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먹고살려고 책방 하는데요 - 20년 차 방송작가의 100% 리얼 제주 정착기
강수희 지음 / 인디고(글담)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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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었다. 아직 사서라는 직업이 있다는 건 몰랐지만, 엄마가 매일 데려다주던 어린이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다. 도서관에서 일하면 책으로 둘러싸여서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미취학 아동이었던 내가 나중에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면 아빠는 좋은 생각이라면서 도서관에서 일을 하다가 나중에 멋진 도서관을 직접 만들라고 했고, 엄마는 다른 멋진 직업을 가져서 원하는 만큼 책을 사는 것도 좋지 않겠냐며 다른 직업들을 권했다. 둘 다 멋진 대답이라서 나는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했었다.

나중에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사서가 아니라 내 입맛대로 꾸민 서점 주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책만 들여놓고 좋아하는 커피랑 책이랑 파는 작은 공간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독립서점이나 동네 책방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기에 나도 저런 공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서점 주인을 하면서 내가 만든 공간에서 책을 읽고, 쓰고, 팔면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막연히 상상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하며 서점 주인이 쓴 책들을 읽다가 생각이 다시 바뀌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점은 도서관과 다르다. 책이라는 물건을 파는, 완전한 자영업의 영역이었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현실적인 부분을 읽어내려가면서 내 수당 계산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누군가가 취향을 담아 만든 서점에 가거나 그 서점을 만들고 운영하며 만난 사람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걸 더 좋아한다. 이번에 읽은 '제주에서 먹고살려고 책방 하는데요'도 그래서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다. 



여행지로서의 제주는 너무나 매력적인 곳이지만 그곳에서 사는 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기가 어려웠는데, 책을 읽으면서 제주 생활의 불편함과 매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단점을 이과수 폭포처럼 쏟아낼 수 있을 만큼 불편한 점도 싫은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니, 제주 생활에는 도대체 내가 모르는 어떤 매력이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숨비소리를 들으며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는 의욕을 되찾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좀 부러웠다. 사는 게 재미없게 느껴지거나 매일매일 똑같이 느껴지는 생활을 하다가도 숨비소리를 듣고 있던 저 순간을 떠올리면 다시 살아나갈 기운이 나겠구나, 싶어서 부러웠다. 제주에서 작가가 찾은 빡침 해소제인 노을과 살아갈 의욕을 불러일으킨 숨비소리를 언젠가 나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말했듯이 절벽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결국 또 다른 길이라는 말은 뻔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내가 요즘 막다른 길에 서있는 느낌이라 그런지 읽으면서 위로가 되었다. 내가 생각 못했던 방향으로 또 다른 길이 나타날 수도, 남들에게는 별거 아닐지 모를 별거가 나에게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도 공감하며 읽었다. 애초에 인간관계가 그렇게 폭넓지 않아서 책에서 나온 것처럼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 빠져나가듯 인간관계가 정리된 경험은 아직 없지만 앞으로도 인간관계 그 자체에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점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당신의 헌 책장' 코너였다. 단골손님의 취향이 묻어나는 중고책으로 책장 한 칸을 꾸며놓고, 거기에서 발생한 수익은 기부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책장 칸칸이 그 칸을 꾸민 사람의 설명이 붙어있는 것도 좋았다. 성수기에 어느 가게에나 있을 이른바 진상 손님에 대한 대처에서도 많은 고민과 어떤 원칙이 느껴졌다. 먹고살기 위해 시작했다고는 했지만, 서점 아베끄의 운영 방식에서 서점 주인만의 철학이나 원칙을 느낄 수 있어서 언젠가 제주에 가면 들러보고 싶어졌다.



빵 한 봉지를 사 먹어도 소확행 소리를 듣는 것에 진저리가 나는 것에도, 세상이 행복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말에도 깊이 공감했다. 내가 미처 몰랐던 행복이 있지는 않았는지 찾아보자는 처음 의도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이 사람들을 행복 그 자체에 너무 집착하도록 몰아가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종종 있었는데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고 반가웠다. 시작은 좀 헐렁해야 오래 버틸 수 있는 것 같다는 말은 요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던 것 같다. 내가 요즘 모든 게 다 준비된 상태로 뭔가를 시작하고 싶어 하는 태도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라서 그런지, 아베끄를 운영하며 '시작할 때의 헐렁함'의 소중함을 느낀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아직도 내가 소소하게 꾸민 내 공간에서 책과 커피를 파는 상상은 종종 한다. 하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고 싶지는 않고, 언젠가 만들지도 모를 그 공간에서 나오는 수익이 내 생계를 완전히 책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책이든 커피든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것으로 계속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직은 더 크다. 누군가가 큰 각오를 안고 자신의 취향을 담아 만든 서점들을 다니면서 좋은 책을 만나고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렇게 나만의 취향을 만들어나가다가 먼 미래에 나도 내 취향을 담은 공간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한다. 그때 내가 만들 공간에 이번에 책을 읽으며 만났던 서점 아베끄의 영향도 조금은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제주도에 가면 아베끄에서 마음에 쏙 드는 책을 사서, 북스테이 오 사랑에 묵으며 찬찬히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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