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70
인연은 언제든 이어지며 억지로 꿰맞출 필요도 일부러 떼어낼 필요도 없다.
p108
내가 사막을 여행했기 때문에 특별한 건 아니야. 누구나 특별하지. 난 그렇게 여행하고 나서야 끌레르가 말한 후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의 뜻을 깨달았어. 내가 결정해서 나온 결과에 대해서는 그냥 기쁘게 받아들이면 돼. 후회할 필요가 없는 거지. 끌레르는 그 말을 미리 해 주었던 거야.
p116
지금 원하는 것과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건 같지 않을 수도 있어.
미미는 고개를 갸웃댔다. 내가 원하는 것이면 원하는 거지 아닐 수도 있다니.
여행은 자신을 알게 해줘.
미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자신을 몰라? 넌 장미고, 난 고양이야. 너 장미, 나 고양이
중략
물론 넌 특별해. 너는 여행을 하는 동안 원한다고 생각했던 게 실은 원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너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 거야?
한마디로 정의할 순 없어. 오직 질문을 품는 자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지.
p154~159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자 이번에는 남편을 처음 만난 날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략
엄마가 어디 놀러 갈 때만 바르는 구찌베니를 얻어 발랐다. 점심때가 지나 어른들을 대동하고 읍내 다방으로 나가 남편이 될 사람을 처음 만났다.
중략
수더분하게 생겼지만, 눈이 빛나고 입이 두툼해서 믿음직스러웠다.
중략
양가 어른들은 그래도 세상이 바뀌었으나 당사자가 한 번은 서로를 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둘을 다방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중략
서로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가 보이자 어른들은 먼저 자리를 피해주었다.
중략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다른 영상과 기억이 떠올랐다. 현실처럼 생생한 영상을 보며 복순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커피를 마시자 이번에는 아들을 낳고 키우던 때가 영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중략
열 달을 품어 마침내 마주한 아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
이 아이를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로 작정했다.
중략
잠시 후 배네짓을 하며 다시 웃었다. 복순은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눈을 뗄 수 없었다.
중략
밤꽃이 뒤산에 지천으로 핀 어느 날, 누가 얘기해 주지 않아도, 통지를 받은 적도 없었지만, 복순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느낌으로 알았다. 전쟁 막바지에 남한군이 38선을 넘어 올라오고 있다고 했다.
중략
커피에서 쑥을 태운 듯한 쓰디쓴 향이 느껴졌다. 쑥은 상처를 치유한다.
중략
고통 가운데 눈을 뜨니 카페에 앉은 복순 앞에 아들이 서 있었다. 평온한 얼굴의 아들과 영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고통은 살아갈 사람의 몫이었다. 복순의 가슴에 난 큰 구멍으로 찬바람이, 눈보라가, 한여름이 폭우가 쏟아지는 모습이 보였다. 찢어질 듯한 고통에 복순은 몸부림을 쳤다.
중략
복순은 그 뒤를 따라 하얀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공간은 빛으로 가득했고 복순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정지하면 이런 느낌일까?
p177.178
인간은 운명을 부여받은 후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최후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시간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면서 과거라는 바닥에 새겨진 비밀스러운 자국이 있다.
창조의 능력은 신들만의 영역은 아니었다. 고대 인간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다. 만들어진 신은 인간의 염원으로 생명력을 얻어 인간을 다스렸다.
중략
신을 만든 인간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모두 사라지고 신들은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운명의 여신들도 그렇게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