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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박에스더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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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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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 전2권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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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노무현 대통령님이 남겨준 유산...꼭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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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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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


소제

2000년 초반에 함.석.헌.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곧장 서점에 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샀다. 2008년이 되서야 책을 읽었다. 예전에 집어들었던 그 책은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쉬운 것 같아서 나중에 읽어도 좋겠거니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시간이 7여년이 지났다. 이토록 불성실한 것이 ‘나’다. 대중이거나 군중에 가깝다. 씨알의 부정적 측면이 도드라진 20대였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서른 즈음에 읽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때때로 울분이 일고 한국 역사 속에 내 길만을 애타게 찾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접시물에 코를 박고 싶은 그런 충동을 느꼈으니.

“한국인의 정체성은 어디서부터 연유하는가? 진정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일 수 있는가? 무엇을 보고 한국인이라 판단하는가? 어찌 알 수 있는가?

이러한 고찰이 하잘 것 없는 짓에 불과할까? 아니면 인생에 한번 즈음은 거쳐야하는 홍역인가?

진정한 한국인이 될 필요를 느낀다면 역사 속에 ‘나’를 찾고 역사 밖에서 ‘나’를 찾아야 하리라. 역사 속이라 함은 과거와 현재이며 역사 밖이라 함은 미래이다. 시간의 전부분을 통해 ‘나’를 찾자. 그것이 역사일 것이다.”

무작정 책을 구입하자 앞 속지에 구겨넣은 글이다. 사유하는 척!하는 언어 유희를 구사하고 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역사에 대한 해석이 함석헌옹과 비슷하다. 괜한 우쭐함이^^; 도마서 42장의 언구가 “방황하는 자가 되라”는 말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찾.아.야. 하고 찾.고. 있다. 과거와 달리 ‘나’를 찾는 방식이 사뭇 달라진 점은 빼고는 한결같이(!) 방황중이다. 그런데 그 달라진 지점이 매우 혁명적이다. 생각의 역전! 내면을 통해 ‘나’를 찾는 데카르트적 방식에서 ‘타자’, ‘전체’, ‘역사’, ‘씨알’, ‘공동체’를 비추어 ‘나’를 찾는 방식으로의 역전! 아마 ‘구원’은 이런 데서 쓰는 말이 아닐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바로 ‘나’를 역사의 거울 앞에 대면하도록 부추긴다. 아니 준엄한 역사적 책무를 느끼게 하며 ‘나’는 누구인지 묻고 확인한다. 역사 앞에 서는 것을 주저하게 되고 ‘나’는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자신이 없는 모습이다. 왜일까.

“한국 사람은 심각성이 부족하다. 파고들지 못한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깊은 사색이 없다. 현상 뒤에 실재를 붙잡으려고, 무상 밑에 영원을 찾으려고, 잡다 사이에 하나인 뜻을 얻으려고 들이파는, 컴컴한 깊음의 혼돈을 타고 앉아 알을 품는 암탉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운동하는, 생각하는, brooding over(골몰하는)하는 얼이 모자란다. 그래 시 없는 민족이요, 철학 없는 국민이요, 종교 없는 민중이다. 이것이 큰 잘못이다. 이 때문에 역사극의 각본이 중간에 변동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만 커지지 못하고 말았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 128p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가 가까웠느니라.’ 메타노이아, 즉 생각을 바꾸라는 말이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인생의 방향과 목적이 바뀌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구체적인 실천과 맞닿아 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정신 세계의 혁명이다. 생각의 전환은 배치에 따라 달라진다. 누구와 어떤 실천을 하느냐에 따른 것이다. 배치에 따른 생각의 혁명은 생각하는 힘이 깊어야 비로서 ‘나’를 알아갈 수 있는 성찰의 계기가 된다. 바로 이 ‘생각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역사 앞에 서는 것, 나를 찾는 물음에 주저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유언비어에 휘둘리고 대중의 분위기에 휩쓸리고 얄팍한 지식을 고정불변하는 판단의 척도로 삼고 옹졸한 자격지심으로 자기 세계에 갇힌 자는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삶의 풍류도락이 메마르고 미디어가 배포하는 지식만이 가득하고 무지에 기인하는 두려움․공포가 창안해낸 미신적 종교에 복무하게 된다. 그래서 가볍고 작은 자가 된다. 스스로를 예속하는 삶의 악순환.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성장이요, 진보다. 역사는 자라야 한다. 씨알도 자라야 한다. 이것들은 생각하는 힘이 자라는 한 가능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함석헌옹이 70년대 민주주의의 씨알이 자라도록 노력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씨알이 자라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은 어떻게 가능한가. 70년대는 국가폭력을 앞세운 국가주의 앞에 대의민주주의를 지키고자 노력했다면, 오늘날은 신자유주의로 상징되는 신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씨알이 자라도록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유모차부대, 82쿡닷컴에서 활약한 ‘배운 여자’들이 그림자 노동으로 가려지지 않고 씨알의 전사로 등장하는 시대, 88만원세대의 암울한 시대적 징후 속에서 촛불을 든 소녀들이 정치 주체로 등장하는 시대, 아고리언 등의 다중적인 개성의 씨알들이 태어나고 그들이 연대하고 있다. 희망을 굳이 얘기한다면 그들이 연대하는 방식과 길일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유’를 향한 정진은 변함이 없다. 함석헌옹이나 스피노자는 자유의 핵심은 ‘사상의 자유’라고 말했던 것 같다. 70년대의 시대적 제약이 있었기에 국민 계몽을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게 여긴 험석헌옹의 판단은 옳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씨알 스스로가 학습하고 씨알들의 연대를 통해 ‘올바른 지식’을 취득, 취합한다. 생각하는 힘은 사상의 자유를 가져온다. 집회결사의 자유, 발언의 자유, 정치체 구성의 자유로 구체적인 양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어청수 같은 비(非)시민 장관은 국가의 공권력을 활용해서 물대포를 쏘아대고 있고 박정희의 가르마를 한 이명박은 유신의 그림자가 드리운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FTA 졸속 비준안이 통과되었고 씨알들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 여전히 우리는 고난의 행군중인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씨알은 잉태되고 있다는 것으로 역사를 낙관해야 하는가.

여기서 ‘나’를 찾는 작업과 물음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씨알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된다. 씨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씨알을 통해 나를 구성하고 있고 나 스스로가 나는 씨알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나는 씨알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어떤 씨알이 되어야 하는가’이지 않을까. 이 질문은 생각하는 힘을 낳는 생각이고 나는 이 생각을 붙들고 방황하고 있다.

덧글.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던지는 가르침은 호수도 강도 아닌 바다다. 함옹은 59세까지 류영모옹과 사제지간으로 있었다 한다. 그 긴 시간만큼이나 오랜 배움이 있었던 것. 가깝게 오래 사귀기(친구-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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