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드라, 떠나보니 살겠드라 - 65살, 여자, 혼자, 세계 여행자 쨍쨍으로부터
쨍쨍 지음 / 달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 아니고, 그나마도 혼자서 떠날 때가 많다. 보통 현생에 시달리다 지쳤을 때 여행을 떠나는데 나를 괴롭게 만드는 건 일보다 사람일 때가 많아서 철저히 혼자 쉬다가 오고 싶어서 그렇다. 아무리 편한 사이라도 가족이나 친구와 떠나면 여행보다 사람에게 신경을 쏟아야 할 때가 많아서, 처음 가는 곳이나 쉽게 갈 수 없는 곳은 꼭 혼자서 간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다 보면 다시 돌아가서 그럭저럭 사회성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는 마음 상태가 된다.

이 책을 읽기로 한 이유도 표지에서 본 ‘65살, 혼자’라는 키워드 때문이었다. 나중에 할머니가 돼서도 이렇게 혼자서 자유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가끔 걱정하던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여행기였다.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어서 혼자 떠나는 나와 달리 이 책의 저자 쨍쨍은 여행지에서 여러 사람과 부대끼기 위해 혼자 떠나는 느낌이었다. 예상과는 달랐지만, 많은 사람과 부대끼는 걸 질색하는 내가 (아마 평생) 해볼 일 없는 여행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염원하던 세계 여행을 위해 26년 간의 교직 생활을 정리하고 여행길에 오른다. 프롤로그를 읽으며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패턴을 가진 분이라는 건 알았지만, 초반 에피소드 두 편을 읽으면서는 동공지진이 났다. 마흔에 인도에서 만난 19살 많은 영국 히피와의 불같은 연애(한 달)로 퇴직까지 고려했던 이야기를 힘들게 넘겼더니, 억류에 가까웠던 영국 입국 심사 에피소드가 이어져서 내가 과연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든 건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있는 사진 속 그늘 한점 없이 활짝 웃고 있는 쨍쨍의 얼굴이었다. 


좋은 문장인데 이 부분을 읽을 때 내 심기가 썩 편안하지 못했다. 앞서 얘기했던 영국 입국 심사 에피소드 뒤에 나온 말이었기 때문에. 영국 입국 심사에 대비해 사전 조사를 하면서 ‘절대 친구 집 주소를 대면 안 되고 꼭 호텔 주소를 댈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제일 중요한 호텔 주소를 미리 찾아두지 않아서 몇 시간이나 방에 갇혀서 취조에 가까운 인터뷰를 하는 장면을 보며 내가 여러 번 머리를 싸맸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하면서 나는 괴로웠는데 사진 속 쨍쨍의 얼굴은 이번에도 아주 밝았다. 초반에는 내가 소인배라서 이렇게 괴로운가...했는데 책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쨍쨍 스타일에 적응을 했다.


세계 여행을 하는 중에도 연애 이야기가 빠지지 않아서 처음에는 금사빠, 불나방 같은 말들을 떠올리며 읽었는데,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때쯤에는 그냥 사랑이 많은 분이구나,로 감상이 바뀌었다. 여행을 위해 학교를 그만둘 결심을 할 때 다른 어떤 현실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아이들과의 헤어짐을 괴로워하는 모습에서도, 여행지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애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모습에서도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혼자’라는 키워드가 무색하게 쨍쨍의 여행에는 등장인물이 많다. 여행지의 정보보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 인물들이 쨍쨍의 희노애락을 이끌어내는 이야기들이 훨씬 많아서 흥미로운 여행기였다. 팁 문제로 쪼잔하게 굴던 안토니오 때문에 10년 넘게 스페인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쨍쨍은 산티아고 순례자길에서 또 다른 스페인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다 못해 급기야 쪼잔한 건 안토니오가 아니라 본인이 아니었을까 의심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슬퍼하거나 분노할 때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인류애를 회복하는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해서 신기하기도 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나도 뜨끔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선입견과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모양이라고 반성하면서, 나와는 여러 면에서 완전히 다른 쨍쨍도 같은 상황을 보고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미리 대형 스포(크게 의미는 없음)를 하자면 거의 책 마지막까지 꼰지라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지금도 좀 꼰지랍게 여행 중이시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책 초반에는 왜 그러세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는데, 나중에는 상황이 저래도 어떻게든 해결하시겠지 하는 믿음이 생겨서 좀 마음 편하게 읽었다. 수습을 할 수 있으니까 좀 꼰지라운 여행을 하셔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건 다른 얘긴데, 나름 경상도 네이티브 부모님 밑에서 자랐는데도 ‘아슬아슬하다’는 뜻을 가진 꼰지랍다는 말은 이 책에서 처음 봤다.


요즘도 세계를 자유롭게 다니는 쨍쨍은 제주도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집이라는 말보다 베이스캠프가 어울리는. 쨍쨍랜드는 쨍쨍의 집인 한편, 다른 여행자들의 집이기도 하다고. 별명처럼 옷차림도 쨍할 때가 많은 평소 스타일로 미루어보아 쨍쨍랜드는 왠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저자의 블로그를 찾아봤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핑크 배경을 보니 동명이인인지 의심할 필요조차 없었다. 최신 글에서 이제는 66세가 된 쨍쨍이 여전히 밝은 얼굴로 강아지 옆에서 요가 다운독 자세를 하고 있는 사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성격, 스타일, 여행 방식 등 여러 방면에서 나와 쨍쨍은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책 초반에는 그래서 힘들더니 나중에는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화려한 착장에도 묻히지 않을 밝은 얼굴로 앞으로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많이 들려주시면 좋겠다.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의 순간들 세트 - 전2권 - 식빵고양이 박스 + (1권)고양이가 재능을 숨김 + (2권)나만 없어, 인간 + 이 아이는 자라서 이렇게 됩니다 리커버 미니북 + 2025 달력 고양이의 순간들
이용한 지음 / 이야기장수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작 소식이 들리면 두근두근하면서 기다리게 되는 이용한 작가님의 새 책이 (진작에) 나왔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정판 세트 안에는 책 두 권과 함께 전작인 <이 아이는 자라서 이렇게 됩니다> 리커버 미니북과 2025년 달력이 함께 들어있어서 상자를 열면서 이미 잔뜩 신이 났다. 그리고 그 상자 크기가 넉넉해서 고양이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준비물: 고양이)



우리집 고양이도 흥미를 보이기는 했는데,



고양이답게, 인간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책이 두 권 구성이라 귀여움도 두 배였다. 책머리에 이번에는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사진과 글을 담았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정말이었다. 앞서 읽었던 책들은 마음이 찡하고 눈물나는 이야기도 제법 많아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때도 더러 있었는데, 이번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고양이들의 귀여움과 웃김(!)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찡한 부분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고...



해마다 일어나는 아깽이 대란을 경계하는 이런 글도 실려 있었고,



이렇게 귀여운 내용도 더러 담겨있다. 글만 이렇게 귀여운 건 아니고 사진... 진짜 너무 귀여워서...



이렇게 귀여운 친구들이 두 권 가득 들어있다. 어느 계절에 읽어도 좋겠지만, 요즘처럼 찬바람 부는 계절에 읽으면 더 훈훈하고 마음도 따뜻하고 그렇지 않을까 싶다. 물론 고양이랑 같이 읽으면 더 좋음.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의 임무는 게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 벼랑 끝의 닌텐도를 부활시킨 파괴적 혁신
레지널드 피서메이 지음, 서종기 옮김 / 이콘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건 유전이 아닌 모양인지 눈과 손이 모두 느려서 게임을 잘 못하는 나와 다르게 동생들은 게임을 잘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 같이 살던 시절에는 우리 집 거실에 플레이스테이션과 엑스박스, 그리고 wii가 모두 있었다. 그중에 내가 건드려볼 만한 건 wii 정도였고, 동생들이 본격적인 게임을 접고 잠깐 쉬어가는 느낌으로 마리오카트를 할 때나 좀 들이대보는 수준이었다. 착한 동생들이 많이 봐주는데도 내가 절망적으로 못해서 몇 번 참아주다가 결국 다 집어치우고 동숲이나 하라면서 DS를 쥐여줬고, 그래서 요즘도 내가 하는 게임은 동물의 숲과 문명 정도다.

이렇게 문외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게임을 잘 모르기도 하고 좋아하지도 않아서, 만약 내가 ‘벼랑 끝의 닌텐도를 부활시킨 파괴적 혁신’이라는 이 책의 부제를 못 봤다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목만 봤을 때는 게임 프로그래머가 쓴 책인가 했는데, 여러 분야에서 마케터로 활약하다가 닌텐도 아메리카의 사장이 되어 혁신을 꿈꿨던 사람의 이야기였다. 혹시나 게임 이야기가 너무 많으면 어쩌나 살짝 걱정하다가도 닌텐도는 좀 익숙하니까 괜찮을까 하며 책을 집어들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도 책에는 겜알못이라도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이 담겨있었다. 


나도 일본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어서 일본 회사의 경직된 분위기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게임회사니까 좀 낫지 않을까 넘겨 짚어봤는데 빗나갔다. 아무리 게임을 만드는 닌텐도라도 근무 환경은 꽤나 보수적인 느낌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들 하는 시차출퇴근이나 유연근무제 같은 게 도입되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근무시간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걸로도 모자라 종소리까지 울린다니... 심지어 퇴근 종은 안 울린다니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회의에 들어가서 누군가와 의견 충돌이 있을 때마다 늘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도 실려있었다. 서로 주장을 꺾지 않고 대치하다 보면 내가 신념에 근거해서 타당한 주장을 하고 있는 건지,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가끔 있다. 책에서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서 두 가지를 구분하고, 둘 중 어떤 경우라도 되도록이면 상대방과의 협의점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첫 회사에서 내 멘토를 맡았던 대리님은 우리 계열사 안팎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새롭게 멘티가 된 나도 달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인사를 시켜주곤 했는데, 자주 만날 일은 없는 사람이든 아니든 안면을 터놓으면 일하기가 수월하다고 조언을 해줬었다. 대리님이 자주 하던, 회사에 친구를 사귀러 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알아두면 일할 때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책에서도 발견하고 괜히 반가웠다. 


이건 회사 업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가끔 눈앞의 일에 마음이 급해서 일단 일을 막 하다가 나중에 이게 맞나? 싶을 때가 많은 나같은 사람한테는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일이든 뭐든 하기 전에 목표를 명확히 하고, 급할 때도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늘 체크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회사에서 만났던 선배들과 상사들이 했던 모든 지시와 행동에 이유가 있었다는 걸 뒤늦게 새삼 깨달았다. 늘 업무 진행 상황을 한쪽으로 정리해서 들고오라던 부장님과 함께 일할 때, 이게 매번 무슨 짓인가 투덜거렸는데 이런 이유였나보다. 이런 이유로 시키셨던 게 맞겠지...? 하며 살짝 의심이 되기는 하는데.


뭔가 실수를 하고 엄청 깨지고 풀이 죽은 나한테 ‘실수를 안 하는 사람도 없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는 쓰겠지만 같은 실수를 다시는 안 하는 사람도 없다’고 위로인지 조언인지 모를 말을 해줬던 멘토 대리님 생각이 났다. 이상하게 그때 들었던 말과 비슷한 취지의 내용이 이 책에 유독 많아서,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참 좋은 멘토를 만났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초안에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되어 있었는데, 여러 의견을 수렴해서 결국 최종안은 게임을 만드는 주체가 ‘우리’로 바뀌었다. 나도 바뀐 버전이 더 마음에 든다.


이직을 많이 해서 그런지(지금 회사가 열 번째...) 인수인계 자리에 앉을 때가 많았는데, 내가 일을 넘겨 받을 때는 늘 ‘전임자는 바보가 아니다’라는 말을 마음에 둔다. 전임자는 이걸 왜 이렇게 했지? 하면서 의문이 생기는 일들도 막상 내가 하다보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렇게 됐구나, 할 때가 많아서 가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일단은 이해해보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책에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전임자는 바보가 아니다’를 마음에 장착하더라도, ‘우린 늘 이런 식으로 해왔다’는 말에는 저항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잘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이 책 리뷰를 하는 내내 멘토 대리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기분인데, 리더의 어려움을 일찌감치 눈치챈 것인지 대리님의 소원은 만년대리였다. 그렇게 야망이 없어서야 되겠냐던 사람들은 다 그 회사를 떠났고, 만년대리가 소원이던 내 멘토는 몇 해 전 부장이 되었다. 기껏해야 애물단지였던 멘티(나) 하나를 책임지던 대리 시절보다 부장이 된 지금 얼마나 큰 책임과 결정이 주어질지 생각하니까 대단하면서도 좀 짠하기도 하다.


책을 읽는 동안 회사에서 겪었던 많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회사에 다니거나 다니지 않거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은 조언들이 많이 담겨 있어서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닌텐도의 게임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책 중간중간에 나오는 게임 이름을 보면 반가움도 느끼지 않을까. 나도 DS, 3DS, 스위치를 모두 거쳐온 사람이라서 책을 읽으면서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세상에 나왔던 거구나, 하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즐거운 어른
이옥선 지음 / 이야기장수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선택한 데는 제목의 역할이 컸다. 만약 책의 제목이 <즐거운 할머니>였거나 <즐거운 노인>이었다면 (그래도 읽었을 것 같긴 하지만) 왠지 지금처럼 기대를 안고 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즐거운 ‘어른’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때때로 유튜브를 보고, 운동을 하며 지내는 어느 어른의 이야기가 왠지 미래의 내 모습처럼 느껴져서 친근한 마음으로 책을 집었는데 저자와 개그코드까지 맞아서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원래는 쓸 생각이 없었던 책을 쓰게 된 저자의 변을 읽으면서 나도 이 부분에 공감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글이 한없이 느끼해져서 가능하면 너무 감정을 싣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그래서 글이 너무 사무적이거나 메마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보고서나 논문을 쓸 때야 좋지만 에세이는 죽어도 못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감정을 적당히 덜어낸 글도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덕분에 재미있는 책을 읽게 되었으니 착한(!) 물고문을 했던 분들에게 조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읽는 중간중간 딱히 웃기려고 하는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웃음이 터지는 부분이 더러 있었다.


이번 직장으로 이직하기 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다음날 할 일이 딱히 없는데도 늦게 일어나면 왠지 인간말종이 된 것 같아서 새벽까지 잠 못들었지만 알람은 회사 다닐 때처럼 맞춰놓고 자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만성 수면부족에 시달렸었다. 그때 이 부분을 읽었더라면 조금 더 편하게 마음을 먹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때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먼저 그 나이를 살아본 사람의 책을 읽으면 대체로 그렇듯이 이번에도 막연한 미래 때문에 가졌던 불안을 많이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저자의 생활을 엿보면서 나도 나중에 지금처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유튜브와 ott도 간간히 보고, 틈틈이 운동도 하면서 지낼 것 같으니 눈 관리나 잘 해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말을 한번씩 읽지 않으면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며 사는 일이 실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자꾸 잊게 된다. 이렇게 가끔만 깨달을 수 있도록 일상이 깨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며 읽었다.


임종을 지키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유일하게 그래도 자식 마음은 그게 아니라구요... 라며 살짝 반발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자식 입장은 되어봤지만 부모 입장은 되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여전히 부모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게 나한테는 제일 큰 공포인데, 내 힘으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서 더 그런 것 같다.


앞에서는 반발했다고 했지만, 자식에게 이후의 일을 부탁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이럴 수밖에 없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좋은 계절에 자식들이 만날 수 있도록 가을에 떠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문장을 읽으면서 괜히 마음이 찡했다.


나도 청년에서 중년으로 슬슬 넘어가는 시기이다 보니 이 대목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늘 고민하면서 하루하루 살고 있는 기분. 그래도 회사에서 맡겨진 일을 차질 없이 해내고 있고, 차질을 빚는다 해도 수습을 그럭저럭할 수 있으니 유능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건가 하며 만족스러워 했다.


유머, 친절함, 자기 억제가 본질이 아니라 인공적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사물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사는 게 지금 나에게 필요한 태도라서 그런지 유독 마음에 와닿았다.


제목과 책 소개를 보고 기대했던 부분들이 다 충족되는 책을 만나는 게 은근히 쉽지 않은데,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글을 읽어서 책을 덮고 나서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따뜻한 할머니는 품어주지만, 까칠한 할머니는 해방시킨다’는 글귀를 보며 까칠한 할머니의 조금 차가운 글이 아닐까 싶었는데, 뜻밖에 개그코드가 잘 맞아서 잊을만 하면 한번씩 웃음이 터졌다. 나중에 나도 즐거운 어른, 그리고 다른 사람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그림자 안에서 빛나게 하소서
이문재 엮음 / 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아주 안 읽는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나는 시인이 쓴 시보다는 시인이 쓴 에세이를 더 많이 읽는 편이다. 시가 싫다기보다는 아직 나한테는 좀 어렵게 느껴져서 그렇다. 졸업한 지가 한참인데 아직도 시는 왠지 함축된 뜻이나 비유 은유를 다 파악하며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선뜻 손을 못 내밀게 된다. 그런 거 치고는 제일 좋아하는 시로 영문을 모를 <오감도>를 꼽기는 하는데, 아무튼 시에 대한 내 심정은 그렇다.

막연히 어렵게만 느껴지는 시들 중에서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시들도 있기는 있다. 기도하는 내용을 담은 시들은 직관적으로 내용이 눈에 들어와서 뭘 더 파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니 읽을 때 마음이 편하다. 기도를 하면서 뜻을 숨기고 은유와 비유로 묘사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테니까. 그런 기도시들을 모았다는 소식에 모처럼 시집을 손에 들었다.



필사한 문장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있는데 시집을 읽기 전에 미리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사실 시집을 열었을 때 왜 기도시를 모았을까 하는 의문이 살짝 있었는데,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가 되었고 처음부터 시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게 되었다. “기도와 시는 ‘간절함’의 혈연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어디선가 일부분을, 혹은 약간 변형된 형태로 봤던 시 구절들을 책에서 여러 번 만났는데, 이 시도 그랬다. 읽을 때마다 셋 중에 뭐가 제일 중요할까를 생각하게 되는 시.



한 줄 한 줄 다 공감하면서 읽었던 시인데, 특히 ‘혼자인 것에도 약하고 함께인 것에도 약하다’와 ‘시작에도 약하고 끝에도 약하다’는 부분에서는 내가 쓴 글인가 싶었다.



좋은 시들이 정말 많았지만 이해인 수녀님의 이 시가 특히 마음에 오래 남았다. 특히 필사한 부분은 다이어리에도 따로 옮겨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고, 쉽지는 않겠지만 저런 마음을 닮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시는 기도문의 형태는 아니라서 처음에 약간 의아했는데, 시 전체를 다 읽고 나면 결국 시인의 염원을 담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시집에는 이렇게 꼭 본격적인(!) 기도가 아니라도 그 내용이 기도에 가까운 시들도 제법 있었다.



시든 에세이든 동화든 일단 출간 소식이 들리면 바로 기대하며 읽을 준비를 시작하는 박준 시인의 시도 있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예전에 생일 초를 끌 때 딱히 떠오르는 소원이 없다고 해서 모두를 부럽게 만들었던 친구 생각이 났다.



병석에 누워서 죽음을 앞둔 사람이 담담하게 쓴 시라서 읽는 내 마음이 더 먹먹했는데,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는 어머니 때문에 슬퍼졌다. 부모보다 먼저 죽는 자식이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새삼 생각했다.



책에는 여러 편의 시가 있는데, 제각각 내용도 다르고 형식도 다르다. 심지어는 내용을 따져 보면 비슷한 걸 구하는 시인 것 같은데도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른 시로 완성이 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어떤 시든 결국 이문재 시인이 마지막에 적어둔 기도하는 자에 대한 내용을 크게 벗어나는 시가 없다는 걸, 저 부분을 읽으며 새삼 느꼈다.


시집도 종종 읽고, 인상깊은 구절은 필사도 하는데 이상하게 리뷰를 쓰기가 쉽지 않아서 어쩌다 보니 이번에 읽은 시집이 첫 시 리뷰가 되었다. 아무래도 시를 제대로 읽고 있는 게 맞는지, 내가 뭘 잘못 해석해서 리뷰하는 바람에 시를 쓴 시인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읽었다. 나처럼 본격적인 시는 약간 어렵게 혹은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