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 - 시행착오, 표절, 도용으로 가득한 생명 40억 년의 진화사
닐 슈빈 지음, 김명주 옮김 / 부키 / 2022년 7월
평점 :
왠지 과학 분야 책은 어렵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서 선뜻 손이 안 가는데, 이 책은 읽어보고 싶었다. 내가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며 챙겨보는 최재천 교수님의 추천사가 눈에 띄기도 했고, 표지에서도 흥미로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흥미가 항상 여러 분야를 짧게짧게 건드리고 넘어가서 그런지, 나는 한 분야를 오래 연구한 사람들의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보는 게 너무 좋다. 그래도 전문가가 쓴 책은 좀 어렵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생물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읽을 수 있을만큼 눈높이를 맞춰준 책이었다. 심지어 재미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까 저자의 다른 책인 <내 안의 물고기>와 더 읽을 거리에서 추천한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우연과 필연, 우회, 혁명과 발명이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쓰일 줄은 몰랐는데, 책 첫머리에서부터 흥미진진했다. 목차를 읽어보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흉내쟁이, 인수합병 같은 말들이 있어서 이게 도대체 진화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 싶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생각지도 못하게 위로를 받았다. 무슨 일이든 우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실제로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지금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좋은 변화가 시작되는 시작점이었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마음이 든든해졌다. 생명사도 이렇게 진행되어 왔다니 그 일부인 내 삶도 그렇겠지 생각했다. 과학책을 읽으면서 이런 힐링을 얻게될 줄은 몰랐다.

동물의 몸도 자체 온도 조절기가 있는 집과 같아서, 어느 한 부분의 조절 기관에 문제가 있어도 다른 기관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신선했다. 그래서 돌연변이체도 생존할 수 있고 진화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헤밍웨이의 고양이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다시 떠올렸다. 스노우 화이트라는 이름을 가진 헤밍웨이의 고양이는 발가락이 6개였는데, 그 후손들이 아직도 헤밍웨이의 생가 주변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제일 놀랐던 건 유전자가 내 예상처럼 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기적 유전자와 숙주 사이에서 날마다 주도권을 잡으려는 치열한 경쟁과 내전이 일어나고 있다니, 내 몸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유전자가 40억 년 동안 어떻게 흉내내고 베끼면서 변화해왔는지가 너무 흥미로웠다.

공룡 멸종의 원인으로 가장 유력하게 꼽히는 소행성과의 충돌로 일어난 환경 변화를 책에서 읽으니 새로웠다. 동물 몸 안에서 유전자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신기하고 하나의 작은 우주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외부 요인으로 그 세계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약간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여섯 번째 대 멸종은 어떤 모습일까, 인간도 그때 멸종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세포의 탄생이나, 그 세포의 변이에 대해 읽으면서 동물 몸의 복잡함과 다양함이 새삼 놀라웠다. '규칙을 어기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개체의 필요를 외면하고 자신의 증식이나 죽음에만 전념한다'는 암세포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는 한숨이 나왔다. 언젠가는 그 암세포도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이 발명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다.

앞부분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생명사의 길이 탄탄대로가 아니라 꼬이고 구부러진 길이라는 게 이상하게 많이 위로가 됐다. 그리고 우리 뇌가 선형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을 읽으면서, 그래서 내가...하며 깨달았다. 어떤 사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구성할 수 있는 건 인간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책을 다 읽고 나니까 내 몸이 읽기 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나는 유전자를 아주 정적이라고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적이기는커녕,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움직이는 존재였다. 내가 알고 있던, 혹은 막연히 넘겨짚고 있던 사실들을 책을 읽으며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우리 몸과 유전자에 사본이 이렇게 많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진화나 생물학에 대해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왜 최재천 교수님이 생물학의 길 끝에서 만난 저녁노을 같은 책이라고 추천하셨는지 알 것 같다. 추천의 글부터 에필로그까지 싹 다 읽고 나니까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글을 재미있게 잘 쓸까. 글이 어렵지 않고 재미있기까지해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책에서 제일 감탄했던 부분은 내용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구성이었다. 저자는 내용을 뚝뚝 끊어지는 부분 없이 유기적으로 이끌어가면서,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며 읽게끔 유도했다. 우리 몸이, 현재 동물의 몸이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