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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 일기 쓰는 세 여자의 오늘을 자세히 사랑하는 법
천선란.윤혜은.윤소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2월
평점 :

학창시절 나는, 남들이 내 일기를 볼까봐 자물쇠를 꼭꼭 잠궈 숨겨 놓으면서도 친구와는 교환 일기를 써서 바꿔 읽곤 했다. 그 때의 교환 일기는 내 일기를 공개하기 싫은 부끄러운 마음과 남 일기는 보고싶은 발칙한 욕망의 타협점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래서인가 교환 일기는 진짜 비밀 즉, 남에게 공개할 수 없는 내용은 쏙 빼고 썼다. 그 친구도 아마 그랬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교환 일기를 통해 비로소 친구에 대해 조금은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뭘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루는 어떻게 보냈는지, 어떤 고민과 걱정이 있는지... 일기를 통해 우리는 친밀해졌고 서로를 받아들였다.
김신지 에세이스트의 추천글처럼 상대방을 잘 모르면서도 안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건 ”일기를 훔쳐보았고 수다를 엿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천선란, 윤혜은, 윤소진의 ≪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는 팟캐스트 <일기떨기>를 선별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일기로 수다 떨기’를 줄여서 ‘일기떨기’다. 채널명만 들어도 짜릿하다. 남의 일기를 훔쳐 보는 것도 모자라 그 일기로 수다를 떤다고?
책으로 만들어지면서 ‘듣는 일기’에서 ‘읽는 일기’로 모습은 바뀌었지만, 그들의 진솔함과 유쾌함은 글에서도 여전히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세 사람의 불안정 했던 과거 이야기, 가족과 결혼 이야기, 빵과 음악 등으로 나 자신을 사랑해 가는 이야기에 나도 같이 아파하고 고단해하며 울고 웃었다. 일기란 참 신기하다. 고작 일기만 교환했을 뿐인데, 친밀해지고 서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일기 뒤에 수록해 놓은 수다도 재미있게 읽었다. 음성지원은 덤.
기억에 남는 수다는, 스트레스에 관한 선란의 말과 결혼에 관한 소진의 말이다.
📍스트레스받을 때 특정한 행동을 하면 그 행위만으로도 내 몸이 ’지금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구나‘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 82
📍나의 1인분 정도를 무조건 책임질 수 있는 어른 둘이 만나야 결혼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오고 싶을 때 또한 미련 없이 나올 수 있는 경제적인 준비요. / 127
이 두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전자는, 나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루틴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 후자는, 결혼을 한 기혼여성으로서 격하게 공감되는 내용이었기 때문.ㅎㅎ
혜은의 일기 <엉망으로 열심히>에서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바쁘게 열심히 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상태, 그리고 복잡다단한 심리를 섬세한 필체로 써내려 간 일기였는데, 마치 내 상태와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서였다. 가장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바쁘게 보내고 있는 연말, 정작 가장 소중한 ‘나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보고 달리기만 하는 것 같다. ‘이뤄야’ 할 목표 때문에 나 자신을 ‘잃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이럴 때일수록 사랑하는 이들과 더 다정하게 안부를 교환하고 심신의 건강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돌보기’에 소홀하면서 일상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보통 잘해내고 싶은 게 많을 때 이런 욕심과 오기가 발동하는데, 도대체 나는 지금 얼마나 잘 살고 싶은 걸까? / 64
독자들도 묵직한 일기와 유쾌한 수다가 있는 <일기떨기>를 이 책으로 만나보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