, 프루스트, 도스토옙스키, 카뮈, 헤세, 장자, 박지원 등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룩한 문장가들 속에서 저자가 느꼈을 당혹감들이 책에 잘 녹아 있다. 적어도 최인호 저자만의 솜씨로 자 벼려서 또 하나의 여백을 창조했다.
책의 본문 구성과 디자인에서도 최인호의 여백을 끌어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보기 드문 초록 글씨의 본문과 분홍 글씨의 인용구. 각각의 장마다 충분한 여백(특히 아랫 부분을 비워두는 과감함)을 두고, 단상 형식으로 풀어가는 강단과 담박함.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대가들의 여백에서 최인호의 우주가 탄생한다. 문장 하나하나가 허투루 쓰이지 않아 쉬이 한 호흡에 읽히지 않는다. 한 구절 읽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의 상상력 속에서 이해와 숙고의 과정을 거친 뒤에나 다시 다음부터 읽어내려갈 수 있다. 다행히도, 단상 형식의 무게감 있는 글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앞으로 두고두고 읽어갈 진한 여백이 생긴 거 같아 다행이고 감사하다.

내가 생각하는 저자의 ‘무거운 문장들’ 몇 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모두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시대라니. 그러니 고독이 우리의 영혼을 더 자주, 더 심하게 흔들어 놓을 수밖에” (p. 21)
“애매한 것들이 갖는 개방성은 오히려 사랑하는 이를 정형의 특 속에 가두려는 고집스럽고 악마적인 본능과 싸울수 있는 힘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p. 25)
“비록 사소한 것들,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 담긴 시간과 공간의 물건일지라도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해 우리는 꿈이라는 몽환의 도구를 빌려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긴 세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p. 139)
“분명한 방향성이 지배하는 말들은 자체적 존재 가능성을 가질 수 없다. 그저 기생할 뿐이다. 다른 방향의 말들에게서 피를 빨거나, 그들의 방향에 탑승할 뿐이다. 그렇게 강해진 방향성의 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흔들어 놓는다.” (p. 283)
P.S.
저자는 모든 글자의 연결과 문장에 대해 위와 같은 존재의 무게를 느끼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 ‘무거운 문장들’은 흔히 말하는 고전, 대가라 불리는 작품 속에서나 지위를 갖는 듯하다. 여기도 또 하나 나의 소명 혹은 임무를 찾아낸다면. 반드시 고전이나 대가가 지어내는 문장이 아니더라도. 짐짓 평범해 보이고, 나아가 유치하고 저열해 보이는 글자와 문장의 조합에서도. 나는 우주를 발견하고, 고유의 무게와 향취를 발견해야 한다. 대가가 곧 대가인 것은, 그렇지 않은 99.99%의 여백 때문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저자보다 상상력과 감수성이 못 미치는 나로서는, 치료사이자 교육가라는 핑계를 대며 평범한 여백에게서 무게를 발견하고자 하는 나름의 방어기제적 소명과 위안을 품어본다.
*이 서평은 출판사 ‘마인드큐브’로부터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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