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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좀비와 싸우다 - 나쁜 신념과 정책은 왜 이토록 끈질기게 살아남는가
폴 크루그먼 지음, 김진원 옮김 / 부키 / 2022년 7월
평점 :
같은 전공의 친한 친구가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경제학을 선택해서, 나도 따라서 경제학 입문 강의를 함께 들으려고 수강 신청을 한 적이 있었다. 두꺼운 맨큐의 경제학 책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뭔가 대학생 같은 느낌이 들어서 뿌듯했었는데, 첫 주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진짜 이거 부전공할 거냐고 친구한테 서른 번 물어보고, 나는 결국 강의를 드롭했다. 지금 기억나는 건 맨큐가 58년 개띠라서 우리 엄마랑 동갑이네? 했던 것 정도다.
그 이후로 경제는 나한테 아주 어려운 분야로만 남아 있었다. 사회에 나와서는 어쩔 수 없이 경제 상황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했는데, 강의를 들을 때보다 더 까다로웠다. 경제만 단독으로 파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고, 반드시 정치나 정책이 끼어들었다. 단독으로도 어려운 분야가 둘이 합쳐지니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다. 올해 초의 목표는 모든 분야의 책을 고르게 읽기였는데, 한 해의 절반이 지나도록 경제 분야는 스치지도 않았다는 걸 깨닫고, 마침 기회가 닿기도 해서 이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우리나라 경제도 아닌 미국 경제에 대한 논평을 담은 책인데 잘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두께가 압도적이었던 것에 비해 내용은 이해하기 아주 어렵지 않았다.

제목에 나온 좀비가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차례를 훑어보면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부자 감세 좀비, 기후 변화 부정 좀비 등 나쁜 신념이나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책은 사라졌다가도 다시 기어나오는데 이 모습이 흡사 좀비같다. 이 좀비들에 대한 이야기를 18개의 장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저자가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여러 곳에 게재했던 논평이 중심인데, 발표된 시기가 제각각인데도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구성되어 있었다. 저자의 글과 약력을 읽으면서 연구자로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저자가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책무에도 충실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제학자가 쓴 책이라고 해서 어쩌면 원론적인 이야기가 많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책에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많았다. 어쩌면 경제학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분야를 조금씩 건드리며 경제와 연관지어 어렵지 않게, 하지만 신랄하게 풀어낸다. 책에서 말했듯 '경제학이 특정 가치군을 반영한 정책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 정의와 경제 성장은 양립할 수 없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읽으며 잠깐 멍해졌었다. 나도 알게모르게 저 둘은 양립할 수 없는게 아닌가 하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우리나라에서 전후에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루며 등장했던 일종의 부작용들이 경제 정의에 관련된 부분이라고 배워왔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실은 경제 정의도 챙겨가며 성장을 이룰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는 다양한 분야를 언급하고 있는데, 당연히 언론도 빼놓지 않았다. 언론은 공정하게 사실을 보도해야 하고, 대중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켜지기가 어렵다는 것이 씁쓸했다.
여러 곳에 게재했던 논평을 중심으로 한 책이다 보니, 글 하나하나의 길이가 짧고 집중이 잘 되도록 구성이 되어 있어서 읽기 어렵지 않았다. 다만,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 아니라 미국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보니 내가 잘 모르는 인물이나 사회 현상이 등장하면 찾아가며 읽어야 했다. 나는 궁금해서 찾아보긴 했지만, 사실 책에도 배경 지식이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되어 있어서 크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8월이 되어서야 손에 잡은 올해의 첫 경제책이 조금 어렵긴 했지만 유익하고 재미있어서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