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왜 갑자기 화를 낼까 - 연애에 서툰 남자들을 위한 여자 심리 특강
히메노 토모미 지음, 구현숙 옮김 / 이아소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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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젠 여자들에게 사랑받는 인생을 살 것이다.♡○☆봄에 자미원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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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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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어는 의태어 의성어가 발달했다.

슬슬 소로소로, 터벅터벅 토빠토빠, 깔깔 가라가라, 벌벌 부루부루, 줄줄 주로주로, 술술 스라스라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역사상식이 많다 일부만 보자 율곡의 10만양병설과 원효의 해골물 삼천궁녀 모두 후대에 지어낸 허구이며 여몽의 왕실 통혼도 고려에서 먼저 요청했다 60년이상 이어온 썪은 무신독재의 척결과 외교적 현안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다 조선말 세도정치 60년이 곪아 터진것과 같다고 보면 얼추 맞다.

조선이 금과옥조로 여긴 삼강오륜도 근본은 그들이 야만인이라 생각한 몽골의 노재지학이 그 뿌리다.






일본은 천황을 상징으로 남겨둔 채 중앙집권기인 에도시대 전까지 막부로 대표되는 지방군벌간의 천년 가까운 싸움으로 지방자치의 틀을 다지다 중앙지배로 하나 된 나라로 역량을 집적해 우리의 세종시대라 할 수 있는 메이지시대에 일본인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등장한 가스라 고고로, 후쿠자와 유키치, 도고 헤이하찌로, 무쓰 무네미스와 같은 근대사의 선각자들의 등장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져 막부로 다져진 지방자치와 에도시대의 중앙지배가 조화된 가운데 메이지시대를 거치며 현대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나라가 된다. 이 복받은 역사를 가진 나라는 근원이 어디일까

최근 250만에서 1000만으로 늘어난 만주족의 정체성의 근원도 같이 느껴보자.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일본인 구다라(백제), 만주족(고구려), 한국(신라)는 같은 언어 같은 핏줄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란 증거를 제시하고자 구체적이고 긴 글을 올렸다.

2002년 우에다 마사아카(일본의 저명한 원로사학자)교수는 신찬성씨록 좌경황별조 대원진인은 비다쓰천황의 손인 백제왕의 후손이란 대목에 대해 우리 기자에게 어떠한 대답도 못한 채 우물거리다 인터뷰를 끝맺는다.

고대 일본 귀족들의 족보집인 {신찬성씨록}에 "오하라 마히토, 그들은 백제왕의 후손으로 시호가 비다쓰인 분으로부터 나왔다." 이것은 {속일본기}의 내용과 일치하며 비다쓰(백제인)천황이 백제인이면 그의 아버지, 형제들(요메이천황, 스이코천황)이 자동적으로 백제인이 된다.

{신찬성씨록} 48개 마히토(진인) 성씨 가운데 21개 성씨가 백제인이고 나머지 27개 성씨도 비교분석 추적해보면 모두 백제(부여계)로 결국은 (신찬성씨록)에 관련해 나타난 황족은 모두 부여인으로 결론이난다. 인간의 역사는 잘 짜여진 소설이 아니다.

구다라나이는 가치가 없다란 뜻이다. 구다라는 백제의 국명이고 나이는 무엇이 없다 이니 원뜻은 백제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란 말이된다.






2001년 12월 23일 월드컵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천황이 자신의 몸속에도 한국인의 피가흐른다 는 즉 백제인의 후손이라 언급했고 일본언론은 아사히신문에서만 기사화했다.

전두환대통령이 일본을 공식 방문했을 당시 히로히토 일왕은 ‘사실은 우리 조상도 한국인이라 발언’ 함.

이방자여사도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본천황가에선 숭늉을 마신다고 언급.

동경대 인류학담당 하니와라 카즈로 교수는 동료교수들과 공동으로 일본 각지의 고대 무덤의 두개골등을 통한 연구조사 결과 2300년전부터 건너온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인의 조상이란 사실을 규명하고 7세기초 백제유민이 대량으로 건너가기전 고대선주민인 조몬계와 도래계인 야요이계의 비율이 1대8.6으로 나타났다 이건 현재 일본인구 1억4천만명중 도래인의 숫자가 1억1천2백만명이 넘는다는 수치이다.

교과서에 실린 것만 보자 왕인, 한고안무, 수수보리, 아직기, 왕류귀, 오경박사, 호류지, 시텐노지, 금당벽화 우리의 국보5호 일본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미륵보살은 한국에서만 나는 적송으로 만들어졌고 한국인이 귀히 여기는 약지를 세웠으며 왕건릉에서 나온 인물상과 같이 유희좌를 하고 있다.






8.15광복후 우리정부가 일본에 요청했던 ‘한국문화재 반환1호’가 구다라관음상인데 일본사찰에 내려오는 기록에 백제에서 건너왔다고 자세히 나오나 일본인들은 유럽에 순회전시할 때나 자국에서 전시할 때도 일본 고유의 작품이며 조선에서 안나는 녹나무로 만들었다고 떠들지만 녹나무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벚나무와 함께 건너간 수종이다.

스다하치만신사인물화상경이란 고대 청동거울은 503년 백제 25대 무녕왕이 왜나라 왕실의 친동생 게이타이천황에게 보내준 이 거울에 ‘사마’란 휘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1971년 7월 8일 무녕왕릉에서 나온 매지권에 사마가 무녕왕의 휘란게 밝혀졌고 거기 명문에 적힌 무녕왕의 친동생인 왜왕의 쾌유를 빌며 이 청동거울을 내린다라는 게 사실로 밝혀졌다.

무녕왕은 물에서 태어났다하여 무녕왕인가 일본의 가카라섬 즉 왕이난섬이다. 무녕왕의 껴묻거리중 여러 목재유물이 가카라섬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로 만들어졌다는게 발굴직후 일본인학자에 의해 증명되기도 했다.






다른 이야기가 많지만 칠지도가 발목을 잡아 우선 거론한다.

전통은 계승된다. 군수뇌부가 결정되면 대통령은 칼을 장군에게 하사한다. 장군이 나라의 수반에게 칼을 올리는 일은 없다. 칠지도를 누가누구에게 올렸느니 내렸느니는 중요하지 않다. 칼을 만든 사람이 칼을 받는 사람에게 하사체로 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 칼을 가진 자는 어떠한 적병도 물리칠 수 있다’란 명문, 어느 미친분이 그런 칼을 아무에게나 주겠는가 믿을 수 있는 같은 핏줄 아니면 어림없는 소리다.

백강전투에 패한 직후 왜군들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며 왜군들이 귀소처의 상실로 눈물을 흘린 사실을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712년에 지은 고사기의 저자 오노 야스마로 그의 부친은 황산벌에서 마지막으로 전사한 백제장수의 아들이다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 안톤 오노 그냥 우연한 일이다.

백강전투 패배이후 야마토는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 최후방어선을 구축하는데 1,2,3차 성이 차례로 금전성 오노성 다자이후성이다.






알타이의 아사달 아사달은 고조선의 수도로 아침해 뜨는 언덕이란 뜻이 담겼고 고조선의 남하한 6부족유민이 세운 신라는 아사달과 김씨의 나라 김연아 그리고 아사달이 일본으로 건너가 받침이 사라져 아사다 마오 아사히 신문 아스카문명 그냥 우연이다 로또의 6자리 숫자처럼 가야 노부나가 이에야스, 백제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아이신자오뤄 누루하치도 사실은 김씨다 노루하치의 성인 아이는 아버지 신자는 신라 오뤄는 잊지말자 해석하면 아버지의 나라 신라를 잊지말자가 된다.

고사기보다 후대인 772년에 쓰여진 상표문엔 아스카 인구중 80-90%가 백제인이라 적고 있다. 아스카땅에 호류지의 찰주를 세우던 날, 소가노 우마코(목만치의 5대손)대신과 100여명의 만조백관은 모두 백제옷을 입었고 보는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했다 기록하고 있다.

현대에도 미치다 미치루 노루가 노로 미역, 미나리, 미늘, 미숫가루, 미꾸라지 모두 미즈(일본말 물)로 통한다 미는 즉 물이다.

할매, 아지매, 지우히매처럼 남도의 사투리는 일본어의 뿌리가 된다.

김춘추는 왜사신과 대화에서 통역을 쓰지 않았고 백제 여인은 왜인과 대화했다고 일본서기는 남기고 있다.






어느 신문사의 일본 속 한국이란 제목으로 일본문화답사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구르다+마(싣는 기구)=구르마란 답이 나온다.

하나의 언어가 둘로 갈라지는 것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불과 2세대안에 끝난다 어중간한 상태의 단계는 아주 짧다.

8세기중엽 만엽집과 10세기초의 고금집은 그 실린 시구가 크게 다르다.

시모노세끼 근방 해안에 도이가하마라는 야요이시대 공동묘지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인골유적이 있다. 모두 마한땅으로 머리를 두고 있다 귀소본능이 이런 것일까.

일본인들은 백강전투의 분을 풀기위해 신공왕후를 통해 신라정벌이란 글로써 복수했고

조선은 임진왜란의 분을 풀기 위해 우리가 임난후 통신사로 보낸 사명당을 통해 글로써 복수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두나라 사이에 대한해협이 끼어 있어서 조선동란(삼국전쟁등)이 일어나고 있을 때 일본은 보다 일본적으로 바뀌어갔다.

신라는 백제의 문화를 망가뜨리고 장인과 유물을 많이 가져갔으며 남은 백제의 명맥을 섬에서 나오지 못하게해 결국엔 섬나라로 만들어버렸다.

일본은 조선의 문화재를 망가뜨리고 장인과 유물을 잡아갔으며 조선이 반도국에서 주저앉도록 반도사관을 심고 우리의 옛강토인 간도를 빼앗아버렸다.

신라는 백제의 역사를 축소왜곡말살했으며 일본은 조선의 역사를 축소왜곡말살했다. 역사에서 일방적으로 주는건 없다 뿌린대로 거둘뿐이다.






고대 백제와 일본은 누가누구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안에 경기도지사 강원도지사가 있듯 그냥 부여계 집단들의 모임이었을 뿐이다.

백제의 아비지는 황룡사탑을 조선의 심수관, 이삼평은 사쓰마 야끼등을 선사했다.

삼국사기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동성왕과 무녕왕이 각기 일본에서 귀국해 백제왕으로 등극했다는 기사가 있다 또 일제시대에도 조선총독으로 재직하다 일본수상으로 옮긴 경우도 있다. 생소해서 안믿기는가 중국사료엔 구려의 추를 유인해 죽였다고 했고 삼국사기엔 추(주몽)의 밑에 장수가 잡힌 것이라 다르게 적고 있다.

삼국사기엔 백제 26대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신라 말을 관리하던 하급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적고 있지만 일본서기엔 왜로 건너와 긴메이천황이 되었다 적고있다.

누가 그랬다 재료를 살 때 바가지를 안쓰려면 재료상 세 군데 들러서 값을 알아보라고...

중국측 자료엔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에 흐르던 강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고 기록되었지만 중국에선 해석하길 선조들이 실수로 적은것이라 말하고 있다. 어떤것이 진짜일까

왜국도 잃어버린 강토와의 연을 끊고 새롭게 나가야 자기들의 살길임을 알았을까








하지만 한일이 원수의 길로 들어선건 과거 북위도 하지못했던 양쯔강 이남을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정복을 한 후 영토야욕을 일본으로까지 확대해 고려에 압력을 넣는다.

문하시랑(국무총리)이장용은 칸에게 무력충돌을 막으려 국서를 쓰지만 무시되고 여몽군에 의해 대마도 이키섬이 무자비한 학살을 겪으며 전대미문의 침략앞에 놓인 일본은 무쿠리고쿠리인형을 만들어 고려에 대한을 원한을 싹트고 고려일본 두나라는 원하지 않던 전쟁으로 20세기까지 적대적인 역사를 되풀이하기 시작한다. 일본이 원폭을 맞을때 일본의 작가 이부세마스지는 버섯구름을 보고 그의 글에서 무쿠리고쿠리의 구름이 마치 지옥에서온 사자와 같다 쓰고 있다. 그들의 마음속에 여몽연합군의 침략이 얼마나 뿌리깊은 원한으로 남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교류가 없으면 언어도 이질화되고 결국엔 2개국어가 된다. 몽고어와 한국어는 유사점이 매우 많지만 현재 지리상의 장애물도 많다 한국어 만주어 일본어는 오랜 기간 떨어져 있어도 생각해봐야할 언어다 북한어와 남한어는 분리가 시작되는 단계의 언어다.

만주어, 고대한국어, 일본어는 모두 받침이 없는 개음절이지만 현대한국어만 받침이 있는것도 한번 생각해보자. 또 현대한국어도 조사가 붙으면 개음절이 된다.






조선 일본 몽고 거란 고려 부여 여진 신라 모두 국호가 해를 상징하며 유목민은 해를 숭상했다는 점이다. 유목민은 살찐 양과 큰 뿔 가진 순록을 귀하게 여겼는데 고려란 글자를 풀이해보면 그게 나온다 신라의 금관이 사슴뿔과 자작나무를 상징하듯

생태학적으로도 시조는 같으나 오랜 기간 떨어져 있으면 별종처럼 보이는 종이 참 많다.

고구려 사람들은 668년 이후 당으로 일부는 신라로 편입되고 일부는 돌궐방향으로 서진한다. 일제시대 우리는 만주로 연해주로 일본 구라파로 중앙아시아로 흩어졌고 결국 우린 한반도에 남아 있지만 고구려는 민족 전체가 그 땅에서 사라졌나보다.

일본이 도시락 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국물에 건더기가 없어서다 그네들은 수저가 있을 필요가 없다 단 한 사람 천황만은 한국사람처럼 수저를 쓴다. 고구려벽화엔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이 많다. 우리도 왕비가 주름치마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명왕이 큰 강을 만나 거북에 올라타 쭉 갔고 일본초대 천황인 진무도 동정하다 바다를 만나 거북의 등에 올라타 쭉갔다. 거북을 신성시하는 것까지 공통이다 거북 참 오래도산다.






고대 우리 역사의 흔적은 고베를 비롯한 세토나이카이(내해)를 따라 지명, 유적, 유물이 수없이 많이 남아있다.

계미년(503) 8월 10일 남동생인 왕(게이타이천황)을 위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무녕왕)께서 아우님의 장수를 염원해 개중비직(강력한 힘을 가진 직책)과 예인금주리등 두 사람을 보내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라는 말이 인물화상경에 나오고 무녕왕릉의 매지권에 무녕왕의 휘가 사마로 확인이 되었으며 무녕왕릉출토 거울이 스다하치만신사인물화상경과 쌍동이처럼 닮았다.

927년 일본황실이 제정한 {연희식-엔키시키}에 따르면 현재 오사카의 아스카베신사는 일본황실의 사당인데 원래이름은 곤지왕신사였다고하고 이것이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아스카베신사로 강제 개명되었던 사실이 있다.

14세기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저서 {신황정통기} 옛날 일본은 삼한과 같은 종족이라함 그러나 그와 관련된 책들은 간무천황때 모두 불태워졌다하고 {일본후기}에 따르면, 헤이조천황 대동4년(809)에 일본은 과 삼한이 같은 종족이라는 서적을 관청에 바치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만약 이를 감추는 자가 발견되면 엄벌에 처한다"는 칙령을 내림

18세기 고증학자인 도데이칸은 일본인들의 대부분은 백제인으로 조직되었다 단했고 1915년 6월 29일 일본 정부는 치안상의 이유로 김해김씨 족보의 발행을 금지 당시 김해 김씨의 족보에는 수로왕의 7아들이 구름을 타고 가야를 떠나 일본으로 간 것으로 적혀있었다.






왜는 범쥬신인 범한국인들의 명칭이며 광개토대왕비의 왜를 가야인으로 해석하면 비문의 내용의 앞뒤가 딱 들어맞는다. 가야가 망한후 왜란 명칭이 열도인을 가르치는 말로 바뀐다.

고려의 지배층에 편입된 신라인들은 그들이 백제와 고구려를 완전히 없앴다고 해야 조상의 위신이 서지 않았을까 만일 고구려와 백제의 후예들이 다른 곳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면 신라의 최대치적인 삼국통일을 했다는 역사가 더럽혀질게 뻔하다 고려에 궂이 ‘구’자를 집어 넣어 고구려로 만든 건 어쩌면 거란, 여진이 고구려를 대신하고 남부의 일본이 백제의 명맥을 이어가는데 자기들이 섬기는 나라 고려가 그 위에 고려인들이 세운나라와 더불어 열도백제까지 같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위신이 무어가될까 그래서 우리의 역사서엔 통일신라를 강조했고 한반도 남북부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까 그래서 소송녕과 서희가 옛고구려를 들먹인 것일까

거북선이 철갑선으로 둔갑한 이유도 붓으로 싸운 조선군을 칼을 가지고도 못이겼으니 무언가 그럴듯한 패전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1995년 8월 동몽골 다리강가에서 고구려식무덤과 성곽을 손보기교수가 발굴했다 7세기흉노는 10만가구를 남겨두고 서진해 질지(우즈벡)를 거쳐 훈족, 헝가리로 이주한다.

7세기말 동몽골에서 발원한 종족이 몽고인의 실질적인 조상이된다. 그리고 고구려가 역사에서 사라진건 668년이다.

한국사학계에선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시라토리 구라키치를 지목한다. 헌대 그는 1933년 발해에 관한 논문에서 지배층은 고구려인 주민은 말갈인이라 발표했고 현재 우리사학계는 그 논문을 신앙으로 여기고 있다. 말갈이란 말은 5세기부터 사용된 고구려인의 비칭이란게 이미 정설이 된지 오래다.

우리아기 사진첩에 우리아기보다 다른 아기사진이 더 많이 실려 있다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우리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처럼 일본엔 일본서기와 고사기엔 백제의 역사가 일본역사보다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시대 그들은 우리의 정수리에 앉아 조선을 통치하고 물러났다. 우린 일본이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다스린걸 기리기 위해 일본궁, 일본강, 일본마을을 만들진 않았다.

교토 천황궁엔 죠메이천황을 안치하기 위해 구다라궁 북쪽에 지은 빈궁의 이름 역시 구다라대빈(백제대빈)이었다. 백제교, 백제문을 비롯해 소가노 우마코(목만치의 5대손)가 호류사에서 행사할때도 귀족들이 모두 백제옷을 입었다고 일본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 군부는 한국과 관련된 지명을 수도 없이 없앴는데도 백제강, 백제역 백제신사 백제마을등 너무 많은 우리고대 지명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규슈 기리시마공원에서 가장 거대한 산봉우리는 한국악이다.

일본땅을 만든 두신중 남신인 이자나기가 요미노쿠니(황천)를 탈출하여 온 곳도 히무키노쿠니 현재의 규슈 아와키하라 해변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섬 규슈는 일본 고대사가 시작하는 땅이다.

우두산이 한국엔 거창, 소양강등 여러곳에 있다 일명 소머리산 일본엔 소시모리가 고대역사의 중요한 지명으로 쓰인다. 소에 남부억양이 참가되어 시 머리는 모리로 변한다.

단군이 천부인인 거울, 북, 칼을 가졌고 천황가의 3종신기인 구리거울 , 칼 , 곡옥을 가졌다.

신들의 이사를 간나즈키라 한다. 10월에 신들이 일본을 떠난다는 말이다. 우리의 영고, 동맹은 10월에 한다. 그냥 우연이라 생각한다. 평안도말에 간나새끼가 있듯이

백강전투 후 한국과 일본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후에 각각에서 독립적으로 생긴말이 가까운 것은 그만큼 한국과 일본의 기초어와 사유방식이 비슷했음을 의미한다.

고사기에 나오는 농업신 ‘히요우케 히매가미’가 죽자 그의 몸에서 곡식이 나오는데 머리에선 소, 말 눈에선 누에가 배에선 벼 귀에선 기장 코에선 콩 보지에선 보리라는 한국남부어가 등장한다. 또 우케를 훈민정음에선 찧지 않은 벼라고도 말했다.

고대 한국어에는 ㅆ이 없었고 받침도 없었지만 중국식 원음대로 한자를 읽어온 한국은 이두로 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음운범위를 확장했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혁명적인 한글이 창제되었으며 고대의 음운변화를 그대로 유지해온 일본어는 동음이의어가 많아져 한자의 뜻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만일 백제가 백강전투에서 승리했다면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언어는 영국과 미국이 영어를 쓰는 것처럼 백제어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19세기말 영국수상 솔스베리가 남미에 대한 이권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남북미대륙의 이권 독점을 내세운 먼로주의의 파기를 요구하자 미국대통령은 의회에 영국에 대한 전쟁 선언을 요청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중남미에서의 이익이 엇갈리자 전쟁 일보직전의 험악한 관계가 되고 미국민은 영국에 대한 독립전쟁을 되새기게 된 것이다.

이때 영국 외상 밸포어의 ‘서로 같은 영어를 사용하는 국민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말 한마디로 전쟁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간 한일 사이에는 거듭되는 전쟁, 침략의 역사로 얽히고 있는데 언어를 공유하고 있었다면 지난 역사와 같은 극단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되면 유물도 다 찾을 수 있다 통일이된 후 국립박물관이 평양에 있으면 어떻고 제주에 있으면 어떤가 초기엔 반발도 국가적으로 거세겠지만 대한민국의 경상도, 전라도의 현실이 나은가 신라와 백제로 나뉘어 싸우는게 나은가

밥을 들고 먹으면 우린 상놈이라 한다. 일본은 밥그릇을 내려놓고 먹으면 짐승이라 한다. 우린 산꼭대기에 올라가 쉬고 일본은 꼭대기에 오르기 바로 직전에 쉰다. 그 차이가 무슨 상관인가 서로 차이가 있는게 무슨 야만족의 척도인가 이세상엔 야만족이란 없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 못하는 외부인만 존재할 뿐이다. 우린 일제식민사관을 심각하게 여기지만 인조반정 공신들의 여진, 몽골에 대한 더러운 협잡을 우리 뇌리에 깊이 심음과 우리를 오랑캐로 생각하는 중국을 사모하는 소중화 사상의 폐해가 더 심각하다 생각한다.

충렬왕 같은 부마왕을 몽고가 만들었다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상할대로 상한 무신정권을 뒤엎고 노련한 외교를 위하여 우리가 먼저 몽고와 왕실혼을 제안한걸 우리는 반대로 알고있다. 고려는 역사서를 본기로 적고있지만 우리가 존경하는 집현전학사들은 우리역사를 중국의 지배하에 있다는 세기로 낮추어 적고있다는걸 우리는 지나치고 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황제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33배를 했다고 배웠지만 그런 일은 우리사서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조의 100만대군이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대장금에서 중국사신이 그녀를 인정해주니 기분 좋은가 일국의 왕위계승 문제도 별볼일 없는 중국사신에게 허락을 받아야한다는 게 조선왕조는 좋았나보다 이성계가 이자춘의 아들이 아니라 이인임의 아들이라 그들의 사서에 적어놓았기에 우린 주청사를 보내고 건국후 180년 동안 굴종적인 자세를 유지했다는 걸 인조반정공신들은 애써 외면하고 오로지 사대사관만 후손들에게 심는 걸 최고의 덕으로 삼아 우리의 학창시절에도 소중화사상을 참 많이 주입받은 기억이 난다.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에 국호가 없어지지만 왜국은 669년부터 왕 또는 대왕의 호칭을 천황이라 고치고 일본이란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백제의 강돌문화를 넘어 마한을 정복한 후 백제가 일본열도를 백제땅으로 끌어들인 것은 오진왕 때부터라는게 통설이다.

일본문화와 조선문화가 같은 조상에 의해 이루어진 부분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솔직하게 받아들여서, 일본문화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또한 그들의 고분에서 삼국의 유물이 나왔다고 우쭐대며 식민지시절의 분풀이를 하듯 우쭐대기 보단 80년대초 잃었던 피붙이를 만나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이산가족상봉 같은 느낌을 가지라면 나의 욕심일까






여진족은 중국각지에 만성(만주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세워 260년간 350:1이란 민족비율로도 팔기제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확립해왔다.

18세기초에 옹정제는 “앞으로 시위와 호군 및 황궁을 지키고 파수보는 모든 인원은 만주어만 사용해야 한다. 한어는 절대 사용해서는 안된다. 훈련시 병사들이 소집되어 연병장에 있을 때에도 만주어만 사용해야 한다.” 할 정도로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우리가 잘 아는 마지막 황제 푸이가 할 줄 아는 만주어는 “일리” 즉 일어서다란 만주어인 일립비의 명령형인 일리뿐이었다 한다.

뇨후루씨의 뇨후루는 만주어로 늑대를 뜻하는 뇨허이고 한어로 늑대랑이라고 쓰다가 후에 젊잖은 의미의 동음이의어인 사내랑으로 바꾸어 랑씨가 된다.

만주족의 한화의 원인은 만주족의 후손들에게 중국이라는 또 다른 고향이 생겼기 때문이다.






1750년쯤에 건륭제는 신강원정을 단행하고 시버와 솔룬은 탁월한 전공을 세운다.

전쟁이 끝나고 신강을 병합키 위해 수천명이 영구 주둔 임무를 띠고 가족과 함께 파견되어 현재까지도 4만명가량의 시버족이 남아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만주족이거나 자신들의 말이 만주어라고 알지못한 채 현재 지구상에서 만주어를 말하는 마지막 사람들로 남아있다.

누루하치가 칼카몽골에게 보낸 서신에서 “중국과 조선 두 나라는 오직 언어만 다르다. 그들은 입는 옷도 같고 생활방식도 같다. 몽골과 여진 두 나라는 오직 언어만 다르다 우리는 입는 옷과 우리의 생활양식도 같다.” 또 흑룡강일대 시보, 솔론, 다우르, 부트족은 지리, 언어, 생활양식 면에서 여진과 몽골의 중간단계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대한해협이 있어 한일어는 중간지대가 없다.

그래서 두 개의 언어로 착각하게 된 건 아닌지






건륭제는 서몽골인 준가르제국을 정복할 때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도시를 점령하면 그곳의 주민을 모두 죽이는 작전을 구사해 서몽골의 준가르제국을 점령한 후 서몽골에 남아 있는 몽고족은 전쟁전의 10분의 1로 줄어들어있었다.

현대에도 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뚱이 국토정화 명목으로 내몽골의 원주민 수십만명을 죽이거나 몽고로 쫓아 보냈으며 대만의 20%의 소수민족을 구성하는 중국인 정권의 수장인 장개석도 2만명의 대만원주민을 학살했지만 이들의 행각은 건륭제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고 건륭제는 알타이유목민이 정체성을 상실했을 때 같은 민족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대륙을 넘어 정복활동을 한 몽고와 후금은 대양과 대해에서 무수한 수전을 경험한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지만 고려는 정책상 하위에 있었기에 강화도를 안건넌거 뿐이다.






금태조 아골타와 후금의 누루하치는 모두 아이신자오뤄란 성을 가지고 있다.

아이는 아버지 신자는 신라 오뤄는 잊지말자 즉 아버지의 나라 신라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두 사람도 모두 경주 김씨를 쓰고 있다.

금나라는 고려를 아버지의 나라라 보듬어 안았고 후금은 조선의 계속된 호전적 태도에도 국채를 유지시켜 준다.

현재까지도 청대 만주족 팔기의 후손들은 과거의 만성이었던 여러 도시에 거주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렵게 지켜나가고 있다.

이제 고구려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말조차 잊은채 250만으로 줄어들어 중국에 흩어져 있다.

중국이란 나라가 만들어진 후 그들의 국시는 한결같이 주변 민족을 거란처럼 흡수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인조반정 공신들과, 이성계가 신앙처럼 여기는 새끼중국인 사상인 소중화사상을 언제까지 중국의 전통인 장자세습, 과부의 재가금지, 남존여비, 시집살이 , 항렬(돌림자)를 가보로 간직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정체성을 점점 인식하고 있는 남아있는 주변의 형제들과 다시 한 집에 살 것인가

문화적 특징인 언어가 사람들을 결합시킨다면 구성원이 모국어를 포기할 때 그 집단은 해체된다.
♡○☆
봄에 자미원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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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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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화사대주의자 4.3에서 아기까지 학살한거나 자연도앞바다에서 왕씨 아기들까지 학살한 정도전이나 이런 사람들이 대장금에서 외교부 국장급되는 명나라 사신앞에서 정승이 벌벌 떨며 굽신거리는
장면을 보면 좋아해요 책(명나라로 끌려간 조선공녀 잔혹사)읽어보십시오 ○☆♡봄에 자미원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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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 서북 국경과 위화도
허우범 지음 / 책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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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만약 권율장군이 역모의 수괴였다면?



학교에서 배운다. 소중화주의 한국은 작은 중국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여진,조선,일본을 오랑캐라 말하며 조선은 여진,일본을 오랑캐라 부른다.

임진왜란때 일본도 조선인 포로들을 오랑캐라 불렀다.



권율장군은 충신이고 영웅이다. 소설을 한 번 써보자.



권율장군이 어디 권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철원권씨라고 가정해본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전 조선이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시비를 건다.



연산군때까지 일본에 공녀를 바쳤던 조선은 중종때 자주개혁을 선언하며 이를 단절시키나



다시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은 이를 요구한다.



10만양병설(한국사상식 바로잡기)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나 만일 실미도처럼 잘 훈련된



군대를 권율에게 맡기고 총지휘권을 주어 정벌하라 명했는데 낙동강쯤가다 지금은



농번기라 안되고 비가 많이와 화살이 느슨해지니 안되고 북쪽에 있는 나라가 남쪽에



있는 나라를 치는건 예의가 아니다라며 다시 회군해 개혁을 하고 있는 조선왕조를



쓰러뜨리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명을 권율의 고향인 철원으로 하오리까 가야라



하오리까 여쭌다.



이에 고무된 도요토미는 가야란 이름이 아름다우니 (일본고대사서중 하나에 가야는



임라일본부 즉 일본의 식민지였다란 허구적이야기가 있다) 국명을 가야라하거라.



그후 가야의 태조 권율은 자신의 역모를 감추기 위해 소왜국주의사상을 내세워



조선은 작은 일본이라 칭하며 일본은 아버지의 나라라하여 큰나라에 빌붙여사는



사상인 사대주의로 일관한다 동국여지승람의 동국도 중국의 동쪽에 붙어있는



중국의 속국이란 뜻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칠 수는 없다. 그럼 권율(이성계)이 낙동강(위화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게 정당화된다.



그리고 다시 공녀제도를 만들어 매번 공녀를 뽑아 왜국에 상납하고 그 반작용으로



조혼제도가 가야시절 내내 자리를 잡는다.(명나라로 끌려간 조선공녀 잔혹사)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도 때되면 수십명씩 공녀를 보내고 멀쩡한 남자아이들 고자 만들어 수십명씩

심심하면 보내니 조선은 명나라에 예의를 다하는 나라라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게 오랫동안 정착되어 1909년 민적법에(노컷 조선왕조실록) 의해 성씨가 없는



노비나 백정,망나니,재주꾼들은 기왕이면 왕족의 성씨를 갖자며 철원권씨나 김해김씨를



가져가고 이들의 후손중 성공한 사람들은 진짜족보를 사서 종친회에 나온다.



한술 더떠 어떤 이들은 진짜임을 강조하고자 권씨가 아니라 궐씨라고 고쳐부르기도 한다.



몽고는 세계를 휘두른 국가다 원도 몽고족이 세웠고 러시아인도 한꺼풀 벗겨내면 속은



몽고인(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인도 무굴왕조,타타르까지 전세계를 휩쓸었다 황인종을 몽골리안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고려도 세계속에 그것도 몽고 바로 옆에 있다 모든 나라가 복속해야했듯 고려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되고 앞에 충성충자를 왕에게 붙였으며 공녀를 바쳐야했다



이건 고려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적인 일이었다.



명은 원을 물리치고 중원만 통일한다 그리고 고려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건다.



물론 여기엔 공녀도 포함된다. 고려 공녀는 공민왕이 등극함과 동시에 없앤제도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힌 고려는 전군의 총지휘권을 이성계에게



맡기고 명을 치라 명한다.



고려는 문무를 겸비한 국가로 무인기질이 강했고 여러 전란을 거듭하면서 실전경험이



풍부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전권을 갖게된 이성계장군은 위화도에서 우기가 오길 기다리다 지금은 비가 많이와



화살이 느슨해져 안되고 농번기라 안되고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치는건 예의가 아니라며



창끝이 겨눈 방향을 반대로 돌린후 고려를 무너뜨리고 고려에 싸움을 건 적국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새로 생긴 왕조의 국명을 이성계의 고향인 화양이라고 하오리까



조선이라고 하오리까 묻고 명태조 주원장은 조선이라는 이름이 아름다우니 (고대 조선은



중국이 지배했다고 중국은 아직까지 우기고 있다) 조선이라고 하거라라고 명한다.



이 때 고려의 대신 이인임이 이성계의 선조라고 자기네 사서에 기록해 후손들이 조선에



대한 외교적 히든카드(조선도 몰랐던 조선)로 써먹도록 조치하고 이를 임진왜란 직전



오키나와 상인들에게 전운이 감돈다는 정보(풍수화/김용운)를 입수한 명의 관리들이



이 히든카드를 써먹는다.



홍역관과 병부상서 석성의 이야기는 얼굴마담일뿐이다.



공녀를 보자 이성계는 즉위하자마자 공녀제도를 다시 부활시킨다.



그리고 조혼의 풍숩이 조선내내 이어지지만 지금의 교과서엔 조선의 공녀이야기나



조선시대 조혼이야기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온통 고려공녀 충성충자 고려임금 이야기뿐이다.



우리 조상들도 항상 그랬으니까 조선이 중국을 사대주의로 떠받들고 사대로 일관하는건



당연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래야 자기들의 죄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개척한 갈라전(동북3성과 함경도일대)도 윤관의 동북9성도 흥남부두일대로



왜곡되어있거나 함경도로 국한되고 교과서엔 온통 세종대왕의 4군6진이야기뿐이다.



태종 이방원은 고려군관 출신이고 세종의 대마도 정벌도 사실은 태종의 작품이다.



다시 말해 고려의 무인기풍이 세종때까지는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군권은 모두 임금에게 집중시키는 체제를 만들고 공맹사상만을 강조하는



문치시스템에만 역점을두어 결국엔 임진왜란과 36년국치를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다.



몽골제국시절 세계가 몽고에 머리를 조아리며 공녀를 바쳤지만 명나라시절 세계에서



명에 머리를 조아리며 공녀를 바친건 조선뿐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진짜 전주이씨임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은 이씨가 아니고



리씨라고 주민등록증에 달고다닌다.



악인열전을 보자 히틀러가 있다 600만명의 유대인을 독가스로 살해한 인물 독가스를



누가 나치에게 팔았는가 유대인재벌 로스차일드가문 그 후손들중 일부와 관계자들은



AP,UPI,로이터,워싱턴포스트,헐리우드 ,뉴욕타임스,뉴욕포스트등등 모두 그들 것이다.



위인전을 보자 이성계.나폴레옹(지식의 미술관) 모두 역모의 수괴인데 그 잔당들이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너무 작아도 안보이지만 너무 커도 안보인다.



나폴레옹은 남의 나라 사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역모의 수괴인 이성계 이제 그만



이완용 같은 반열인 악인열전에 올릴때도 되지 않았을까88

참고도서

한국어는신라어일본어는백제어
김의나라
대쥬신을 찾아서 1,2
욕망하는 지도
명나라로 끌려간 조선공녀 잔혹사
거란제국사연구
反중국역사
국운풍수
부자를 만드는 풍수명당
노래하는 역사
동북공정 고구려사
중국의 조용한 침공
광해군
국가가장기를 약탈한다
중국의 거대한 기차
만주족의 청제국
사마천의 화식열전
풍수화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패러다임
간도영토의 운명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탈북마케팅
찔레꽃
팍스 몽골리카와 고려
황하에서 천산까지
중국없는 세계
김두규교수의 풍수강의
한국,번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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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세트 - 전10권 - 조정래 대하소설, 등단 50주년 개정판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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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민족의 얼을 오늘에 되살려가 책곳곳에 있는데 제목은 1903년 고토 분지로가 조선의 지하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20개월간 산하를 돌면서 (조선산악록)이란 책을 저술하는데 거기서 처음 등장한 단어가 태백산맥 이다 내용은 민족의 얼이고 제목은 일제식민지 용어고 잘논다. ♡☆○봄에 자미원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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