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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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가 가출 청소년 ‘이호’의 자해공갈을 우연히 목격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호를 보며 인수는 자신의 과거, 즉 어른의 부재와 가정에서의 아픔, 서로에게 의존하지만 결코 서로를 믿지 못하는 거리에서 만난 친구들, 반복적으로 노출 됐던 폭력과 무시, 무질서와 범죄에 갈 바를 잃어버렸던 그 시간들을 회상한다. 그렇게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두 시점을 연결하고, 그 과정에서 인수가 이호를 왜 제 집에 머물게 했는지가 드러난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도 인수의 시선을 따라 내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서 많이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들추어낼 때마다 여전히 아픈, 남에겐 절대 털어놓지 않는 지독 했던 내 청소년 시절을.

인수의 서사는 곧 내 이야기였고, 인수의 심리는 곧 내 마음이었다.

인수의 어머니가 아들 인수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 “하나만 묻고 싶다. 우리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도 ‘어떻게 천륜을 끊을 수 있냐. 하나님께 큰 죄 짓는거다. 천 벌 받는다. 네가 참고 용서해야 하지 않겠니’라고 했던 어른들의 말과 뭐가 다를까. 인수가 어머니의 연락처를 차단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겠어서, 나는 씁쓸했다.


가출 청소년들은 저마다 가정에서 상처를 입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반복적인 폭력과 헤어나올 수 없는 범죄 속에서 이들에게 남은 건 무기력과 냉소 뿐. 아이들은 어른의 부재를 스스로 채우려 애쓰지만 끝내 어른과 사회를 향한 높은 불신을 헐지 못하고 돌아갈 길을 잃어 버린다.

“우리는 안 미쳤는데, 사람들이 우리보고 미쳤다고 하잖아.”

“사장 형처럼 없는 죄도 만들어서 덮어씌울걸.”

“아무도 우리 안 믿어줄걸. 우리가 이렇게 만든 거라고 생각할걸.”

어른이란 뭘까, 가정이란 뭘까, 이 아이들을 보호해 줄 어른은 정말 한명도 없었던 걸까. 그저 ‘반항’으로 치부하며 아이들을 질책하면 끝나는 문제일까.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지독하게 아픈 질문을 던진다.


어둡고 축축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작은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건, ‘경우’라는 아이의 존재와 ‘또다른 경우’가 된 인수의 성장이다.

‘경우‘는, 다른 가출 청소년들과 똑같이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했지만 늘 ‘경우(境遇) 있게’ 행동하며 인수로 하여금 “나쁜 짓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친구다. 비굴하지 않고 남의 지갑을 훔치지 않으며, 착실하고 신중하게 살아가던 아이. 과거 인수는 그런 경우를 경계하면서도 의지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이제 더는 인수 곁에서 경우를 만날 수 없지만, 이호에게 어른으로서, 보호자로서, 형으로서 보듬어주는 인수에게서 우리는 또다른 ‘경우‘를 만난다. 가출팸 시절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어른이 된 인수가 이호에게 ’또다른 경우‘가 되어줌으로써 그렇게 인수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에게는경우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누군가에게또다른 경우 되어줄 차례다. 먹먹한 여운이 오래 남는 소설, 읽고나면 어른으로의 한발자국을 내딛게 만드는 소설을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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