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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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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어떠한 방식으로 루저를 대하는가.


‘니시무라’는 루저다. 루저 가운데에서도 ‘상’루저다. 세상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흔한 부모를 대체할 조력자조차 그에겐 없었다. '그들이 죽어도 알아줄 사람은 세상에 단 한명도 없었다.' 이렇게 사회는 ‘불합리한 것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것은 자신과 동 떨어진 탑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인’ 환경 속에서 성장한 그가 물질적으로, 동시에 정서적으로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유복한 환경에 태어난 이들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그가 부자들만 노린다는 신념과 그들에게 지갑에 있는 돈을 훔쳐봤자 제로에 가깝다는 이시카와의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소매치기가 단순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불합리한 사회를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에 일정정도 기여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시민단체에 벌이의 대부분을 기증하고, 암울한 삶을 겪게될 아이에게 선뜻 돈을 내어주는 이들이 부자들만 노린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부자들의 지갑을 훔친다. 하지만 ‘니시무라’에게 남는 것은 훔쳐도 훔쳐도 결코 채워질 수 박탈감과 지갑으로 축약된 삶과 인생이 아닌 ‘돈’뿐이다. 그렇기에 지갑은 돈을 훔친 후에 버려진다. ‘가정’역시 마찬가지다. 부자들에게는 있으나 자신은 결코 가져본 적 없는 ‘가정’은 결코 획득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이는 ‘니시무라’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사랑하는 노인의 지갑을 버릴 때, 자신과 비슷한 삶을 겪게 될 아이를 바라볼 때 이성보다 감성이 묻어난다.  

 

비록 소매치기 소매치기라는 편법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손쉽게 영위하고 있을지 몰라도, 백화점의 고급 브랜드로 치장해도 ‘니시무라’가 루저임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에게도 존재 가치가 없던 유령이다. 그랬던 그에게 한 줄기의 희망이 찾아오지만. ‘기자키’ 표상되는 사회는 이미 낭떠러지로 몰아넣어진 이들에게 또 다시 절망을 내린다. 가장 밑바닥 인생이기에 가장 소외된, 아웃사이더이기에 사회의 ‘비밀’을 잘 알 수 밖에 없는 그 이유로 이들은 처단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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