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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히스토리 -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대응 방식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6월
평점 :
체르노빌 참사 당시 플로히는 파괴된 원자로에서 500km도 떨어지지 않은 드네프르강 하류 지역 철의 장막 뒤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저자 세르히 플로히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참사의 생존자이자 역사학자로서 사고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시각으로 이 책을 썼고, 푸쉬킨하우스 러시아 도서상을 받는다. 그리고 현재 하버드대학 미하일로 흐루솁스키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우크라이나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다.
이 책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두 가지다. 가깝지만 가까이하기 힘든 이웃나라 일본과 비슷한 이야기를 다뤘을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참사 생존자이자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아진 사람이 용기를 내어 직접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소설 순이삼촌이 떠올랐다. 피해자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은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입에 귀 기울여주지 않으니까.
체르노빌 원전 폭발로 누출된 방사능의 양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몇 백 개 분량에 달한다고 한다. 체감이 어렵지만, 체르노빌 원전이 폭발하고 바람에 실려 스웨덴까지 날아간 플루토늄-239의 반감기는 2만 4000년이라고 한다. 그래서 프리퍄트는 현대판 폼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그러나 세상을 바꾸고, 썩어 들어가는 부분을 조금이나마 고쳐온 것은 불편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용기를 냈던 사람들의 노력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책도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 연구물. 쉽게 목소리를 내기 힘든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의 말은 대부분 일치한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훗날 더 큰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국가적으로 큰 피해를 입고, 많은 이들에게 끝나지 않는 고통을 남긴 일에는 공통점이 있다. 누군가 문제를 발견하지만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당국은 침묵을 지킨다는 것. 사고 후 당시를 떠올려보면 규정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 서둘러야 할 누군가는 서두르지 않았고, 큰 피해를 입고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는 것.
살다 보면 아는 것이 힘이고, 모르는 것이 죄가 될 때가 있다. 체르노빌 사고 지역 주민들은 죄가 없지만, 방사능에 대해 몰랐기에 어린아이들이 노란 알갱이들을 모래와 함께 가지고 놀았으며 원자로 부근에서 헬리콥터를 조종했던 조종사들은 피부가 검게 변하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간과했을 방사능 피폭 증상이다. 4월 27일에 원자로 위에 모래주머니를 투하했던 조종사들은 5월 초에 모두 병원에서 방사능 피폭 증상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우리는 흔히 방사능 피폭 피해로 암에 걸린 환자나 유전자 변형을 일으킨 물고기를 생각하지만,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하다. 골수가 모두 파괴되어 백혈구를 만들어내지 못해 여동생의 골수를 이식받은 한 피해자는 4일 만에 임신 중인 아내를 남겨두고 숨을 거둔다. 이들의 시신은 관에 들어가기 전에 플라스틱 백에 싸여 아연으로 만든 관에 담겨 매장되었다. 그리고 관 위에는 시멘트 타일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했다. 유가족은 시신을 인계받을 수 없었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투입된 헬리콥터 조종사와 소방관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은 국민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민족적 비극이 발생하면 어쩜 이렇게 대응 방식들이 비슷할까.
우크라이나에서는 사고 발생 이후 소아암 비율이 90퍼센트 상승했다. 사고 발생 이후 20년 동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사고 당시 18세 이하였던 주민들 중 5천 건의 갑상샘암 발병이 보고되었다. 세계보건기구는 암으로 인한 사망이 체르노빌 사고와 관련 있을 것으로 추산했고, 전문가들은 이 수치에 의문을 제기한다. 어디서든 사고 피해자의 수치는 축소당하기 마련이다. 어느 죽음이든 안타까운 것은 마찬가지지만,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사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은 늘 앞장서서 세상을 떠난다. 숭고한 희생을 함부로 안타깝게 봐도 될지 조심스럽지만 나에게는 상상조차 버거운 일이다.
저자는 인간의 오만과 책임 회피가 더 이상 재난의 확산을 부채질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조금도 피해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얼마나 책임감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 본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흐린 눈으로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