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칼의 춤 1 - 조선 최고의 검기 운심
박학진 지음 / 황금책방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칼의 춤'을 언급한 신문기사.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5/0325/pimg_7411751801174396.jpg)
밀양검기 운심, 그 안타까운 자취를 더듬어 보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5/0325/pimg_7411751801174402.jpg)
영변 약산(↑)의 동대, 그 만 길 깎아지른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그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몸을 던졌던 한 미부美婦가 있었다.
"나는 천하 명기이므로 생을 마칠 장소 역시 이런 명승지가 되어야 마땅하다!"
곁에 섰던 사람들이 붙잡아 몸은 비록 땅에 머물렀으나 그녀의 예술적 풍류와 멋의 혼은 이미 땅을 떠나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녀가 창시한 칼춤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빠르고 번득이며 던져지던 칼처럼 그렇게...
이 여인은 10여세 때 검무에 입문하여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밀양기생 운심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와 뛰어난 검무는 세도가의 자제는 물론 숱한 문장가들을 설레게 만들었으나 도도하고 당당했던 그녀를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터라 가슴을 까맣게 태워갔다.
권력가 앞에서도 함부로 춤판을 펼치지 않았던 그녀가 재물도 권력도 없는 그러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의인으로 평판을 듣는 거지왕초 광문 앞에 홀연히 옷을 갈아입고 칼을 잡았다.
재물이나 권력에 빌붙는 속물성이나 천박성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명필가 백하 윤순 앞에 비단치마를 벗어 펼쳐 귀거래사의 글귀를 받으며 당대 최고 명필가와 최고 무용가로서의 교감을 가질 만큼 품격을 가진 여인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고향인 밀양 상동면 신안리를 찾았다.
세상과의 인연이 끝날 즈음, 한양으로 가기 전 마음속으로 흠모했던 한 관원을 여러 번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음을 안타까워하며 혹이나 무덤에서라도 볼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에서인지 관원들의 왕래가 잦은 역로(驛路) 언덕에 묻히길 유언했다.
그래서 그녀의 무덤은 신안리 굴바위(굴벵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하게 됐다.
25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금 후손 없는 묘는 지금도 그대로 일까?
◉역사를 뚫고
2004년 온갖 문헌들을 길 삼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를 지팡이 삼아 굽이굽이 돌고 돌아 이곳 운심이 묘를 찾은 한 소설가가 있었다.
그가 이 묘를 찾았을 때 별다른 표석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묘는 보존되고 있었다.
이유인즉 언제부터인가 이 묘에 벌초를 하고 돌보면 혼기를 놓친 처녀, 총각이 소원을 성취한다는 이유로 음력 8월 초하루가 되면 누군가 몰래 벌초를 한다는 것이다.
2005년 이 묘를 찾아 두 개의 검으로 춤을 추는 이검무(운심의 춤)로 넋을 위로하고 고유제를 드렸던 우리 밀양의 무용가가 있었다.
현재 밀양검무보존회 회장으로 운심의 칼춤을 연구하고 원형을 복원하는데 열정을 쏟고 있는 김은희 회장이다.
전국을 돌고 세계를 누비며 밀양검무를 소개하고 있는 김은희 무용가는 해마다 밀양검무정기공연을 갖는다.
초정 박제가가 남긴 ‘검무기’에 치는 것, 던지는 것,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 떨쳐버리는 것, 끌어당기는 것 등 모든 동작이 음악의 박자에 따른다고 기록된 것처럼 밀양검무는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느린 듯 빠르며, 강열한 듯 부드러우며, 무용가의 결의에 찬 듯한 눈빛과 비장한 표정 그러면서도 결코 아름다움과 예술성을 잃지 않는 향기로움은 무용의 극치를 느끼게 한다.
지난 2007년 고유제를 드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던 소설가와 김은희 회장은 아연실색했다. 봉분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은 비록 어렵고 힘겹지만 언젠가 이 지역에 밀양검무를 위한 전수관을 건립하고 밀양검무의 효시이자 종주인 운심과 더불어 밀양검무의 새 시대를 열 것이란 열정으로 혼을 불사르고 있는 김은희 회장의 가슴은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주체할 길 없었다. 까맣게 타들어간 가슴을 안고 발걸음을 돌렸던 김 회장은 매년 이곳을 찾아 눈물겨운 고유제를 올렸다.
그러다 얼마 전 고유제를 드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가 묘가 훼손되고 유골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어이 주저앉고 말았다.
찢어지는 가슴이 이처럼 아플 것인가? 넋 나간 듯 풀어진 눈빛 사이로 뜨거운 이슬이 맺혔다.
아~ 위대한 밀양의 문화적 유산이여! 예술의 혼이여!
어찌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지려 하는 것인가?
◉사라진 묘
2006년 신안리 근처 동네에 살고 있는 칠순에 가까운 노인은 잠자리에 들면 어김없이 찾아와 무언가를 호소하는 40대 여인의 모습 때문에 몸부림을 쳤다.
그 여인이 있는 곳은 노인이 농사일을 하는 논 근처 바위 언덕이었다.
밤을 두렵게 만드는 여인의 모습을 찾아 그 언덕에 올라 갈쿠리(칼퀴)로 땅을 긁으니 황토 흙이 발려진 유골이 보였다.
노인은 흙을 모아 유골을 잘 덮고 봉분을 높이는 등 나름대로 묘를 다듬었다.
이제 그 여인은 안식을 얻었으리라 믿고 잠을 청하였으나 ‘사람이 많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 달라’며 다시 찾아왔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노인은 결국 묘를 찾아가 봉분을 헐어내고 유골을 수습했다.
그리고 그 유골을 불태워 부수어 행사 때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 벚나무 아래 뿌렸다.
이후 여인의 모습은 사라졌고 평온한 밤을 맞았다.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밤 때문에 그 논마저 팔아버리고 말았단다.
그렇게 운심 묘의 유골이 사라진 것이다.
과연 운심의 유골이었을까?
노인이 처음, 묘에서 전혀 땅을 파낼 수 없는 기구인 갈쿠리로 땅을 긁어 찾은 유골이 정식으로 매장된 묘지의 유골이라 보기엔 어렵다.
그리고 봉분을 없애고 유골을 수습할 당시 머리부분의 유골은 없었다하니 이해하기 어렵다.
유골 수습 당시 다른 표적이 될 만한 물건은 전혀 없었다.
더구나 250여 년의 시간이 흘러간 지금 유골에서 손가락까지 확인하였다니 더더구나 운심의 유골로 보기에는 어렵다.
또 그 유골의 위치가 세로가 아니고 가로로 놓여있었다는 점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25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누군가 운심 묘 위에 적당히 매장한 것이거나 위쪽에서 그곳으로 흘러들어온 유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이 운심이를 말하게 하는가?
풀뿌리 민주주의로 일컬어지는 지방자치제가 가동되면서 많은 지자체들은 자신들만의 브랜드 강화에 강한 의지를 들어내고 있다.
전라도 남원이 테마공원을 비롯하여 관광 시너지 효과 열쇠의 주인공으로 이도령과 춘향을 내세우고 있다.
산청이 한약특구로 운영되면서 대규모 관광자원으로 내세운 것이 허준과 유의태이다.
황진이, 논개를 대표적 여성적 인물로 부각시킨 도시도 있다.
지자체가 모델이 된 영화 한편으로 엄청난 지역 홍보의 효과를 인정하고 있는 실정에서 앞서 말한 것들은 대단한 지역 브랜드화적 가치를 소유한다.
많지는 않지만 실존적 기록이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고 묘지가 현존하고 있다면 어떨까?
당시의 화려한 삶이 소설로 재조명되고 있고, 그녀가 창시한 춤이 밀양검무란 이름으로 전국과 세계를 누비고 있다면 어떨까?
충분히 브랜드의 가치가 있다면 운심의 묘를 발굴·고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밀양의 이름으로 이제 긴 잠에서 깨워야할 것이다.
밀양검무보존회만의 힘이 아니라 밀양 모두의 힘으로...
'칼춤의 여신'인 운심, 그녀의 찬란하면서도 파란곡절한 일생을 다룬 팩션, 이 서적이 전격 출간된 것을 계기로, 기생 황진이를 능가하는 그녀의 뛰어난 예술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당대의 명성이 살아나 우리 곁에서 숨 쉬게 될 것을 확신한다.
아울러 그녀의 소실된 유택幽宅이 하루 속히 복원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녀의 춤사위처럼 화사하고 찬란한 단장을 하고.........!
내가 매일같이 책을 읽는 것은 누구의 스승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너를 위한 시를 짓기 위함이라.
내가 매일 뒷산의 꾀꼬리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의 소리가 듣기에 좋아서가 아니라 오로지 너의 목소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라.
내가 해질무렵이면 먼 산 위에 잔물진 노을을 바라보는 것은 그 빛깔이 어여뻐서가 아니라 다만 너의 춤사위를 그리워하기 위함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