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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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랑해도 외롭고 사랑하지 않아도 외롭습니다. 사랑을 받아도 외롭고 사랑을 받지 못해도 외롭습니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입니다. 저는 이 책이 그 본질을 이해하고 긍정하는 데에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로워도 외롭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사랑하기 위하여.” (p. 7)





시집을 즐겨읽지는 않는다. 시는 어렵고 모호하다는 생각에 시를 읽는 것이 불편했다. 그러다 작년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몇 권을 읽으면서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에 대한 관심은 늘어도 여전히 멀게만 느껴져, 다른 시인들의 시집을 선뜻 고르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나는 이 책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를 발견했다. 정호승 시인의 시와 그에 관련된 시인의 생각을 모아 놓은 책인것 같아 관심이 갔다. 사실 시를 읽을 때면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이 시를 쓴건지 궁금할 때가 많았는데, 이 책은 그런 나의 궁금함에 대한 답이 쓰여진 책인 것 같아 읽어보고 싶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시에 대해, 그리고 시인의 마음에 대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볼 수 있길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산산조각]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p. 15,  『산산조각)



산사의 범종에 금이 가면 종을 칠 때마다 깨어진 종소리가 난다. 그러나 종이 완전히 금이 가고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면, 그 파편 하나하나를 칠 때마다 제각기 맑은 종소리를 낸다. 깨어진 종의 파편이므로 깨어진 종소리가 나리라고 생각되지만 그게 아니다. 깨어진 종의 파편 하나하나가 제각기 종의 역할을 한다.

내 삶이 하나의 종이라면 그 종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나는 산산조각 난 내 삶의 파편을 소중히 거둔다. 깨어진 종의 파편 파편마다 맑은 종소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p. 20~21)


무언가를 소유하게 되면서 드는 마음. 그것이 깨어질까 걱정하는 마음.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는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시 속의 부처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 그리 걱정이야. 깨어진 종의 파편들은 그대로 또 하나의 종소리를 담고 있는 것을.








[바닥에 대하여]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p. 55,  『바닥에 대하여』)



자네가 지금 바닥에 굴러떨어졌는데 만일 바닥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없이 깊은 어둠의 나락과 심연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고 있을 게 아닌가. 그 끝없는 끝이 어디이겠는가. 바로 죽음 아니겠는가. 그런데 잘 생각해보게. 자네가 지금 주저앉아 울고 있는 바닥이 자네를 죽음의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게 힘껏 받쳐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 얼마나 감사한가. 바닥은 원망과 부정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감사의 존재야. 자네는 바닥을 그냥 딛고 일어서기만 하면 되는 거야.” (p. 59)


바닥은 인생의 끝이 아니다. 저자는 바닥이 우리를 어둠속으로 가라 앉지 않도록,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받쳐주고 있다고 말한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도 관점을 바꾸면 반환점이 될 수도, 또는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마음의 사막]


실은 누구의 인생이든 그 안에는 황량한 사막이 하나씩 존재한다. 다만 두려워 그 사막에 가지 않으려고 할 뿐이다. 그곳에는 사랑의 부재, 이해의 부재, 용서의 부재 등 온통 부재의 덩어리가 모래만큼 쌓여 있다. 그 사막을 걸어가봄으로써 비로소 삶의 절대적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절대적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그 사막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p. 164)








[종소리]


나는 지금까지 나를 타종해온 내 인생의 종메를 원망하고 두려워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종메는 나로 하여금 아름다운 인생의 종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 나를 때려온 것인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분노하고 원망만 하고 살아온 게 아닌지 몹시 두렵다.” (p. 261)








[황순원 선생의 틀니]


소나기가 내려야 무지개가 뜬다. 무지개가 뜨지 않으면 하늘은 아름답지 않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에 해는 더욱 빛난다. 따라서 무지개는 소나기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지개만 보고 소나기는 보지 못한다. 소나기가 왔기 때문에 무지개가 떴다는 사실을 잊어 버린다. 왜 내 인생에 불행의 소나기, 고통의 소나기가 퍼붓느냐고 원망한다.” (p. 417)


한껏 소나기가 퍼붓다가 그치고 이어서 햇볕이 들 때 무지개가 나타난다. 빗물에 씻긴 맑은 공기 위로 무지개가 떠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지개를 쳐다보게 된다. 같은 공간 속에서 그저 한순간 무지개가 생겼을 뿐인데, 무지개 하나로 세상은 갑자기 밝음과 희망의 이미지로 가득 차는 것만 같다.


예전의 나는 나의 삶이 좋은 것, 기쁜 것, 즐겁고 행복한 것들로만 가득차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좋아 보이는 타인의 삶도 그 안에는 저마다의 고민, 걱정이 있다. 하늘의 무지개도 소나기가 퍼부어야만 나타나는 것이다. 나의 삶에 불평을 가질 때 이 글이 생각날 것 같다. 지금 내 모습이 불만족스럽다면 소나기가 내리는 중이라고 생각해보자. 내리는 비는 언젠가는 그칠 것이고, 흐렸던 날들에 대한 위로의 무지개가 뜰지도 모를 일이다.










‘시알못’인 나에게는 시에 담겨 있었던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정호승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시인의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에게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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