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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 아래에서 ㅣ 세계 문학 단편선
기 드 모파상 외 지음, 정회성 외 옮김 / 다정한책 / 2025년 5월
평점 :
봄은 어딘가 좀 억울한 구석이 있는 계절이다. 이제 막 움트는 새내기일 뿐인데 기대치가 높은 편인데다 뭐만 하면 죄다 봄탓으로 돌려버리곤 하니 봄으로선 좀 난감할 게 분명하다. 나도 해마다 봄이 되면 하루쯤 봄탓이라고 후루룩 호기를 부리는 날들이 꼭 한 번씩은 있다. 볕이 좋은 날의 땡땡이 같은. 그때 딱 한손에 들고가기 좋은 책, 봄볕 아래에서는 모파상을 비롯해 스콧 피츠제럴드까지 “봄”이라는 단어에서 시작된 9개의 세계단편 문학을 모은 책이다.
해마다 봄, 꼭 한 번씩은 선명해지는 유년의 장면이 있는데, 이사 가기로 한 집을 수리하며 아주 잠깐 살게 된 집을 매만지러 간 어느 주말오후의 기억이다. ㄱ자 마루가 있고 그 앞에 작은 뜰이 난 집이었는데 아빠가 집 구석구석을 손보는 사이,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손 안 가득냉이꽃이면 민들레, 클로버를 그러모으고 있었다. 뽀얀 흙내샘을 맡으며. 특별할 게 없는데도 해마다 그때의 장면이 꼭 떠오르는 건 따사로울 만치 분명한 온도로 어깨에 내려앉던 봄볕 탓이었다 생각한다.
이처럼 사소하지만 선명해지는 일상의 순간과 하나의 레이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의 마음 결이 오래된 문학 속엔 남아 있다. 요며칠 전 우연히 한 포스팅에서 도파민의 시대, 숏폼의 시대는 곧 끝이 날 거라는 짧은 단상을 읽었다. 결국은 모두가 진심을 향해 돌아갈 것이라는 대목에서 몹시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 콘텐츠가 넘쳐나는 때다, 때문에 쉽게 피로해지기도 하는 시대. 그럴 때 문학도, 음악도, 미술도 고전으로 잠시 눈을 돌리면 유행처럼 떠밀려가는 시류 속에 수세기 가운데도 여전히 정답 없는 열길 사람 속을 (다 알지는 못해도) 조금 이해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긴다. 봄볕 아래에서를 읽으며, 모네 그림 속 여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여러 사람의 마음에 잠시 머물러보았다. “봄 한 접시”를 읽을 때는 영화 같은 엔딩에 가슴이 뛰었고, 다자이 오사무의 “벚나무와 휘파람”속 작은 바닷마을에선 말간 슬픔이 그려져 다음 이야기를 서둘러 읽지 못했다. 따스한 봄의 교정이 생생한 “빛이 머무는 곳에서”를 읽는 동안에는 인생의 다음 스텝을 살게 된 머잖은 미래의 내가 그려져 조금 쓸쓸하다, 이내 제목처럼 마음에 빛이 머물기도 했다.
토요일에는 슈만과 브람스의 곡들로 엮은 작은 피아노 연주회에 다녀왔다. 음악을 듣는 내내 책 속의 장면들이 어울리는 선율에 부쳐 자연스레 떠올랐다 사라지곤 했다. 밖은 주책없이 스산한데 봄볕 아래 아지랑이 같은 장면들이 눈에 선해지는 기분이었다.
유난한 날씨지만 다행인 건, 봄이 아직 남아 있다. 모든 건 ‘봄’이라 탓하고 기꺼이 호기로워지는 일, 올해는 아직 그걸 못했다. 절반 정도 읽고 절반 정도 남겨두었는데, ‘봄볕 아래에서’ 남은 페이지들은아껴두고 초코릿 까먹듯 하나씩, 이 봄이 다할 때까지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햇빛을 받자 온몸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배도, 강도, 나무도, 집도,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까지도.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습니다”_기 드 모파상 봄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