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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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슬픔이나 절망의 사건들을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때 ‘비극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글턴의 말대로 “아이의 죽음, 광산의 참사, 인간정신의 점진적 붕괴를 슬퍼하는 어떤 특정 문화에 국한” 되지 않은 일상적인 의미라면 그 표현은 옳다. 그러나 이글턴이 추적하는 “비극은 죽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은,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적 제도로서 시작한 예술적 의미의 ‘비극’에 한정된다.


비극 종말론의 대표자인 조지 스타이너는 “진정으로 비극적인 정신은 근대적인 것의 탄생과 더불어 소멸한다.”고 주장했다. (조지 스타이너 『비극의 죽음 The Death of Tragedy』). 전통적으로 비극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운명이나 섭리를 수반하고 그 굴레에서 신의 현존을 요구한다. 귀족(영웅)을 주인공으로 하여 “신비와 신화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방향을” 돌린다. 영웅의 몰락은 관객들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며 더 극적인 카타르시스(정화)를 제공한다. (마치 기독교에서 죄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것처럼). 비극은 엘리트주의적이고 귀족적이고 영적이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이고 운명의 문제다. 따라서 비극은 세속적이고 계몽적이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대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스타이너에게 ‘근대 비극’이라는 용어는 모순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비극의 소멸은 그 시기를 깊숙히 형성해 온 두 이데올로기-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에 의해서이다. 비극은 주인공의 파멸로 끝나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는 모두 구원과 희망을 말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죽음이 완전한 파멸이 아니며 그 너머에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천국이 있는 주인공은 더이상 비극적이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또한 자본주의 너머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희망이 있는 한 파멸의 비극은 존재할 수 없다. 

여기에 이글턴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기독교 신앙이 비극 너머의 긍정적인 미래에 대해 약속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죽음과 자기를 버리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부활로 귀결되지만 부활이 죽음자체를 없었던 일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 계급사회의 불합리와 공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변증법적 이론가 마르크스에게 갈등을 헤치고 나가는 것은 복구 불가능한 상실을 포함한다.”


비극은 죽었는가?” 이글턴은 말한다. 비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고. 비극은 근대에서 죽은 아니라 오히려 변형된 모습으로, 새로 연장된 생명으로 살아있다고. 우리는 이제 영웅(귀족) 아닌 보통의 사람(평민)에게서, 예술 형식의 하나가 아닌 생활방식의 하나로서, 무대가 아닌 일상에서 비극을 조우한다. 참담한 현실에 고통 받고 죽음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하는 인간이 바로 비극의 주인공이다. 예술적 의미로 굳이 치환되지 못해도, 동정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지 못해도, 비극은 내가 살아가는 곳에서 어느 누구나 겪고 있기에 공공의 감수성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위로할 있다. 아래에서 흘리는 눈물도 높은 데서 흘리는 눈물만큼 비극적이다. 비극은 바로 이곳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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