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 지옥 열린책들 세계문학 93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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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는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중역판과 개역판의 실수와 오류를 바로잡아 현대 한글로 다시 태어난 『신곡』>


그리고 이 번역의 뛰어남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 번역의 문제를 지적한 역자 자신의 글을 책소개에 실어 놓았다. 출판사는 이 번역의 우월함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는 생각으로 해당 대목을 옮겨놓은 듯하다. (글의 원본을 읽어보면 역자도 이 사례를 기존 번역들의 졸렬함을 확인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로 여기는 듯하다.) 


<몇 가지 실수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지옥」 제21곡 100~101행에 보면, 악마 가운데 하나가 두려움에 떠는 단테를 가리키며 자기 동료에게 「Vuo’ che ’l tocchi in sul groppone(내가 저 녀석의 어깻죽지를 건드려 볼까)?」 하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에서 groppone는 <어깨>를 가리키는데, 우리말 번역본들은 하나같이 <궁둥이>나 <엉덩이>로 옮기고 있고, <어깨>로 번역한 판본은 하나도 없다. 악마들의 천박하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는 그런 저속한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분명히 원본에서 멀리 벗어난다. 이것도 분명히 영어 번역본들의 영향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이 이를 <엉덩이>로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롱펠로, 세이어즈, 맨덜봄, 코터의 번역본도 하나같이 rump 또는 bottom으로 옮기고 있다. (김운찬, 「고전번역 비평-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57) 단테의 『신곡』」, 『교수신문』, 2006년 12월 26일자)>


<교수신문>에 실린 글이니 확실한 권위로 뒷받침되는 것처럼 보일만도 하다.


그러나 기존 번역에 대한 역자의 이런 지적은 부당하다. groppone는 groppa(엉덩이)의 확대형으로 사실상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며, 최소한 엉덩이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오히려 groppone는 사람에게 사용될 경우에는 장난과 농담의 맥락에서 주로 쓰이는 표현이므로 (그리고 바로 단테의 해당 본문이 그런 맥락이므로)  '궁둥이'로 번역하는 것에 하등 문제가 없다. 

혹여나 장면 해석의 여지로 그 적확함을 다툰다고 하여도, 적어도 역자가 자신있게 지적한 것처럼 <엉덩이>가 "분명히 원본에서 멀리 벗어"난다고 하기는 어렵다.  (만일 역자들끼리 오역을 서로 문제 삼는다고 하면 김운찬 씨의 <어깻죽지> 쪽이 오히려 더 오역 쪽에 가까울 수도 있다.)

역자가 말하고 있듯이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이 <엉덩이>로 옮기고 있다면, 자신의 판단을 한번 되돌아봄직도 한데, 아무튼 대단한 자신감이라고 하겠다.


* 교수신문에 실린 번역비평 전체에서도, 역자는 꽤나  자신만만한 평가를 내린다. 

역자는 고 최민순 신부의 번역을 중역으로 짐작된다고 하였다가 뒤에서는 중역이라고 아예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짐작과 단정의 근거는 단 하나도 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민순 신부의 번역과 주석을 살펴보면 역자의 말대로 영어나 스페인어에서 중역했다는 단서를 찾기 힘들다. 결정적 판단이야 어떻든, 적어도 근거를 대려는 노력도 없이 중역이라고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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