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우상 : 김형욱 회고록 세트 - 전5권
김경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김종필과 함께 육사 8기생으로 5·16 군사 쿠데타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박정희 밑에서 6년 3개월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의 회고록이다. ‘멧돼지’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굵직한 목소리로 5·16에서 1979년 유신 정권까지의 박정희에게 초점을 맞춰 회고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학생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에 몸담아 온 김경재가 재구성했다. 자신만만하고 패기에 넘치는 그의 모습처럼 글들도 시원시원하다. 그래서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단군 이래의 가난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구해 낸 민족의 지도자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시대에 편승한 기회주의자이자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박정희. 이 책은 철저히 후자 쪽에 속한다. 일종의 박정희 비판서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일대기를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1917년 9월 30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박성빈의 5남으로 태어남
1932년 구미공립보통학교 졸업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 재직(3년)
1942년 만주국 신경군관학교 제2기 수석 졸업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 졸업(3등) 
           만주군 보병 제8사단 소위로 임관
1945년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지대장 김학규)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 12월 졸업(3등), 소위 임관 
           대구 10·1 폭동 중 황태성, 김성곤과 활동하던 셋째 형 박상희 구미에서 피살
1948년 여순반란 사건 및 숙군 파동 때 남로당 군사부장으로 활동한 혐의로 체포 
           만주국 인맥의 도움과 조직원 정보 공개 및 체포 협조로 사형에서 무기징역, 

           무기징역에서 파면으로 감형됨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장도영의 구명 운동으로 소령으로 복직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장면 정권을 실각시킴
1963년 제5대 대통령 취임
1965년 한일협정 타결
1967년 제6대 대통령 취임
1969년 3선 개헌 통과
1971년 3선에 성공, 베트남에 한국군 파병
1972년 10월 유신 단행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사망
1979년 10월 26일 오후 8시경 사망

박정희는 민족, 민주, 역사 등의 보편적 가치나 개념보다는 자신의 야욕을 우선시한 이기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다.

그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는 권력이다.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반장을 하면서 맛들인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교사 생활도 그만 두고 만주까지 찾아가 군인의 길로 접어든다. 나이 제한에 걸렸지만 천황에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까지 써 가면서 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일본인으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다. 박정희는 타고난 군인이다. 대구사범 시절의 성적은 하위권이라 박정희 집권시절에는 열람을 금했다고 하던데 군인으로서의 성적은 매우 뛰어나다. 만약 해방이 되지 않았다면 일본군 장교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활동했으리라 생각된다. 해방이 되자 박정희는 베이징의 광복군을 찾아가 장교가 된다. 광복군 10만 명을 조직하여 국군의 모태로 삼고자 했던 정책에 편승한 것이다. 귀국하여서는 국군 장교가 되어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인 황태성의 작업으로 남로당 군사부장으로 활동한다. 여순사태 때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만주국 인맥의 도움과 남로당 조직원 명단 폭로와 체포 협조로 파면에 그친다. 만주국 인맥은 한일회담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한국전쟁으로 다시 군대에 복귀하고 반역의 길을 걷게 된다. 분명 박정희는 뛰어난 역량을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그 역량을 자신의 야욕을 위해, 남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데 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버림받은 인물인 김형욱에게 곤욕을 치르고 결국 김재규에게 죽게 된다.  

 

“피도 눈물도 예의도 없는 냉혈동물의 망나니짓을 지도력이라고 치켜세우는 데는 말문이 막힌다. 사적 이익을 위해 일본에 봉사한 친일파의 수준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의식이 철저히 일본화된 천황주의자”라고 최상천은 박정희를 평한다.
박정희의 본질은 친일적인 성향이고 그의 원죄는 공산주의 활동이다. 광복 전까지는 철저한 일본인이었고 광복 후에는 정권 탈취와 유지 비용을 일본으로부터 유입했다.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의를 모델로 하여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다. 남로당 군사부장으로 활동한 경력과 황태성 사건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사상을 의심 받았다. 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에게 15만 표 차로 이겼는데 좌익 활동이 많았던 전라도에서 29만여 표 차이를 기록한다. 결국 좌익 표로 이긴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국은 박정희에게 비우호적이었다. 케네디와의 면담도 두 번 거절당하고 세 차례만에 성공하였다. 지독히 자존심 강한 박정희는 모욕감을 느꼈으리라. 집권 내내 미국과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는 반미와 친일로 나타나게 된다. 자주 국방과 핵 무기 개발은 반미에 따른 자구책이었다. 만약 미국과의 관계가 원만했다면 그 누구보다도 친미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인물이다.  

 

“박정희는 그 정도의 제한된 자유와 민주적 방식도 참아낼 수 없는 위인이었다. 도대체 그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교육받고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체득하고 있던 사고 방식은 철저한 ‘명령과 복종’ 관계를 바탕으로 한 일본 군국주의 정신이었다.”(김형욱) 이러한 박정희에게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의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매우 높다.
그 이유는 서민적인 풍모 때문일 것이다. 밀짚모자를 쓰고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어울리고, 검소한 생활 습관으로 청렴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실제로 넥타이, 만년필, 전기면도기만 외제를 사용하고 모두 국산품을 애용했다. 사망 후에는 낡은 허리띠와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핀 때문에 의사가 시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도 하고, 먹거리도 지극히 소박했다고 한다. 이런 개인적인 풍모에다가 새마을운동, 그린벨트 및 조림사업, 경부고속도로건설 등 몇 가지 긍정적인 정책과 경제 성장으로 신화가 만들어 지고, 박정희 정권 하에서 온갖 특권을 누려오던 수구 기득권 세력과 그들과 결탁한 조`중`동 수구 언론의 선동에 의해 그 신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화는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역사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박정희 비판서이다. 하지만 비판하는 김형욱도 문제적 인물이다. 문제적인 인물의 회고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수 많은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견문이 짧아 그런지 아직 이 책과 관련된 문제를 접해 보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동안 막연하게 가지고 있었던 박정희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평소 생각해 왔던 것처럼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훨씬 많은 인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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