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건진 생명의 이름들 - 바다생물 이름의 유래
박수현 지음 / 지성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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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고향인 내가 서울로 시집을 와서 맞은 첫 명절,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수용 생선이 보이지 않았다. 시어머니께 어머니 생선을 빠뜨리셨나봐요.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라고 했더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솥단지를 가리키셨다. 뚜껑을 열어보니 손바닥만한 조기들이 얌전히 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우리 고향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작은 크기의 생선을 제사상에 올리다니 달라도 너무나 다른 풍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부산에서 쓰는 제수용 생선은 성인 남자의 팔뚝만한 크기로 기본 다섯 마리 정도는 큰 채반에 널어놓는 풍경만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대대로 충청도에서 살아온 시댁은 생선이 귀했던지라 당연히 제수용 생선을 바닷가처럼 큼지막한 것을 올릴 수가 없었고 남편도 어린시절부터 생선은 아주 귀한 음식으로 알고 자랐다고 했다. 반면에 나는 세상에 생선은 갈치와 조기 뿐인줄 알다가 황석어같이 작은 생선이나 삭힌 홍어는 결혼하고 나서야 맛보게 되었다. 바다생물이 동네마다 다르게 잡히고 그에 따라 식습관이나 제사문화 마저도 달라진다는 것을 몸소 깨달은 초보 주부때 경험이었다.

 

생선을 요리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오던 나에게 스킨스쿠버 동호회 회원인 후배가 건네 준 <바다에서 건진 생명의 이름들>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후배는 내게 다이버들은 늘 어류도감을 펴놓고 그 날 다이빙 할 때 본 물고기 이름을 찾고 그림도 그려보며 논다면서 다이버가 아니어도 이 책은 꼭 읽어봄직 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류 뿐 아니라 연체동물, 절지동물, 자포동물, 극피동물, 바다포유류,바닷말류에 이르기까지 바다생물을 일목요연하게 소개해놓은 이 책은 사진기자 출신이면서 엄청난 다이버경력을 갖춘 저자 덕분에 바닷속 풍경은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독자에게 전달되었다.

무엇보다 학창시절 국사 시간에나 들어봄직한 자산어보’, ‘성호사설’, ‘지봉유설’ , ‘동국여지승람등의 옛 문헌 속에 나온 생선들의 어원이나 속담을 소환한 작가의 방대한 자료 수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아무리 옛 문헌에 많은 내용들이 있더라도 그것을 발굴해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해양생물에 대한 애정없이는 불가능한 일 일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조상들이 남기신 속담이나 말들에 감탄을 하게 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수백년 전의 삶이나 오늘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그냥 무심코 습관적으로 사용하던 말이나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어른들의 말씀에 이런 근거가 뒷받침되어 있었구나 싶으니 정말 무릎이 탁 쳐지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생선의 맛이 산란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영양분이 산란에 집중되는 바람에 맛이 떨어진다는 과학적 근거는 전혀 모른채 생선을 골라 왔고, 죽방멸치는 왜 그렇게 불리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들은 풍월로 무조건 죽방멸치를 사왔던 것이다.

강원도 황태 덕장에 가서 사온 황태로 북엇국만 끓여 먹었는데 명태에 얽힌 수많은 속담과 은어가 이렇게 풍성할 줄 몰랐다. 재산이 한꺼번에 훅 줄어들 때 북어껍질 오그라들 듯이라는 표현을 한다든가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할 때 하는 노가리 깐다라는 속된 표현도 명태가 한꺼번에 알을 엄청 많이 낳는데서 유래했다니 조상들의 눈썰미와 센스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얼마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만찬에서 구이 메뉴로 등장해 유명세를 날린 달고기가 부산에서만 잡히는 흰 살 생선이고 유럽에서는 아주 고급생선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조만간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면 이 책의 저자가 북한 바다의 생물에 대해서도 집대성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여름에는 꼭 민어를 먹어야 몸보신이 된다고 하던 어머니 말씀과 함께 제사상에 꼭 빠뜨리지 않아야 할 생선은 민어와 도미였는데 조상님께 후손을 밀어달라고 민어, 도와달라고 도미를 올린다는 경상도식 기원도 떠올랐다. 역시 책에서도 민어는 복달임 풍습에 쓰였음을 언급하고 있었다.

고급 생선이면서도 가정에서는 거의 요리하기 힘든 복어를 시장에서 장만하고 있는 풍경도 흥미로웠지만 바닷속에서 서식하고 있는 복어의 조금은 귀여운 모습은 거의 처음 보는지라 신선했다. 저자가 다이버가 아니라면 결코 독자에게 보여줄 수 없는 사진들이었다. 한편, ‘본초강목에 기록된 내용과 영어이름의 유래는 물론이거니와 복어의 독에 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는데 단순한 백과사전식 아니 네이버 검색을 통해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닌 어류학자의 코멘트를 첨부한 성의있는 서술이 독자들에게 신뢰를 주었다. 게다가 괜히 죠스같은 영화나 노인과 바다 같은 소설로 인해 공포의 대상이 된 상어지만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하는데 바닷속에서 유영하는 모습이 아주 기품있어 보였다.

 

이 책의 70프로 정도를 차지하는 어류 편을 읽다보니 정말 생선 하나하나에 얽힌 에피소드들이 소록소록 떠올랐다. ‘서대는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가장 좋아하셔서 어시장가면 늘 꾸덕꾸덕 말린 서대를 사서 양념장 발라 구워드렸던 추억, ‘숭어하면 학창시절 음악시험 시간에 슈베르트의 송어를 초성만 따서 외운 친구가 시옷이니 슈베르트고 송어이래놓고는 정작 시험 때는 비읍이 떠올라 베토벤의 붕어라고 답해서 수십년째 회자되는 사연, 고갈비가 진짜 갈비인줄 알았고 쥐포를 진짜 쥐고기로 만드는 줄 알았다던 서울 친구, 아무리 맛있는 전어 굽는 냄새가 좋아도 작심하고 가출한 며느리가 겨우 그 전어 때문에 돌아오겠냐 의견 분분했던 친구들 등등 알게 모르게 우리의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던 바다생물들이었다.

 

연체동물 중 가리비와 굴, 꼬막,낙지 등도 친숙한데 갯벌에서 낙지를 채취하는 사진을 보니 아이들 어렸을 때 갯벌체험 갔던 추억도 되살아났다. 갯벌에는 절지동물인 게도 잡을 수 있었는데 그 때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한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제대로 경험했다. 게를 무장공자(배알없이 외세에 의존하는 사람을 빗댄 표현)‘라고 했던 안국선의 금수회의록까지 언급함으로써 이 책이 단순히 바다생물에 대한 도감이 아니라 인문적 소양을 높이는데도 기여한다는 것을 반증했다. 바닷말류라고 하면 웬지 낯선 것 같으나 결국 우리가 자주 먹는 미역과 다시마 파래들이라 완전 반가웠다.

바다포유류라 하면 고래만 떠올렸는데 해표, 물개, 심지어 북극곰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멸종위기에 놓인 북극곰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 책을 읽은 독자에게는 그야말로 뼛속까지 와닿는다. 바다생물의 이름과 유래도 재미있고 그들과 오랜 세월 함께 하면서 파생되어 온 속담속에 우리 조상의 지혜와 숨결도 느껴졌다. 하지만 책장을 덮을 무렵엔 무거운 책임감이 밀려왔다. 이 소중한 바다생물들과 오래도록 공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기심이나 욕망을 과감히 덜어내는 일이 최우선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독자를 계도하겠다는 거창한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책장을 넘기는 동안 내내 이렇게 소중한 바다, 이렇게 귀한 바다생물을 잘 보존해 물려줘서 내가 누린 이 기쁨을 우리 아이들도 꼭 맛보게 하고 싶다는 소박하지만 간절한 바람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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