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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1년 10월
평점 :
‘리추얼의 종말’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한 과거로의 도래가 아니다.
‘의식, 잔치, 축제’가 상실된 현재의 모습을 통해, 정신없이 잃어버린 어떠한 것, 그로 인한 공허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독자는 무엇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리추얼의 상실은 시장경제의 도입과 맞닿아 있다.
사물의 객관성 자체는 “삶을 안정화하는 고정된 말뚝”인 반면에,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토가 된 “생산 강제”는 “삶의 지속성”을 소모하고 파괴한다.
또한 현대사회의 시간 개념은 “변화무쌍한 흐름”이자 “멈춤”을 주지 않는, 즉 “거주 가능”하지 않은 불안정한 것이다. 이로부터 야기되는 소리 없는 불안과 공포는 타인의 눈을 마주보기를 거부한다.
감정마저 공공연하게 상품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저자는 이러한 감정의 소비가 “나르시시즘”을 강화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과도한 나르시시즘 사회에서는 “공정함이나 인간적임, 지속 가능성 등의 가치가 경제적으로 도살되고 해체”된다.
저자는 그러한 생산성의 강제 때문에 “가치들을 통하여 공동체와 관련 맺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와 관련 맺는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자아 리비도”는 결국 리추얼과 결합할 수 없는데, 리추얼은 자기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타인에게 눈을 돌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때 리추얼의 종말은 간과할 만한 것인가.
진정성이 강제되는(기의에 의해 기표가 간과된) 예술의 탈마법화,
자기 내면 안에 갇혀 버린 심리적 인간(호모 프시콜로기쿠),
맺음이 있는 ‘서사’와 반대적인 성격을 가진 가산적인 ‘정보’,
“관조적 휴식”이 아닌 노동을 위한 휴식,
가벼운 이벤트로 환원되는 축제(집약적 삶)의 현장,
직업교육을 위한 대학,
생과 이어지는 죽음이 아닌 단순히 제거되어야 할 부정으로서의 죽음,
성직자의 아름다운 의례(공동체와의 결합과 숭고한 예배 의식)와 대비 되는 자본 숭배 등
이러한 것들에 대해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인 가치 판단을 넘어서 혼란의 한 가운데에 있는 우리가 한 번은 충분히 생각해봐야 할 주제라고 여겨진다.
“삶에 머물기 위하여 삶의 의미를 포기하기”라는 유베 날리스라는 로마 시인 인용문도 인상 깊다.
어쩌면 너무 의미에, 혹은 보이지 않은 강요에 목을 맨 나머지 무엇이 상실되고 있는지 깜빡 모른 채 어떤 굳건한 것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않은가.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진실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행위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데 많은 투자를 하고, ‘나를 사랑하기’를 제창한다.
그러나 ‘나’만 존재하는 삶은 빈곤하다.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음의 ‘텅 빔’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을 침울하게 하는 파괴로서의 빈곤이다.
“오늘날 영혼은 기도하지 않는다. 영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는 말이 무섭게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동체적인 것, 협화음을 내는, 즉 ‘공명’은 배척되는 것이 옳은가. ‘나’만을 제창하는 것은 공명을 만들 수 없다. 점점 간소화되는 의례의 이면에 슬픔 공동체, 화합 공동체의 상실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단기적인 자극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매체의 정치 이슈 또한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는 충분히 공명하고 있는지 그 속의 개인이 추구하는 ‘나 사랑하기’는 과연 정말 사랑의 방식으로서 충만하게 있는지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공감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다름 아니라 원자화된 사회에서 요란해진다”라는 구절도 역시 기억에 남는다.
오히려 이때의 공감은. 루쉰의 표현을 빌려 “너절한 적선의 밑천”으로 변한다. 필요가 아닌, 결핍에 의해 과도하게 더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에게 집중한다. 여기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공동체 감각이다. 백석의 <모닥불>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자신이 미미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라’라는 아룬다티 로이의 말을 좋아하는데, 자신이 미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자각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제창하고 있는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아닐까.
현재의 혼란스러운 팬데믹 상황과 그보다 더 위협적일 기후위기의 상황 속에 놓여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동체의 회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체를 무시하는 것은 기만인지도 모르겠다.
“(...) 리추얼화된 과정인 모든 유혹의 관행은 (...) 소망의 즉각적이며 강제적인 충족을 위하여 점점 더 사라져간다.” (P.114)
“보호 장치로서의 리추얼이 제거되면, 삶은 완전히 무방비로 된다. (...) 오히려 결국엔 이 무방비와 비거주를 심화할 것이다.” (P.26)
사라져가는 샤머니즘, 산업혁명 이후 황폐화돼버린 농촌 사회, 상실된 고향, 코로나로 해체된 공동체 문화, 디지털화된 감시와 생활이 무조건 옳은 것인가하는 의심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사유는 획일화되는 순간 무너진다.
우리의 생이 덧없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도 물론 좋지만 공동체도 역시 해체돼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